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장. 이독제독(以毒制毒). -02
저벅저벅.
밝고 활기찬 성도의 저잣거리, 골목골목을 반호진은 정처 없이 걸었다.
구경도 하고 생각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지만 반호진이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천당가의 일은 사천당가만이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응?”
그럼에도 고민을 하는 건 최악의 상황만은 막고 싶어서였다.
앞으로의 전쟁에 있어 사천당가가 맡아 줘야 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
어쩌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기에 반호진으로서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빈민촌으로 향하는 골목의 다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에서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이거 봐라?”
대충 휘갈겨 쓴 것도 아닌, 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벽을 반호진은 슬쩍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낙서 같은 저 문양이 암호문임을 알아서였다.
똑같이 따라 그릴 수는 없지만 알아보는 건 가능했다.
“사천성 성도까지 왔단 말이지?”
다시 성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방대로로 크게 돌아서 가며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개방이 파악한 정보와는 전혀 다른 결과에 헛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마음먹고 은밀하게 움직이면 제아무리 개방이라도 모든 걸 알아낼 수는 없었다.
‘묘강인이라면 단박에 파악하겠지만 철혈성처럼 간자를 포섭한다면 알아낼 방법이 없지.’
개방에서 괜히 철혈성의 간자들을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암살을 하거나 세력을 키운다면 수상함을 느끼겠지만 단순히 정보 수집만 목적으로 활동한다면 개방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멍청하게 흔적을 질질 흘리고 다녀 꼬리를 잡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흔적을 남겨 놓았네?’
반호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물론 나름 머리를 굴리기는 했다.
괜히 빈민촌에 가까운 게 아니라는 듯이 사방에 온갖 낙서들이 어지럽게 그려지거나 새겨져 있었으니까.
다만 안타깝게도 반호진이 구천문의 암호문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흐음. 그렇다면 아직 연합은 아니라는 건가? 이건 너무 낙관적인 바람이려나? 개방이 뒷조사를 잘해서 철혈성에 들키지 않은 걸 수도 있고.’
아무리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개방은 개방이었다.
더구나 중원은 개방에 있어 안방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철혈성이 아무리 조심하고 은밀히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단정 짓기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휘이익!
혹시나 근처에 다른 암호문이 있을까 싶어 돌아다니는데 반호진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는 하나 벌써부터 피풍의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인영이었다.
그런데 뭔가 구린 게 있는지 커다란 피풍의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빠르게 멀어지는 인영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비밀스럽게 어딘가로 향하는 이 공자라. 이거 냄새가 나는데?”
피풍의로 모습을 가릴 수는 있어도 체격과 걸음걸이, 그리고 기질은 숨길 수 없었다.
물론 숙련된 첩자나 암살자라면 외모와 체격, 걸음걸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하나 기질은 달랐다.
본인만의 고유한 기질은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무공을 익혀도 기질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반호진은 인영을 꽤나 예의 주시했었기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영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기운을.
툭.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은 사천성답게 성도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빈민촌을 지나 다 허물어져 가는 관제묘로 들어가는 인영을 따라 반호진도 기척을 감추고서 사당의 천장에 내려섰다.
하수인으로 보이는 네 명이 숨어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으나 반호진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따로 은신술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실력은 네 명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이것 봐라?’
인영을 따라 낡고 작은 사당의 지붕에 내려선 반호진의 눈이 빛났다.
네 명의 하수인들에게서 독특한 냄새가 흘러나와서였다.
미세하지만 한 번 맡으면 잊을 수가 없는 특유의 냄새에 반호진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냄새라고 표현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냄새라기보다는 독공 특유의 존재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일찍 왔군.”
“이 공자님을 만나는데 소인이 당연히 먼저 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곳을 잘도 찾았군.”
피풍의를 벗으며 당서곤이 관제묘 내부를 찬찬히 둘러봤다.
상대방이 알아서 확인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사천성은 넓지 않습니까. 찾아보면 좋은 장소들은 많습니다.”
“근데 왜 오늘 날 부른 거지? 아직 고희연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철두철미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너희들은 너무 눈에 띄어.”
“밤에 움직이면 상관없습니다. 또 중원인이라고 해서 다 체격이 큰 건 아니니까요.”
당서곤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훤히 드러낸 사내가 히죽 웃었다.
햇볕에 새까맣게 탄 얼굴 때문인지 이빨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본론.”
“아이고, 이거 제가 눈치 없이 말이 많았네요. 다름이 아니라 이 공자님께 여쭈어볼 게 있어서요.”
“상부에서?”
“그렇습죠. 제가 아직 이 공자님께 마음대로 물을 직급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당서곤이 거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소문주는커녕 간부도 안 되는 사내가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천당가의 이 공자가 구천문의 핵심들과 만나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적당히 잘라 낼 수 있는 이가 어떻게 보면 당서곤한테도 훨씬 나았다.
“이 공자님께서도 제가 편하실 테고요.”
“부정하지는 않지.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소문주님이나 장로님과 만나고 싶으시다면, 상부에 보고할 수는 있습니다.”
당서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사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람 좋은 미소였으나 눈빛은 조금 묘했다.
입과 눈매는 분명 웃고 있는데 눈동자에는 감정이 없다고나 할까.
“나중에. 때가 되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본론.”
“방계 세력을 규합하는 게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는지 여쭙고자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비밀리에 규합하는 만큼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 텐데?”
당서곤이 눈살을 찌푸렸다.
구천문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만약 구천문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세력을 일구는 데 몇 배는 더 시간이 소요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간섭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암요. 저희도 잘 알지요. 대공자의 지지 기반이 엄청나게 탄탄하다는 것도요. 그러나 저희 입장에서는 답답한 것도 사실입니다.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까요.”
“슬슬 간섭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상부는 물론이고 저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내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당서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구천문을 믿지 않았다.
묘강의 오랑캐를 믿을 바에야 중원의 정사중간의 문파를 믿는 게 나았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지?”
“이 공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가 투자한 게 많지 않습니까?”
“그런가?”
당서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사내가 순간 움찔거렸다.
천문학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서곤에게 이리저리 들어간 금액이 상당했다.
한데 마치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말하자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작 눈에 띄는 성과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이 공자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높으신 분들은 확실하게 보고받는 걸 좋아하신다는 것을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현황보고서를 작성해 달라는 건가?”
“보고서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저에게 말씀해 주십사 하는 거지요.”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당서곤이 서늘한 시선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구천문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나 그는 결코 하수인이 아니었다.
지금은 상황이 어려웠기에 도움을 받지만 결국 구천문은 적이었다.
사천당가를 손에 넣으면 가장 먼저 치워 버릴 곳이 구천문이었다.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저도 상부에 보고할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가 이대로 갈라설 사이도 아니고요.”
“협박인가?”
“그럴 리가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강요는 아니라고요. 다만 진척 상황을 듣고 싶은 겁니다. 누구하고 누가 포섭되었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 상황이 진전되었다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니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고요.”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협박이고 충고였다.
그걸 모를 수가 없기에 당서곤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제 와 엎을 수도 없었다.
사내의 말대로 갈라서기에는 너무 멀리 온 상태였다.
“……방계는 대략 사 할 정도 포섭했다. 고민하는 것까지 합치면 절반 이상이고.”
“흐으음.”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낮은 음성에도 사내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서 턱을 쓰다듬었다.
“답답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붙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싸우면 내가 필패니까. 그럼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래서 제가 묘안을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해 봐.”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는 사내의 모습에 당서곤이 선심이라도 쓰는 양 턱을 끄덕였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사내는 전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수더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부에서 지지 기반을 만드는 건 한계가 있지요. 대공자는 장남에다가 적자이니까요. 그러니 앞으로 시간과 돈을 들여도 저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시선을 밖으로 돌려 보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사천당가 안에서 아등바등 세력 다툼을 벌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도 정적을 치워 버리기 위해 외부의 힘을 끌어들인 경우는 많았습니다.”
“외부라.”
“그런 의미에서 고희연은 정말 좋은 기회 아닙니까? 적당히 쓰고 버릴 패도 많고, 진짜 품에 안을 만한 인재도 많지 않습니까.”
“흠.”
당서곤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에 답답하던 차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었고.
그런데 사내의 말을 듣자 머리가 맑아지며 몇몇 인물들이 떠올랐다.
“중요한 건 이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사천당가만 차지하면 모든 건 다 이 공자님의 뜻대로 될 겁니다. 물론 크게 싸우면 전력이 약화되니 차근차근 하나씩 이루는 게 가장 좋겠지요.”
“말을 잘하는군.”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제 생각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선택은 이 공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사내가 두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다른 뜻은 없이 오직 당서곤만을 위한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당서곤은 그 말을 순진하게 믿지 않았다.
애초에 구천문이 그에게 접근한 것도 다 목적이 있어서일 게 분명했다.
“갑자기 떠올랐는데, 진짜 원하는 게 중원에서의 활동만인가?”
“물론입니다. 묘강은 너무 척박합니다. 그리고 재료 수급에도 한계가 있지요. 예전에는 중원과의 전쟁을 선택했지만 지금의 문주님은 생각이 다르십니다. 실패한 강경책보다는 유화책을 선호하십니다. 굳이 서로 피를 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