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장. 이독제독(以毒制毒). -04
저벅저벅.
무뚝뚝하게 대답한 당우혁은 막내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오중건이 말해 주긴 했으나 그것만 믿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의 결정에 사천당가의 모든 식솔들의 미래가 걸려 있는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구천문의 독공이로군. 표식은 일부러 없는 자들을 보낸 거겠지.”
반호진이 옷을 벗겨 놓았기에 당우혁이 따로 할 건 없었다.
대신 냄새를 맡거나 몸 곳곳을 만져 봤다.
그리고 사내가 지니고 있던 개인 물품들을 확인했다.
독왕으로 불리는 이답게 당우혁은 거침없이 병들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소지하고 있는 독도 묘강에서 나는 독물들로 만든 것이고.”
“가주님께서 그리 판단하셨다면 확실하겠네요.”
“후개도 확신하지 않았나.”
“독공에 한해서는 저도 문외한이지 않습니까. 하하.”
당우혁에게서 흘러나오는 질식할 듯한 기세에 오중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우혁의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 공자.”
“예.”
“어디까지 들었나?”
“전부 다 들었습니다.”
“역시 그런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당우혁이 두 눈을 감았다.
어떻게 보면 가문의 치부를 들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가문의 위기를 막아 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천당가는 은원을 절대 잊지 않는 가문이었다.
“이곳에서 들은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잊을 수는 없지만, 발설하지 않을 수는 있으니까요.”
“고맙네.”
“별말씀을.”
“일단 본가로 되돌아가지.”
사천당가는 원한도 잊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은혜 역시 절대 잊지 않았다.
그러나 무릇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었기에 당우혁은 기절해 있는 막내아들의 뺨을 때렸다.
짜아악!
시원스러운 타격음과 함께 당서곤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눈앞에 있는 당우혁을 보고는 기겁했다.
“아, 아버지?”
“입 다물어라. 설명은 뇌옥에서 들을 테니까.”
“예에?!”
당서곤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가주전도, 그의 방도 아니고 감옥을 거론하자 깜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당우혁은 그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좌수를 흔들었다.
주르륵.
당우혁의 손짓에 은신해서 사주경계를 서고 있던 하수인 네 명의 육신이 한 줌 혈수로 화했다.
독으로 화골산처럼 아예 녹여 버린 것이었다.
인간의 형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핏물이 된 네 명은 이내 핏자국만 남기고 지면에 스며들었다.
히끅!
그 모습에 당서곤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장년인의 모습이 마치 그의 미래처럼 느껴져서였다.
후우웅!
그러나 당서곤이 겁을 먹거나 말거나 당우혁은 재차 손을 휘저었다.
기절해 있는 사내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려서는 그대로 당긴 후 어깨에 들쳐 멨다.
독공을 익힌 독인이기에 반호진이나 오중건에게 맡길 수 없어 그가 직접 들쳐 멘 것이었다.
“가세나.”
“예.”
그렇다고 당서곤에게 사내를 맡기는 것도 어불성설이기에 당우혁은 사내를 짊어지고서 땅을 박찼다.
그 뒤로 반호진과 오중건이 따라 이동했다.
“도망칠 생각이라면, 해라.”
“가, 가겠습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당우혁의 목소리에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당서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명백한 증거가 있기에 잡아떼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당우혁이 순순히 믿을 가능성도 희박했고.
“후우!”
하나 그렇다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만약 지금 몸을 돌린다면 당우혁은 그를 완벽한 배신자로 여기고 독수를 날릴 것이었다.
부친이지만 당우혁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사천당가로 돌아온 반호진은 곧장 숙소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그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기에 오중건과 함께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쁘지 않아.’
알고 있던 것보다 구천문의 준동이 빨랐지만 반호진이 생각하기에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일단 내부 분열을 막았고, 현재 사천당가의 전력을 생각하면 십 년 후보다 지금이 더 강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만큼 구천문은 준비가 덜 된 상태일 게 분명했다.
“오셨어요, 형님?”
“대련하고 있었네?”
“예!”
앞마당에 도착하자 선선한 날씨임에도 온몸이 땀범벅인 서조운이 달려왔다.
마치 반호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아주 잘하고 있어.”
“언제까지 뒤꽁무니만 쫓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목표는 크게 잡아야지. 야망이 없으면 사내가 아니라는 말도 있으니.”
“근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그런 건 아니고. 아, 어쩌면 내일 떠날 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어.”
서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천당가에 오래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라서였다.
“내일요?”
“왜? 인기를 좀 더 느끼고 싶어?”
“헤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첫날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부담스러워요.”
“허어. 그 이치를 벌써 깨닫다니. 사천당가까지 온 게 헛걸음은 아니구나.”
반호진이 과장되게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봐도 놀리는 모습이었으나 서조운은 민망한 듯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관심을 받는다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더라고요. 인간관계라는 게 딱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마음에 드는 여인은 있었을 거 아냐?”
반호진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조운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대이며 사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나이였다.
“있기는 있는데, 제가 아직 부족한 거 같아요.”
“너에게 관심이 없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걸어온 길을 나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서조운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반호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역시 남자였고, 사춘기 시절이 있었다.
여자와 교제해 본 적은 없어도 짝사랑은 해 봤었다.
“형님은 모르실 줄 알았는데.”
“나는 남자 아니냐?”
“동자공을 익혔다는 소문도 돌던데요?”
“허.”
반호진이 콧김을 내뿜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실제로 소림사에 동자공이 있기도 했고.
“아, 방에 들어가시면 좀 놀라실 수도 있어요.”
“왜?”
“직접 보면 아실 거예요.”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혼담은 많이 들어왔어도 연서를 받는 건 처음일 터였다.
그러니 천하의 반호진이라도 놀랄 게 분명했다.
“그래.”
잔뜩 기대한 표정의 서조운과 달리 반호진은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방문 앞에 도착한 반호진이 평소와 다름없이 문을 활짝 열었다.
“놀랐죠?”
“연서네.”
“어라?”
뒤따라온 서조운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가 예상한 반응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놀라기는커녕 거치적거린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반호진의 모습에 서조운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다 갖다 버려.”
“안 읽어 보세요?”
“어차피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마 자기가 직접 쓴 건 별로 없을걸? 그러니 버려도 돼. 아니면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든가.”
“……형님 말도 일리가 있는데요?”
멍한 얼굴로 대꾸하는 서조운을 일별한 반호진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북쪽 방향의 창문을 말이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사천당가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지하감옥이 있었다.
‘지금쯤 심문하고 있겠네.’
반호진은 헤어질 때의 당우혁을 떠올랐다.
아마 둘 다 몸 성히 나오지는 못할 터였다.
세 자식의 아버지 이전에 당우혁은 사천당가라는 거대한 세력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배신자는 일벌백계해야 했다.
뚝. 뚝. 뚝.
야명주 하나 없는 지하뇌옥의 석실 중 한 곳에서 당서곤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얘기는 몇 번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지하뇌옥에 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서곤은 모든 게 낯설고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지하뇌옥에 갇혀 있는 게 말이다.
“끄으으윽! 끄아아악!”
게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비명 소리가 그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모르는 이라고 해도 오금이 저리는데 지금 괴성을 지르는 건 당서곤이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당서곤은 처절한 신음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을 떨었다.
저벅저벅.
저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명을 지르던 이가 어느 순간 괴성을 뚝 멈췄다.
그리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그 소리가 당서곤에게는 저승사자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당서곤.”
“아, 아버지!”
간수도 없이 홀로 철창 앞에 서 있는 당우혁의 등장에 당서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렸다.
아무리 실수를 했다지만 그는 당대 가주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렇기에 당서곤은 아주 조금 기대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저, 저는 결단코 배신을 한 게 아닙니다! 모든 건 모함이고, 함정입니다! 저는 그저 찾아간 것뿐입니다!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연락이 왔기에 그걸 알아내고자……!”
“혼자?”
“저,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서곤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들을 빠르게 내뱉었다.
어차피 관제묘에 있었던 이는 그와 구천문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셋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다 죽었기에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셋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정신을 차렸을 때 반호진과 오중건이 있었다는 점이었지만 어차피 둘은 외인이었다.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고, 피는 물보다 진했다.
그를 제압한 이보다, 구천문도보다는 아들인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구천문도가 했던 말과는 다른데.”
“저를 음해하는 것입니다! 구천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장애물인 사천당가가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를 이용해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속셈입니다!”
미리 수십 번도 더 생각한 것이었기에 당서곤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믿었다.
거짓을 믿지 않으면 티가 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당서곤은 스스로 만들어 낸 거짓을 진짜라고 믿었다.
스윽.
하지만 온몸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는 당서곤의 모습에도 당우혁의 표정은 냉랭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겉으로 보이는 표정이 아니라 속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당서곤은 심장이 덜컹했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했다.
“내부 분열?”
“그, 그렇습니다! 저를 표적으로 삼아서……!”
“거기까지 해라.”
쿠웅!
고저가 없는 무심한 당우혁의 목소리에 당서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당우혁의 옆에 피투성이가 된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널브러졌다.
누군가가 청년을 집어 던진 것이었다.
한데 피투성이가 된 모습과 달리 얼굴은 제법 멀쩡한 청년을 본 당서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너는?!”
“이제 그만해라. 추하구나.”
“할아버지!”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
당비가 잔뜩 겁에 질려 꿈틀대는 청년의 옆으로 걸어왔다.
그러나 눈빛이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따뜻하지는 않더라도 그를 손자로서 대우해 주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너무나 차가웠다.
“용케 할아버지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구나.”
“저,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