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장. 징벌(懲罰). -04
끊임없이 몰려드는 살수들의 공세에 서조운과 선우방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거의 한계까지 지친 것이었다.
게다가 살수들은 동귀어진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일행들로서는 더더욱 힘에 부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 다른 이들을 도와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스극! 슥!
그리고 독에 대해 대비를 했다고 해서 상처를 안 입는 건 아니었다.
해독제와 피독주는 말 그대로 독만 막아 주었을 뿐이었다.
암기와 단도, 비수를 막아 주는 건 아니었기에 네 사람의 몸에는 상처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었다.
그런데 상처를 입을수록 네 명의 눈빛은 더욱 독해져 갔다.
악에 받쳐서 살수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공력은 시간이 갈수록 소모되고 체력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넷은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압!”
그중 발군의 활약을 펼치는 건 단연코 서조운이었다.
가장 공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답게 서조운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여전히 검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왼손에는 수강을 일으키고서 살수들을 도륙했다.
“흐읍!”
그 모습에 선우방과 모용척도 힘을 냈다.
막내인 서조운이 활약하자 질 수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꽝! 꽝! 꽝! 꽝!
거기다 정이륭의 활약도 대단했다.
자잘한 상처는 입어도 치명상은 입지 않겠다는 듯이 정이륭은 수십 명의 공격을 피해 내며 한 명씩 확실하게 쓰러뜨렸다.
서조운처럼 강력한 한 방은 없어도 꾸준하게 적들의 숫자를 줄여 나갔다.
‘싸우면서 성장하는구나.’
그런 네 명의 모습에 팔대호법과 함께 살수들을 학살하던 법무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재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싸우는 와중에도 발전할 줄은 몰라서였다.
특히 체력적인 부분에 법무는 감탄했다.
반호진의 무지막지한 수련량을 따라 하더니 네 사람 다 괴물이 되어 있었다.
‘내가 먼저 지칠 수는 없지.’
힘겨워 보이기는 해도 아직 싸울 만한 여력은 있어 보였다.
그렇기에 힐끔거리던 법무는 남몰래 어금니를 악물었다.
한참 동생뻘인 넷도 지치지 않았는데 그가 먼저 지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육십이 넘은 팔대호법도 멀쩡히 싸우고 있는 마당에 그가 먼저 퍼지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모두 동작 그만.”
곳곳에서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낭랑한 목소리가 전장을 갈랐다.
바로 반호진의 목소리였다.
왠지 모르게 귀에 콕 박히는 반호진의 모습에 일행들은 물론이고 살수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멈춰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살수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으으으…….”
사지가 절단된 암월교주의 모습에 살수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뒷목이 붙잡힌 채로 비참하게 제압당해 있는 모습이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현역으로 활동하지 않은 지 시간이 꽤 흘렀다고 하나 암월교주는 특급살수 출신이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한 무공비급을 통해 웬만한 특급살수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정도로 강해졌는데 그런 암월교주가 무력하게 붙잡혀 있자 특급살수들은 하나같이 마른침을 삼켰다.
“수장이 잡혔는데, 계속 싸울 사람? 뭐, 싸운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어차피 도구로 살아온 삶들일 테니.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면, 기회는 주지.”
반호진의 말에 하급살수들이 눈치를 봤다.
정신적으로 세뇌를 당한 건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특히 대외활동을 상대적으로 많이 하는 하급살수들은 일급살수들만큼 세뇌가 심하지 않았다.
스윽.
게다가 이중에 스스로 원해서 살수가 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는 가정형편 때문에, 누구는 납치를 당해서.
혹은 친척에게 팔려서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기에 진심으로 암월교에 충성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쩌저저적!
“죽고 싶다면, 그것도 말리지는 않아.”
고민하는 이들에게 반호진은 실력행사를 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죽여 주겠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손에서 뻗어 나간 수강이 마치 검강처럼 대지를 갈랐다.
일정한 폭과 두께로 말이다.
꿀꺽!
그 광경에 하급살수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내려놓았다.
항복하겠다는 무언의 의사였다.
반면에 일급살수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암월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세뇌된 충성심이 상당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항복하면, 살려 주시는 겁니까?”
“식칼이 사람을 죽였어. 그럼 누구 탓이지?”
“항복하겠습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라는 반호진의 대답에 상당수의 일급살수들이 하급살수들과 마찬가지로 항복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일행들 대부분이 지쳐 있기는 했으나 가장 위협적인 반호진이 멀쩡했다.
암월교주를 제압한 건 물론이고 그 전에 특급살수인 팔월과 오월을 손쉽게 처리했기에 고민은 짧았다.
-뭣들 하는 것이냐! 다시 공격하지 못……!
마치 전염되듯 병장기를 내던지며 항복하는 살수들의 모습에 아직 은신해 있던 특급살수 중 한 명이 전음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전장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그의 뒤통수에 반호진이 지풍을 꽂아 넣어서였다.
뒤통수에 작렬한 지풍이 이마를 뚫고 나오자 특급살수는 절명해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새끼들이 있네. 내가 못 찾아낼 것 같아?”
피피피핑!
지금까지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특급살수들을 향해 반호진이 맨손인 왼손가락을 튕겼다.
숨어 있는 특급살수들을 찾지 못해서 가만히 놔둔 게 아니었다.
그저 일일이 지풍을 날리기 귀찮아서 가만히 내버려 둔 것뿐이었다.
한데 그걸 특급살수들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쿠웅! 쿠쿠쿠쿵!
그래서 반호진은 직접 느끼게 해 주었다.
물론 그 결과는 즉사였다.
하나같이 머리에 관통상을 당한 특급살수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잠깐만요! 저는 항복하겠습니다! 항복이요!”
근데 전부 다 죽은 건 아니었다.
동료들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는 이들도 있었다.
투항하는 일급살수들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특급살수들이 무릎을 꿇으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싸울 의지와 무기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저, 저 썩을 것들……!”
그 모습에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암월교주가 이를 갈았다.
고통은 여전했으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는 제법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분노했다.
그를 구하려고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아니 능력이 안 되면 인질이라도 잡아서 거래를 할 생각은 안 하고 대뜸 항복부터 하자 암월교주는 가슴이 답답했다.
푹푹푹푹!
한편 암월교주가 그러거나 말거나 법무는 팔대호법과 함께 투항한 살수들을 일일이 점혈했다.
입안에 독침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기에 아혈도 같이 점혈해서 최악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런 아홉 명의 모습에 일행들도 뒤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고생했다.”
“이 정도 가지고 고생은 무슨. 정작 핵심전력은 너와 팔대호법께서 상대했는데.”
“우선 치료부터 하고 있어.”
“괜찮아. 이 정도쯤은 침 바르면 나아.”
“헛소리하지 말고.”
선우방이 짐짓 강한 척을 했지만 반호진은 코웃음을 쳤다.
겉모습도 만신창이였으나 체내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해독제와 피독주가 만능은 아니었고, 과도하게 진기를 사용했기에 내상도 입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지금은 휴식과 치료가 필요했다.
“정말 괜찮아. 이따가 일 끝내고 다 같이 쉬면 돼.”
“맞습니다. 이 또한 다 경험이잖아요.”
“뭐만 하면 그 말을 갖다 붙이는 것 같다?”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드는 서조운을 반호진이 근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서조운이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넘쳐 나는 공력을 믿고 막 날뛰다가 가장 먼저 진기가 바닥난 게 서조운이었다.
녹림십팔채와의 전쟁을 경험했다고 하나 무인과 싸우는 것과 살수들을 상대하는 건 완전히 달랐고, 그 결과 서조운은 예상과 달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우선 금창약부터 발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함께 바르죠.”
반호진의 눈치를 살피며 서조운이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냈다.
소림사에서 제조한 특제 금창약이었다.
그리고 그걸 선우방과 정이륭, 모용척도 조용히 자신들의 상처 부위에 발랐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사형.”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소림의 제자를 노렸다면 응당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 다만 포로가 생각보다 많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호연 공자의 무사들이 근처에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면 바로 올 겁니다.”
“뒷정리는 그들에게 맡기면 되겠구나.”
법무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싸운 만큼 그 역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일행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버티고 있었으나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아무 곳에나 눕고 싶었다.
“호법님들과 좀 쉬고 계세요.”
“넌 뭐 하게? 심문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법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는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암월교주를 쳐다봤다.
사지가 잘리기는 했으나 늦지 않게 지혈을 했기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즉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곳이 암월교의 본거지 아닙니까. 금 공자의 무사들이 오기 전에 좀 뒤져 보려고요. 분명 일 공자에 대한 자료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겁니다. 살수문파이니만큼 계약서는 따로 없겠지만 나름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쉬었다가 해도 되지 않아? 불침번처럼 순서를 정해서 쉬면 되잖아. 금가장의 무사들은 좀 이따 호출하면 되고.”
“여기 어딘가에 암월교가 살수로 키우려고 하는 아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 아이들도 구해야죠.”
“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법무가 눈을 크게 떴다.
더불어 자신이 너무 스스로만 생각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양성소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찾아볼 생각입니다. 이자에게도 고민할 시간은 줘야 하니까요.”
“증거를 찾으면 솔직히 더 이상 필요 없잖아? 그냥 짐이지.”
부르르르.
무심하기에 더욱 섬뜩하게 들리는 법무의 한마디에 암월교주가 몸을 떨었다.
자신의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만 암월교주도 한 가지는 고를 수 있었다.
편히 죽을 건지, 아니면 끔찍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을 건지 말이다.
“그래도 쉬운 길이 있다면 기다릴 가치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좋아. 나도 도와주마.”
“안 그러셔도 괜찮습니다만.”
“아냐.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지.”
“우리도 같은 생각이다.”
두 사람의 곁으로 팔대호법이 다가왔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용케 둘의 대화를 듣고 다가온 것이었다.
승복의 곳곳이 찢어지거나 갈라지고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상태는 다른 일행들에 비해 양호했다.
“쉬고 계셔도 괜찮습니다만.”
“다 함께하면 빨리 끝나지 않겠느냐.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살수문파의 본거지에 직접 와 본 건 처음이니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고.”
암월교가 예비 살수들로 키우고 있을 아이들이 걱정된다는 듯이 노승들이 입을 열었다.
그 진지한 눈빛에 반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많은 기척들이 느껴지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잔챙이들은 제가 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