제 36장. 악수(惡手)의 말로. -01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모든 살수들을 제압한 건 아니었다.
눈치 빠른 몇몇 살수들은 싸움에 참전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반호진 일행이 떠나길 기다리며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기척은 이미 반호진에게 전부 다 파악이 된 상태였다.
“허허허. 그리해 주면 우리야 고맙지.”
“사실 많이 지친 상태거든.”
“어후. 나이는 속일 수가 없어. 진짜 예전 같지 않아.”
팔대호법의 너스레에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암월교주의 마혈과 아혈을 점혈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 방문했지만 지난 생에서 와 본 적이 있기에 양성소가 어디에 있는지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이미 기감을 집중해서 확인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반호진은 곧장 방향을 잡았다.
“우리도 간다.”
“혹시 모르니까 암월교주는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직 숨어 있는 살수가 있으면 데려갈 수도 있잖아요.”
“암월교주는 가장 많이 다친 조운이가 들고 가면 될 것 같은데요. 잔챙이들은 형님이 나설 것도 없이 저나 이륭이가 잡으면 되고요. 숨어 있는 위치만 알려 주시면 저희가 잡을게요.”
“저는 아직 여유 있습니다.”
반호진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선우방,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무조건 같이 가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도 똑같이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르고서 다가오는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정 걱정되면 그렇게 해.”
“맡겨 주세요!”
반호진의 허락에 서조운이 잽싸게 암월교주를 어깨에 짊어졌다.
마치 짐을 짊어지듯이 말이다.
그러자 암월교주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허어…….”
“이런 천인공노할!”
우연을 가장한 반호진의 안내에 양성소에 도착한 법무와 팔대호법은 눈을 부릅떴다.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가축처럼 갇혀 있는 광경을 보자 분노가 치민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막내인 서조운은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흥분은 잠시 후에. 우선은 아이들부터.”
“맞아. 화낼 시간도 없어.”
“바로 풀어 줄게!”
반호진의 말에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은 분노할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울화는 나중에 풀어도 되었기에 네 사람은 물론이고 법무와 팔대호법도 빠르게 움직이며 작디작은 방에 우르르 갇혀 있던 아이들을 구출했다.
“욱!”
그러던 중 정이륭이 구토를 삼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차마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에 정이륭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토악질을 할 것 같아서였다.
“으으…….”
도망치려다가 잡힌 모양인지 사지가 잘린 남자아이가 어육점(魚肉店)의 돼지고기처럼 천장에서 내려온 쇠사슬에 묶여 있는 걸 보자 정이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서였다.
“피하지 마. 네가 그러는 사이에도 아이가 느끼는 고통의 시간은 길어지니까.”
“사,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고저가 없는 목소리였으나 그렇다고 무심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살기와 분노를 잔뜩 억누른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정이륭은 붉어진 눈으로 반호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아이가 원할까?”
“크흑!”
눈알이 없어 푹 들어간 눈두덩이의 모습에 정이륭은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어느새 눈꼬리를 타고 흘러 내려와 볼을 가로질렀다.
“미친……!”
“이런 개새끼들!”
심상치 않은 정이륭의 목소리에 선우방과 모용척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노성을 터트렸다.
보는 순간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게다가 방의 양옆에는 시체가 된 아이들이 썩어 가고 있었다.
“다음 생에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려무나. 그리고 어른으로서, 미안하다.”
두 귀도 잘려서 말을 듣지 못할 테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말했다.
그가 저지른 일이 아니지만 한 명의 어른으로서 이 말은 꼭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와 동시에 공력을 이용해 심장을 멈췄다.
아이가 최대한 고통을 느낄 수 없게, 편안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절대 가만 놔두지 않겠어!”
반호진의 품 안에서 서서히 약해지는 아이의 호흡을 느끼던 선우방이 방을 박찼다.
평소에도 아이를 좋아하던 성격답게 선우방은 극도로 분노했다.
그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나 누구도 그런 선우방을 말리지 않았다.
콰앙! 쾅!
암월교와 싸울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진득한 살기가 건물 밖에서 폭발하듯 솟구쳤다.
바로 선우방이 일으키는 살기였다.
그 섬뜩한 살기에 정이륭과 모용척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전부 다 죽이진 않겠죠?”
“죽이진 않고 이 아이들과 똑같이 만들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괜찮네. 원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잖아. 지들이 저지른 짓이니 똑같이 받아야지.”
“웬일이래? 네가 그런 말도 하고.”
“짐승은 짐승처럼 대해야지. 사람은 사람처럼 대하고.”
모용척이 진심으로 놀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정이륭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나도 사람이야.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화를 안 내겠어?”
“그건 인정. 후우.”
“그나저나 아이들이 걱정이네. 본래의 생활로 되돌아가기는 힘들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노력은 해 봐야지.”
정이륭과 모용척의 시선이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왠지 반호진이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찾아봐야지. 일단 이곳부터 정리하자.”
“예.”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반호진은 남자아이의 양쪽 어깨를 꿰고 있던 쇠꼬챙이를 풀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남자아이의 시신을 향해 합장했다.
전생에서는 암월교의 본거지를 습격하기는 했으나 양성소까지 들어가지는 않았기에 지금의 광경은 반호진도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두 눈을 감고서 남자아이와, 이곳에서 죽어 간 아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더 서두르겠습니다.”
“이런 방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반호진을 따라 아이들을 향해 합장한 두 사람이 황급히 방을 나섰다.
혹시라도 이런 방이 또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와 같은 방은 더 없었다.
화르르륵!
살아 있는 아이들을 모두 구출해 낸 반호진은 서조운에게 눈짓했다.
화섭자를 사용해도 되지만 한 번에 큰 불을 붙이는 건 극양지기가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 뜻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서조운은 양손으로 극양지기를 일으켜서는 불을 피웠다.
텁.
괜히 극양지기가 아닌지 순식간에 건물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길을 보며 반호진은 조용히 합장했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합장을 하며 이곳에서 죽어 간 아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바삐 움직이는 금가장의 무사들과 달리 반호진은 한가로이 뒷짐을 지고서 서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서쪽 하늘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뒤져도 네놈이 원하는 걸 얻지는 못할 거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암월교주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반호진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에 암월교주는 키득거렸다.
곧이어 반호진이 지을 답답한 얼굴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반호진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널 살려 둔 게 증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그럼 아닌가?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맞기는 해.”
“백날 찾아봐라. 절대 찾을 수 없을 거다.”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있기는 한 모양이네?”
반호진이 짐짓 떠보듯이 말했다.
그러자 암월교주가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크큭! 글쎄? 있을까? 없을까?”
“신났군.”
“나는 비록 죽겠지만 너 역시 원하는 걸 얻지는 못할 거다!”
사지가 잘린 순간 이미 무인으로서 그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흉흉한 눈빛으로 항복한 수하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걸 봤기에 암월교주는 살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쉽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반호진을 괴롭히다가 죽을 생각이었다.
“그건 네 바람이고.”
“금가장을 믿는 모양인데, 여기는 암월교다. 이곳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이는 바로 나지.”
“아직 다 죽은 건 아닌데.”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꼴인데 잘도 협조하겠군.”
“그럴 테지.”
암월교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애가 탈 것이었다.
암월교를 쓸어버린 것으로 일차적인 복수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터였다.
또 암월교가 사라진다고 한들 의뢰인이 살아 있다면 제이, 제삼의 세력이 반호진을 노릴 터였다.
‘강하다고 해도 사람이지. 한 달은 어찌어찌 버텨도 일 년 내내 버티는 무인은 없다.’
천하십대고수 정도라면 그 어떤 살수문파라도 의뢰를 받지 않겠지만 반호진은 아직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후기지수를 뛰어넘은 강자로 인정받지만 살수문파들이 시도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앞으로도 반호진은 계속해서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할 터였다.
무림십왕의 수준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의뢰인이 어떻게든 그 전에 처리하려고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결국 넌 죽게 되어 있다! 크큭! 크하하하!”
“언젠가는 죽겠지. 근데 내가 죽는 순간은 내가 정해. 다른 이가 정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겠지.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내가 죽어서도 저주할 테니까!”
“일단 그 주둥이부터 막아야겠네.”
기를 쓰고 속을 뒤집어 놓으려는 암월교주를 내려다보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악착같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골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네놈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아혈을 점혈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지. 네 비명과 탄식을 들어야 하는데. 네가 죽을 순간은 정해져 있어. 극도로 절망하고 좌절했을 때.”
“흥! 허세는!”
암월교주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여서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반호진의 행동에 암월교주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쿵쿵.
“어디 보자.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남의 집 금고 터는 중이지. 그것도 비밀금고.”
“비, 비밀금고라니? 나한테는 그런 거 없다!”
“근데 말은 왜 더듬어?”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음을 말이다.
한때 특급살수 출신답게 호흡과 표정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괜히 몸의 언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쿵!
“여기네.”
발뒤꿈치로 여기저기를 두드리던 반호진이 다른 곳과는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나자 히죽 웃었다.
원하던 곳을 발견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미소가 암월교주에게는 너무나 사악하게 보였다.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쓸데없는 일에 힘 뺄 시간이 없을 텐데?”
“왜 없어? 자잘한 일은 금가장에서 온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보여 주기식 금고나 창고도 마찬가지고. 근데 진짜는 바로 여기지.”
푹.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있는 암월교주를 직시하며 반호진이 몸을 숙였다.
쭈그리고 앉아서는 손을 땅에 집어넣었는데 마치 두부를 만지듯 반호진의 오른손이 부드럽게 지면을 으깨며 속으로 파고들었다.
끄그그긍.
이윽고 지면이 들썩였다.
성인 장정 한 명이 딱 들어갈 만한 정사각형의 철판이 흙덩이들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암월교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이것 참 고마워서 어쩌나. 내 재산을 늘려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