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96화 (96/468)

제 33장. 제일 재미난 구경은. -02

반호진의 시선이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지도로 향했다.

세밀하지 않은 지도였으나 지역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의 시선은 묘강과 붙어 있는 운남성을 지나 서장에 닿았다.

구천문 하나라면 사천당가 연합이 우세하나 묘강에서 서장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했다.

“두 곳이 합치면 필패.”

사천당가에 암제와 독왕이 있다고 하나 천하사패의 패주 두 명이 상대라면 제아무리 사천당가라도 힘들었다.

청성파와 아미파가 합세해도 필패였다.

전체적인 전력은 엇비슷할지 모르나 문제는 고수들의 질이었다.

절대고수 앞에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사실은 이쪽을 자세히 파 보고 싶은데.”

툭. 툭. 툭.

반호진이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현재로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정보조직이 없었기에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개방이나 금가장에 부탁하기에도 애매했고.

“일단은 구천문을 드러낸 것에 만족해야 하나.”

서로 준비가 안 된 상태이지만 그래도 지난 생과 비교하면 지금이 나았다.

천하사패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구천문 하나 상대하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싸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게 제일 좋지.”

지난 생에서 반호진은 너무나 많이 고생했다.

모든 걸 활활 불태우며 중원무림을 위해 희생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한발 물러나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난 자격이 있지. 암.”

부와 명예도, 여자도 없이 오직 중원무림의 평화만 위해서 온몸을 바친 게 그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목숨까지 바쳤으니 소림사의 제자로서 할 건 다 한 셈이었다.

“거기다 안배까지 착착 하고 있으니. 나만큼 중원무림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도 없지.”

반호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네 사람은 향후 있을 전쟁에서 정말 큰 활약을 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이번에는 방천문도 전쟁 초반에 합류할 테니 피해를 확실히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두 분은 상관세가를 걱정하는 듯한데, 글쎄.”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관세가의 전력은 분명 만만치 않았다.

괜히 중원의 명문세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관세가는 반호진의 안중에도 없었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막말로 반호진이 진짜 힘을 드러낸다면 상관세가 정도는 혼자서 쓸어버릴 수 있었다.

다만 여러 가지 상황상 지금은 그럴 수가 없을 뿐이었다.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면 그리했겠으나 영악하게도 상관세가는 증거를 아직 잘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을지, 아니면 자멸할지 모르지만 방해가 된다면 치워 버리는 게 맞겠지.”

담현과 법무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상관세가를 지켜볼 것이었다.

그러니 반호진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생각이었다.

전생과 달리 지금은 그가 쓸 수 있는 패가 제법 있었다.

“일단은 싸움 구경 좀 하고 있어야지.”

그를 불러내 놓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으나 반호진은 엄연히 사천당가의 편이었다.

또한 사천당가의 저력을 믿고 있기도 했고.

그래서 반호진은 진심으로 사천당가의 승리를 기원했다.

거대한 세력 네 곳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셋이 훨씬 나았다.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난희주가 옷깃을 여미었다.

그러나 추운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난희주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또다시 소림사를 방문해서였다.

“기분이 좋아 보여요.”

“그럴 수밖에. 또 소림사를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거든. 그것도 이번에는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서 들어가는 거잖아.”

“사실 저도 신기해요.”

난희주의 심복이자 호위무사이기도 한 여인 역시 양 볼이 붉어져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소림사에 들어가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님에도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언젠가는 또 방문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기에 호위무사의 발걸음은 난희주와 마찬가지로 가벼웠다.

“이게 다 사람을 잘 만나서야.”

“맞아요. 정말 좋은 인연 같아요. 만약 아가씨께서 그때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이런 인연을 맺지는 못했겠죠?”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잖아.”

“지금의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은 격언 같은데요?”

수신호위이자 친구이며, 언니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난 아직 포기 안 했으니까. 사부님도 마찬가지시고.”

“어, 음.”

여인이 말을 아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그 표정은.”

“아니에요.”

“치잇! 나도 힘들다는 건 알고 있어.”

“어? 반 공자님께서 나와 계시는데요?”

“정말?”

시기적절하게 여인이 말을 돌렸다.

그러나 헛소리는 아니었다.

정말 반호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소림사의 앞에 나와 있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흔쾌히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무작정 반 공자님께 찾아간 적도 있는데요. 오히려 저는 다시 소림사에 와서 좋은 걸요? 제가 가 보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요.”

“흐음. 그럼 좀 아쉽겠는데요. 소림사 내부를 가로지르지 않을 거라서요.”

“다른 길로 가나요?”

“예. 제가 좀 번잡한 걸 싫어해서요. 근데 길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반호진의 말에 난희주가 눈을 빛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소수만 사용하는 길인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말은 그 소수 중에 자신이 속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길이 별거인가요? 사람들이 자주 다니면 길이 되는 거죠.”

“맞습니다.”

“근데 저희가 가도 되나요?”

난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림사라고 하나 그녀는 엄연히 하오문의 소문주였다.

그렇다 보니 다른 이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녀 본인이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밀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샛길 같은 건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았으니까.

“이 정도 가지고 무너지거나 위험할 정도였으면 소림사는 태산북두라는 말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난희주가 무엇을 저어하는지 알기에 반호진은 걱정할 거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 이 정도 샛길은 기밀에 속하지도 않았다.

숭산은 엄청나게 넓었고, 정문을 통하지 않고서 소림사에 들어갈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성공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다 왔습니다.”

“모두 여전하시네요.”

오랜만에 반호진의 거처를 재방문한 난희주가 옅게 웃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살벌한 대련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게다가 사천당가를 다녀와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장 속도가 빨라서 그런지 다들 초식이 예리해지고 매서워졌다.

“분명한 목표가 있으니까요.”

“반 공자님을 뛰어넘는 거요?”

“그렇죠.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도전하는 데 의의가 있지요.”

“들어가시죠.”

반호진이 그리 말하며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난희주는 곧바로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이들과 일일이 인사한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반호진이 따라 주는 차를 난희주는 두 손으로 받았다.

고급 품종의 차와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지만 숭산에서 마시는 차는 특유의 풍미가 있었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풍미가.

그래서 난희주는 이곳에서 마시는 차가 특별해서 좋았다.

“별일 없으시죠?”

“반 공자님 덕분에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금가장에서 얻은 무공은 문제없습니까? 제가 처음으로 판 물건이라 그런지 가끔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직까지는 별문제 없어요.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무공 간의 궁합이 좋아서 저는 물론이고 사부님도 많이 놀랐어요.”

“다행이네요.”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검수하기는 했으나 애초에 무공이라는 게 완벽한 건 없었다.

상승절학이건 하급무공이건 말이다.

근데 이율배반적이게도 불완전하기에 발전의 여지가 있었다.

천하제일무공, 고금제일절학이라는 게 없는 이유가 익히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무공 자체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어서였다.

“설사 문제가 생기더라도 반 공자님을 탓할 마음은 없어요. 저도 알거든요.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무공은 없다는 것을요.”

“그래도 저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으니까요.”

“사천당가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큰일이 있긴 했죠. 저하고는 크게 연관이 없지만.”

“흐음. 그런가요?”

난희주가 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뭇 달라서였다.

“제가 구천문과 싸우는 건 아니니까요.”

“아. 그렇긴 하죠.”

이번에는 반호진이 심유한 눈빛으로 난희주를 주시했다.

혹시라도 천하사패의 마수가 뻗었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수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음먹고 속인다면 제아무리 반호진이라 하더라도 알아낼 수가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보기에는 아닌 듯했다.

“구천문 쪽에서는 제가 죽일 놈이겠지만 여기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겁니다.”

“우선은 사천당가부터 해결해야 하니까요. 근데 저도 많이 놀랐어요. 구천문이 그렇게 깊게 스며들어 있을 줄은. 사부님께서 늘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게 바로 이해가 되더라고요.”

“마음먹고 숨으면 찾기가 힘들죠. 한 명의 도둑을 열 명이서도 못 잡으니까요.”

“맞아요. 이번에 그걸 정말 느꼈어요. 근데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요. 전 마음의 준비가 끝났어요.”

“하하하.”

진짜라는 듯이 양손을 맞잡고 심호흡까지 하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했다.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똑똑하니 확실히 대화하기가 편했다.

“반 공자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저를 초대할 리가 없으니까요. 물론, 그랬다고 하더라도 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겠지만요.”

난희주가 특유의 큰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두 볼에 홍조까지 띠면서 말이다.

누가 봐도 남자를 홀리려는 모습이었으나 반호진의 부동심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소문주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하오문의 소문주에게 말씀이시죠?”

“예. 상관세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하게 어떤 것들요?”

“지저분하고 알려지면 안 될 것들요. 거기에 상관세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곳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싸움이라는 게 꼭 본인이 나서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는 말처럼 다른 이를 이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또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건 부탁이 아닌데요? 애초에 반 공자님께서 상관세가와 좋지 않은 관계가 된 이유가 저 때문이니까요.”

상관적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녀를 도와준 게 반호진이었다.

그렇기에 엄밀히 따지면 이건 부탁의 축에도 들 수 없었다.

“하오문에서 따로 조사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알아보고 있어요. 주로 구린 일들에 대해서 파고 있는 중인데, 의외로 많더라고요. 그런데 치명적인 건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체면을 구기는 일들은 많은데, 이 정도로는 상관세가가 흔들리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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