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장. 이독제독(以毒制毒). -03
“과거는 잊혀지지 않을 텐데?”
“중요한 건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이지 않겠습니까. 또 관계라는 게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요. 적어도 문주님께서는 그리 생각하십니다. 저희는 그저 원하는 재료들을 수급하고, 평화롭게 중원을 돌아다니고 싶을 뿐입니다. 과거의 혈채에 얽매이지 않고요.”
“그 말만 듣고는 믿기 힘들어.”
“당연합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처럼 저희가 반대 입장이었어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차근차근 관계를 밟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저희는 대공자보다는 이 공자님이 사천당가주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장남이라는 걸 빼면 이 공자님보다 나은 게 없지 않습니까?”
사내가 은근슬쩍 당서곤을 치켜세워 주었다.
그런데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것마냥 시원했다.
그래서 당서곤은 사내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크흠! 고맙군.”
“문주님께서 이 공자님을 정말 크게 믿고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문주님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시거든요. 앉아서 천 리를 보시는 분이시죠.”
“언제가 한 번 뵈었으면 좋겠군.”
“머지않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의견은 생각해 보지.”
당서곤은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묘안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나쁜 의견은 아니었다.
그리고 향후 그의 입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인재와 진짜 친구는 많아서 나쁠 게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사룡이 딱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르지.’
당서곤의 뇌리에 사천당가에서 머무는 내내 심드렁한 얼굴로 지냈던 반호진이 떠올랐다.
세간에는 거만하다는 말이 떠돌았지만 그가 직접 겪어 본 반호진은 거만하다기보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그럴 만한 실력도 가지고 있었고.
단 한 번도 실력을 선보인 적은 없으나 일행들로 인해 어느 정도일지는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그자가 나를 지지해 준다면.’
당서곤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부친과 조부가 반호진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누나인 당서린의 짝으로 말이다.
만약 두 사람이 맺어지고 반호진이 당서건이 아닌 그를 지지해 준다면 상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맺어진다고 한들 어차피 그자는 외부인이다. 가문을 가질 수 없어.’
대대로 사천당가는 아들이 가주직에 올랐다.
다른 무림세가의 경우 여인이 수장이 된 경우도 있었으나 사천당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주가 된다면 쫓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신 모양입니다.”
“나쁘지 않은 계책이라고나 할까.”
“혹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큰 자금은 힘들지만 어느 정도는 제 선에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알았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당서곤이 시종일관 하대했지만 사내는 눈썹 한 번 꿈틀거리지 않았다.
당서곤이 그를 만만하게 생각할수록,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간다고 여길수록 구천문에게는 이득이어서였다.
자기도 모른 채 수렁에 빠지고 있는 게 당서곤이었기에 사내는 속으로 잔뜩 비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물이 걸렸는데?’
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의 대어가 걸릴 줄은 몰랐기에 반호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반호진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운 좋게 비밀스러운 만남을 보게 되었으니 이걸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가급적이면 중원무림에 좋은 쪽으로 말이다.
‘알려 주는 건 하책이야. 아무리 내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나 나는 외부인이지. 결국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어. 게다가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고.’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최대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야 했기에 반호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왕 터질 거면 지금이 낫다.’
반호진의 머리가 맑아졌다.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수를 생각해 봤지만 최선은 딱 하나였다.
피피피핑!
반호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서남북의 방향에 각각 자리를 잡고 있던 하수인들에 지풍을 날린 것이었다.
이윽고 은밀하게 뿌려진 네 줄기 지풍이 정확히 숨어 있던 넷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당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서 기절한 것이었다.
푸푸푸푹!
그러나 반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답게 네 명이 혼절하며 쓰러지자 다시 한번 지풍을 날려 이번에는 마혈과 아혈을 점혈했다.
더불어 기막을 일으켜 네 명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도 차단했다.
피잉! 핑!
그다음은 관제묘 안에 있던 두 명이었다.
당서곤은 후기지수 중에서는 나름 방귀깨나 뀌는 인물이라고 하나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한 무인이었고, 사내는 겉보기와 달리 실력이 상당했으나 반호진의 지풍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둘은 먼저 기절한 네 명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제압당했다.
휘이익!
이번에도 꼼꼼하게 둘의 아혈과 마혈을 점혈한 반호진은 지붕을 박찼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개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헉헉헉!”
오늘도 어김없이 사천당가의 내원에서 포식을 하며 시간을 때우던 오중건은 반호진이 보냈다는 급전에 허겁지겁 이동했다.
단 한마디였으나 그 안에 담긴 세 글자가 그를 서두르게 만들어서였다.
그렇기에 오중건은 혼자서 전속력으로 반호진이 오라고 한 곳을 향해 뛰었다.
“오 대협.”
“헉헉!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산책을 하던 중이었는데,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있지 뭡니까. 품고 있는 기운도 생소하고. 일반적으로 만나는 낭인들과는 기질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떠나서 일단 몸을 숨기고서 돌아다니는 자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주친 김에 따라가 봤는데…….”
“으헉!”
반호진의 말을 들으며 사당 안에 들어가던 오중건이 경악성을 토해 냈다.
기절해 있는 두 명 중 한 명의 얼굴을 보고는 놀란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오중건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공자가 놀랍겠지만 진짜 중요한 건 앞에 있는 자입니다.”
“……중원인이 아니군요? 잠깐만. 킁킁킁!”
당서곤을 일별한 오중건이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기절해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서 냄새를 맡았다.
“조심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이런 쪽은 제가 전문가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절 찾으신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역시 독공을 익히고 있군요.”
사내의 품속을 조심스럽게 뒤지던 오중건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냄새로 짐작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놀라웠다.
게다가 사내는 평범한 독인이 아니었다.
중원인과는 다른 외모, 거기에 독공이 합쳐지면 답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제 짐작이 맞은 모양이군요.”
“허참. 이거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요. 근데 증거가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리고 이번 일은 제 선을 넘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반호진이 괜히 기절만 시킨 게 아니었다.
구천문의 제자가 사천성 성도에 나타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중요한 건 당서곤이라는 존재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당가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구천문도와 함께 있었기에 사태는 심각했다.
어째서 당서곤이 구천문도와 함께 있는지 모를 수가 없기에 오중건은 무거운 표정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반 소협은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까?”
“답은 이미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건 저나 오 대협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가주님께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오중건은 반호진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지금의 결정이 사천당가와 개방의 입장을 배려해 주었다는 것을 잘 알아서였다.
그렇기에 오중건은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무섭게 자리를 떴다.
사천당가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성도이기에 구천문의 독인이 더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오중건은 서둘렀다.
“좀 더 왔으면 좋겠는데.”
오중건은 만약의 사태를 걱정했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제대로 꼬리를 잡은 만큼 이왕이면 더 나타나 주었으면 했다.
이미 백독불침(百毒不侵)을 이루기도 했고.
그러나 절독들은 아직 위험했다.
“독은 위험하지만 죽지 않는다면 내성이 생기니까.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 최대한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기다리기 지루했기에 반호진은 사내의 품속을 뒤졌다.
이미 오중건이 한 차례 뒤지기는 했으나 따로 챙겨 간 것은 없었기에 반호진은 사내가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전부 다 밖에 꺼냈다.
옷도 속옷만 남겨 두고 전부 다 벗겼다.
“전부 다 허탕이네.”
사내에 이어 미리 제압해 두었던 하수인들의 옷도 모조리 벗겼지만 건질 만한 물건은 없었다.
처음부터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는지 사내 말고는 개인 물품이 일절 없었다.
입안도 살펴보고 싶었지만 독인은 체액도 독을 품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굳이 위험한 일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일단 이 공자가 엮여 있으니 구천문과 본격적으로 싸우겠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내의 발밑에 네 명의 중년인들을 나란히 눕혀 두고서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기감은 예민하게 사위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상한 이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연락이 갑자기 두절되는 경우에 대비해 따로 조치를 해 놓을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내심으로는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기도 했고.
구천문의 전력이 약해진다면 반호진에게는 무조건 이득이었다.
“이 꼴을 보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반호진의 시선이 기절해 있는 당서곤에게로 향했다.
사천당가는 독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철저한 보복이었다.
당한 게 있다면 반드시 그 이상 갚아 주는 게 사천당가였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사천당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옥까지 도망가더라도 사천당가는 추격했다.
“왔네.”
사천당가의 독심을 떠올리고 있을 때 멀리서 사나운 기세가 느껴졌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며 빠르게 달려오는 기세에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쿠웅!
잠시 후 묵직한 진동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바닥에 내려섰다.
바로 사천당가의 당대 가주이자 기절해 있는 당서곤의 부친인 당우혁이었다.
뒤이어 오중건이 눈썹을 휘달리며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자네가 발견했다고 들었네.”
“네. 우연히 수상한 이들을 뒤쫓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당우혁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눈빛에 기가 죽을 반호진이 아니었다.
“예. 오 대협에게 들었을지 모르겠는데, 산책 중이었습니다. 어르신이 어제 좀 압박을 주어서요.”
“허!”
당우혁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이 누구를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려서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우혁의 시선이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당서곤에게 향했다.
“기절만 한 겁니다. 다른 외상은 없습니다.”
당서곤에게 시선이 향하자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은 오중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당우혁이 오해할까 싶어서였다.
“나도 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