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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90화 (90/468)

제 32장. 이독제독(以毒制毒). -01

“아,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잠자리도 좋고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먼. 안 그래도 내가 가주에게 신경을 좀 써 달라고 했거든. 모시기 힘든 손님인데 그만한 대접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안 그래도 형님을 잘 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님이지. 도왕도 쉽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하하하.”

정이륭이 어색하게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였다.

이럴 땐 웃어서 넘기는 게 가장 최선이었다.

“둘은 혹 마음에 둔 처자가 있는가?”

“저요?”

“자네가 아니라면 내가 누구에게 묻고 있겠는가?”

당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서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놀라거나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당비는 분명 대단한 무인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기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혼인할 생각도 아직 없고요.”

“호오.”

당차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모습에 당비가 눈을 빛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서였다.

대개는 그를 앞에 두면 긴장하거나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서조운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 봤다.

“저도 조운이와 같은 생각입니다. 또 장유유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어째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하는 정이륭의 모습에 당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실력만큼이나 다들 배짱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모습이 건방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곳저곳에서 혼담은 많이 들어오는데, 아직은 여자를 만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언제가 적당할 것 같은가?”

“글쎄요. 운명처럼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당비도 마주 웃었다.

지금 말한 의미를 그는 눈치채서였다.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건 곧 당서린은 운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인연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네. 처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그렇지가 않게 되지. 미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스스로가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그렇기도 하지. 몇몇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도 하고. 자네는 그리 생각하는 쪽이구먼.”

“그렇습니다.”

“근데 말이야.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네.”

이번에는 당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 미소를 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마주 웃었다.

“그럴 땐 한 가지 방법밖에 없죠. 막으면 부수면 됩니다.”

“허허허.”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반호진의 대답에 당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조운과 정이륭의 배짱이 어디에서 왔나 싶었는데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고 있게나.”

“예.”

왠지 모르게 뒷말이 남아 있을 것 같았으나 반호진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이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대신 몸을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노환으로 죽지 않았다면 사천당가가 그렇게 허망하게 풍비박산되지는 않았을 텐데.’

육신은 늙었지만 당비는 여전히 강했다.

일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절대고수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아쉬웠다.

만약 당비가 노환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고 해도 사천당가가 쉽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사천당가가 멀쩡했다면 구천문이 쉽게 중원으로 넘어오지도 못했을 터였다.

‘암제(暗帝)와 독왕이라면 구천문을 멸문시키지는 못해도 붙잡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독은 치명적이고 위험했다.

그렇기에 다루기가 쉽지 않았지만 일정 경지에 오른다면 혼자서 수백, 수천 명을 죽일 수 있었다.

바로 그게 독의 힘이었고, 무서움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반호진이라고 할지라도 하늘이 정해 놓은 수명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세월이 흐를수록 육체는 노쇠하고 감각은 무뎌지지만 대신 경험과 내공이 쌓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진심으로 아쉬웠다.

당비가 만약 산수연까지 살아 있었다면, 앞으로 십 년을 더 살았다면 미래는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회의실 겸 응접실로 사용하는 큰 방에 모인 서조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텅텅 비어 있었던 방에 지금은 온갖 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도 있었다.

“이게 다 뭐다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예요.”

서조운 다음으로 방에 들어온 정이륭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살펴보면 분명히 그와 서조운에게 온 게 맞았다.

“그거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 나한테 온 것만 해도 그 정도는 되는구만.”

“형한테도 왔어요?”

“물론이지. 관심이 너희 두 사람에게만 갔을 거 같아? 선우세가가 배정받은 숙소도 상황은 비슷할걸?”

깜짝 놀라는 서조운, 정이륭과 달리 모용척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고는 익숙하게 의자를 빼내고 앉았다.

그러나 정이륭과 서조운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런 관심은 처음이에요.”

“내용은 다 비슷비슷하네.”

“벌써 읽어 봤어요?”

“나한테 왔는데 당연히 읽어 봐야지.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고. 근데 나보다는 네가 압도적으로 많네.”

밀봉된 서신 몇 개를 뜯어 본 정이륭은 이내 관심이 식었는지 더 이상 다른 걸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보다 몇 배는 많이 쌓인 서조운의 서신들과 선물들을 보며 감탄했다.

“아마 사문 때문에 그럴 거야. 이륭이 넌 알려진 게 없지만 조운이는 신원이 확실하잖아. 아마 저 서신이랑 선물 보낸 곳들 전부 다 서가장에 대해서 알아봤을걸? 개방을 통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하루가 걸린 거예요?”

“하루면 엄청 빠른 거지. 아마 지금 있는 건 조족지혈일걸? 내일은 더 올 거야. 아니면 저녁에 한 번 더 오든가.”

“허.”

서조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해서였다.

근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이었다.

“입이 아주 찢어지는데?”

“미동도 안 했는데요?”

“너는 그렇게 느끼겠지. 하지만 제삼자의 시선은 객관적이고 냉정하다고.”

모용척의 말에 서조운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하지만 입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크크! 내 눈에는 보여. 네 입꼬리가 귀에 닿아 있는 게.”

“독심술이라도 익혔어요?”

“아니. 딱 보면 알지.”

부연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이 모용척이 거만하게 말했다.

그냥 보면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서조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얼마나 왔어?”

“엄청나게 왔지.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확인 안 해? 일일이 답신을 해 줄 수는 없어도 보낸 예의가 있으니 읽어 주기는 해야지.”

“부질없는 짓이야.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다 받아들일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이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신을 보낸 이들을 다 받아 준다면 삽처사첩이 아니라 오십여 명은 될 터였다.

“답신이 없으면 알아서 알아들을 거야. 결국 글렀구나 하고. 이런 게 한두 번이겠어? 아마 잘 보면 너랑 조운이랑 겹치는 곳도 있을걸?”

“설마.”

“나랑도 겹치는 곳이 있을 거야.”

“그건 너무한 거 아냐?”

정이륭은 물론이고 서조운의 표정도 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거지. 먹으면 좋고, 아님 말고. 아마 방이 형한테도 꽤 갔을걸?”

“맞아.”

“오셨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처럼 모용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우방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상당히 시달린 얼굴로 말이다.

“여기도 똑같네.”

“형은 얼마나 받았어요?”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럼 역시 예상대로 제가 제일 많이 받았네요.”

모용척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거라도 이긴 건 이긴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모용척에게 선우방이 찬물을 끼얹었다.

“호진이는 더 많이 받았을걸?”

“아닐걸요. 형님은 저희랑 상황이 좀 달라요. 아마 실제로 받은 건 얼마 안 될 겁니다. 어쭙잖은 곳은 아예 시도조차 못할 테니까요. 어제랑 그제 형님께 관심을 표현한 여인이 무려 삼봉이니까요. 거기다 태상가주께서 직접적으로 관심을 드러냈으니 어중간한 곳은 알아서 포기했을 겁니다.”

모용척의 호언장담에 선우방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어서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주인도 없는 방에 몰래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잘 아네?”

“딱 보면 알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결국 다 비슷비슷하기도 하고요. 또 어르신들이 급을 엄청 따지지 않습니까. 근데 형은 어때요?”

“나? 왜?”

“가주님이 별말씀 안 하세요?”

“아직은. 너는 하는 모양이다?”

모용척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했던 게 거짓이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지는 모용척의 모습에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힘내라.”

“형 같으면 힘이 나겠어요?”

“어쩔 수 없지. 가문을 위해서니까. 마음의 준비를 미리미리 해 두어야지. 아니면 아버지의 지시를 거절할 정도의 실력을 쌓든가.”

“으음!”

모용척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죽을 만큼 노력하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근데 형님은 어디 가신 거예요?”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서조운의 시선이 선우방을 지나 정이륭에게 향했다.

혹시 들은 게 있냐는 눈빛이었다.

“나도 들은 거 없는데? 그냥 볼일 있다고 하신 것밖에는.”

“사천성에 온 건 처음이시지 않나요?”

“모르지. 난 하산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개인적인 일인가?”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매일 같이 있는데 따로 행동하자 서조운은 조금 섭섭했다.

“남자에게는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그렇긴 하죠.”

“상관세가에 대해서 알아보려 나간 걸 수도 있고. 몰래 떠날 생각은 아닐 테니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고.”

선우방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안 그래도 몸이 근질거렸다는 듯이 모용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시 후 연무장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반호진은 한가롭게 성도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지만 전생에서는 몇 번 와 본 곳이 바로 사천성 성도였다.

그래서 반호진에게는 제법 익숙했다.

다만 지난 생과는 다른 평화로운 분위기가 반호진에게 낯설었다.

“신기하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반호진은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쟁보다는 평화가 좋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와 같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필요했다.

“생각도 정리할 겸.”

운명이라는 건 참 재미있었다.

바꿀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절대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존재했다.

그중 앞으로 사천당가에서 벌어질 일은 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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