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장. 이독제독(以毒制毒). -05
당서곤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의 등장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기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이 공자님……!”
그런 그를 향해 청년이 애절하게 불렀다.
오만가지 심사가 가득 담겨 있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러나 당서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족이기는 하나 결국 중요한 건 본인의 목숨이었다.
“이 녀석을 보았으니 따로 설명은 필요 없겠지?”
꿀꺽!
당비의 한마디가 당서곤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들려왔다.
하나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건,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그만해라.”
“아, 아버지!”
말을 도중에 끊는 당우혁을 보며 당서곤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당우혁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왜 그랬느냐?”
“잘못했습니다!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당우혁과 눈을 마주한 당서곤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당서곤은 엎드렸다.
오체투지 하듯 차가운 뇌옥 바닥에 몸을 납작 붙였다.
“왜 그랬느냐?”
그러나 당서곤의 오체투지에도 당우혁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무미건조하게 다시 한번 더 물을 뿐이었다.
“그, 그게…….”
“이미 이유는 들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묻는 건, 너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다.”
“대답하면, 살려 주시는 겁니까?”
“역시 배신자라고 해야 하나. 본가의 철칙을 잊었느냐.”
부르르르!
당서곤이 몸을 떨었다.
지금의 한마디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현재 자신의 처지가 아들이 아니라 가문을 배신한 자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사천당가는 배신자를 절대 살려 두지 않는 가문이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또한 너의 결정일 테니.”
“기, 기회를 주십시오!”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당서곤이 소리쳤다.
이대로 죽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니, 죽더라도 이렇게 수치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예외는 없다.”
“아, 아버지! 할아버지!”
단호한 당우혁의 한마디에 당서곤이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당서곤의 애걸복걸에도 두 부자의 표정은 똑같았다.
한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당서곤을 응시하기만 했다.
주르륵.
그와 동시에 끌려왔던 청년의 수족이 녹아내렸다.
한 줌 혈수가 되어 차가운 뇌옥 바닥을 적셨다.
청년 역시 독공을 익힌 무인이었으나 격이 다른 수준에는 범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구나. 알겠다.”
“잠깐만요! 구천문과 싸울 때 제가 가장 앞장서겠습니다!”
“널 뭘 믿고?”
조금도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당우혁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청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독공으로 녹여 버리려는 것이었다.
“젠장! 제기라알!”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며 당서곤이 소리쳤다.
악이라도 지르지 않으면 가슴속의 울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당서곤의 괴성은 얼마 가지 않았다.
주르르륵.
당대 독왕이라 불리는 고수가 당우혁이었다.
그렇기에 당서곤 역시 청년과 다름없이 순식간에 독수로 화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 책임만 있는 건 아니다. 내 책임 또한 있다.”
단둘만 남은 지하뇌옥에 당비의 한탄 섞인 한마디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사천당가를 위해, 천하제일가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며느리를 받아들인 게 당비였다.
어쩌면 그 욕심 때문에 지금의 결과가 나온 것일지도 몰랐기에 당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지. 물론 그 전에 내부 단속부터 확실하게 해야겠지만.”
“그 후에 죄를 물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당서곤은 죽었지만 진짜 처리해야 하는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렇기에 당우혁은 싸늘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은원을 절대 잊지 않는 사천당가이니만큼 지금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 뒤를 씁쓸한 표정의 당비가 뒤따랐다.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각에 반호진은 숙소를 나섰다.
당우혁의 호출에 가주전으로 향했던 것이다.
길을 안내해 주는 시비를 따라 걸어가며 반호진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자신을 이 시간에 불러낼 이유가 있나 싶어서였다.
“다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시비임에도 정중하게 대해 주는 반호진을 향해 시비가 생긋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맡은바 소임을 다했기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시비를 일별한 반호진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가주전을 지그시 한 번 보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앉게.”
“아, 예.”
그런데 가주전에는 당우혁만 있지 않았다.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자리에 당비가 앉아 있자 반호진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졌다.
“갑자기 불러 의아한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를 만날 시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훗.”
당비의 옆자리에 앉던 당우혁이 실소를 흘렸다.
그를 앞에 두고 이렇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후기지수는 반호진이 처음이었다.
자식인 당서건조차 그를 어려워하건만 반호진은 정반대였다.
한데 그게 당우혁은 싫지 않았다.
“본가의 철칙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강호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
반호진의 반문에 당비가 씨익 웃었다.
아주 흡족하다는 미소였다.
더불어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비록 천하제일가라 불리지는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남궁세가보다 더 유명한 게 사천당가였다.
“배신자를 어떻게 했는지 묻지 않는군.”
“제가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어째서지?”
다시 당우혁이 물었다.
살짝 호기심이 떠오른 눈빛으로 말이다.
“사천당가의 일이지 않습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하셨겠지요.”
“외부인이기는 하지. 그래도 궁금하지 않나?”
“별로요.”
단칼에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당우혁은 다시 한번 실소를 흘렸다.
세상일에 무관심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맞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자네와도 관련되어 있지 않나?”
“남의 집안일에 깊게 관여해서 좋을 건 없지요.”
“그게 현명하기는 하지. 그래도 자네에게는 말해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네.”
“다행히 저를 탓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당연한 것 아닌가. 오히려 미연에 최악의 사태를 막아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자네를 부른 것도 그것 때문이고.”
사천당가가 아무리 배신자, 변절자에 냉혹한 가문이라고 하나 그래도 혈육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그런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아주 조금 우려했었는데 다행히 잘 풀린 듯했다.
“그렇군요.”
“참고로 배신자는 본가의 방식대로 처벌했네. 구천문은 내부 정리를 한 다음에 죄를 물을 것이고.”
“혹시라도 제가 이 공자에 대해 말할 걸 염려하시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의 집안일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네. 어차피 내부적으로 정리를 하면 배신자에 대한 것은 외부에 알려질 수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나는 대대적으로 밝힐 생각이네.”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보면 치부일 수도 있으나 크게 본다면 이 선택이 가장 상책이었다.
감춘다고 해서 당서곤에 대한 것을 완벽하게 숨길 수도 없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시원하게 밝히고서 구천문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도 외부인이 말하는 것과, 가주님이 먼저 밝히는 건 다른 문제니 한동안은 조용히 있겠습니다.”
반호진의 대답에 당우혁이 눈을 빛냈다.
왜 그러냐고 묻지 않는다는 건 그의 의중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도 범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나 알면 알수록 마음에 들었다.
오중건이 괜히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게 아니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배신자와 구천문에 대한 내용은 이쯤하고, 보상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가지. 자네도 알겠지만 본가는 은원을 절대 잊지 않는 가문이네. 그러니 말해 보게. 혹 본가에 바라는 게 있는가?”
“없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반호진이 대답했다.
사천당가의 성향에 대해서는 반호진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대화의 방향이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것도 짐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사천당가에서 받을 만한 것은 없었다.
정확하게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나 할까.
구천문과 치고받는 것만으로도 반호진은 만족스러웠다.
“정말로?”
혹시나 예의상 거절하는 건 아닐까 싶어 당우혁이 다시 물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고 하나 반호진은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인 만큼 눈치를 볼 수도 있었다.
“없습니다.”
그러나 반호진은 대답은 동일했다.
진짜로 바라는 게 없었기에 다른 말을 할 게 없었다.
“헛헛헛!”
그 모습에 당비가 실소를 흘렸다.
얼굴이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눈치를 보거나 빈말로 거절하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당비는 헛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촉박했다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네. 내 입장에서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라.”
“그럼 이렇게 하지.”
당비가 당우혁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래서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내 손녀는 어떤가?”
“싫습니다.”
“허!”
이번 역시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당우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곧장 거절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것도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싫다는 직설적인 표현에 당우혁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반호진을 노려봤다.
“허어. 서린이가 말인가? 어째서?”
그리고 이해가 안 가는 건 말을 꺼낸 당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녀라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서린에게는 혼담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명문세가와 대문파에서 말이다.
한데 그런 당서린을 단칼에 거절하자 당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제 취향이 아닙니다.”
“허참.”
당비에 이어 당우혁도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천지에서 당서린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반호진은 거기에서 한술 더 떴다.
“바라는 게 하나 생겼습니다. 앞으로 당 소저에 대한 내용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당우혁과 당비의 입이 막혔다.
보상으로 이런 걸 원할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당우혁이 한 말이 있기에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두 부자는 순식간에 가주전을 나서는 반호진을 붙잡지 못했다.
“당돌하다고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왜? 나는 자신감 넘쳐서 더 좋은데. 기가 약한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리고 막말로 저 정도는 되어야 서린이를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당우혁과 달리 당비는 낄낄 웃었다.
조부이지만 그는 손녀의 앙칼진 성격에 대해 잘 알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사천당가의 여인들 대부분이 드센 편이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차라리 저런 성격이 당서린의 짝으로 나았다.
“아버지께서는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신 것 같습니다.”
“그럼 넌 아니냐? 막말로 저만한 아이가 또 있어?”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