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장. 신성들. -04
“팽가주님.”
“안녕하세요?”
거구의 팽만철이 두 딸을 데리고 찾아오자 선우청과 모용궁이 내심 크게 놀랐다.
도왕이라 불리는 그가 이렇게 서슴없이 반호진을 찾아올 줄은 몰라서였다.
특히 모용궁의 눈매가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관통해서였다.
“왠지 이곳에 있을 것만 같더라니.”
팽만철이 혀를 끌끌 찼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구석진 자리에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오랜만입니다, 팽가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사이 선우청과 모용궁은 팽만철에게 포권을 했다.
그러자 팽만철도 마주 인사했다.
“두 분 다 오랜만이오.”
같은 가주지만 두 사람과 팽만철의 위치는 천양지차였다.
그걸 태도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팽만철이 선우청과 모용궁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분위기가 그랬다.
“미쳤다. 선우세가나 모용세가는 자식들 때문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북팽가라니.”
“어제는 오대세가의 자제들이 거의 다 모이더니 오늘은 가주들인가.”
팽만철이 직접 찾아오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어서였다.
팽만철이 누구이던가.
하북팽가의 주인이자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었다.
그런 그가 일개 후기지수에게 먼저 다가가자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다들 부러운 시선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노는 물이 다르다는 건가.”
“격차가 이렇게 컸나?”
“당연히 크지. 괜히 군계일학이니, 인중룡이니 하겠어?”
후기지수들은 물론이고 군소방파의 수장들조차 반호진을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선우세가나 모용세가까지는 어찌어찌 만날 수 있겠지만 하북팽가는 달랐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데다가 가주가 도왕이기에 찾아간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한데 그런 팽만철이 먼저 다가가 알은체를 하자 수장들은 반호진이 너무나 부러웠다.
“용케 찾으셨네요.”
“딱 보면 알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자네의 기도는 특출 나니까.”
“그렇습니까.”
“아닌 척하기는. 근데 지난번과는 다들 너무 다르군.”
팽만철의 동공에 살짝 놀라움이 떠올랐다.
시큰둥한 반호진의 태도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랬기에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놀란 건 선우방과 서조운, 정이륭 때문이었다.
특히 선우방의 성장세가 놀라웠다.
“열심히 수련했으니까요.”
“수련한다고 모두가 똑같은 성과를 내는 건 아니지.”
“그렇긴 합니다.”
“이거 내 자식들을 연공실에 처박아 두지 말고 숭산에 보낼 걸 그랬어.”
“절대 안 됩니다.”
진지한 팽만철만큼이나 반호진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두 망나니들을 데리고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서였다.
“너무하는 거 아닌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거절이라니.”
“일고의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싫은가?”
“예.”
조금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완고하게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팽만철이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은근슬쩍 숭산에 보내고 싶지만 반호진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이 아쉬웠다.
철딱서니 없는 두 아들을 정신 차리게 해 줄 적임자가 반호진 같았는데 정작 당사자는 학을 떼자 팽만철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넷은 되고, 내 아들들은 안 된단 말이지.”
“네 사람은 제가 직접 선택한 이들이니까요.”
“이것 참.”
아쉬워하는 팽만철과 달리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서조운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반호진이 선택했다는 말이 그에게는 너무나 듣기 좋은 말이어서였다.
근데 그건 정이륭도 마찬가지인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갈 순서는 내가 정한다. 중요한 건 내가 참석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니까.”
팽만철이 당당하게 말했다.
순서 따위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왕 정도면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래도 온 김에 이만 가시죠. 두 분도 가셔야 하는데.”
“오랜만에 봤는데 그렇게 날 보내고 싶은가?”
“시간이야 많지 않습니까. 고희연은 내일까지 이어지니까요. 그리고 당 대협께서 이곳을 보고 계시는데요.”
“에잉!”
팽만철 역시 당비의 시선을 느꼈기에 몸을 일으켰다.
욕심 같아서는 좀 더 앉아 있고 싶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모용세가에서도 욕심을 내는 듯하기에 팽만철은 노심초사할 바에는 이참에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최소한 어쭙잖은 경쟁자들은 확 쳐낼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그러졌기에 팽만철은 얼굴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선우청과 모용궁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두 분도 같이 갑시다.”
“예.”
“알겠습니다.”
혼자만 이 자리를 뜰 수는 없다는 듯이 팽만철은 두 사람과 함께 이동했다.
자신에게 기회가 없다면 모용궁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그렇기에 팽만철은 모용궁과 모용척, 모용희수 남매를 데리고서 당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확실히 무게감이 남다르긴 하네요.”
“머리도 영리하시고.”
“영리한 것보다는 교활한 쪽 아닐까요? 곰 같은 여우랄까.”
“인정.”
선우청과 선우방을 데리고 파도를 가르듯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팽만철을 보며 서조운과 정이륭이 감탄했다.
제멋대로긴 해도 시원시원한 건 사실이었다.
또 어떻게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제대로 활용하고 있기도 했고.
“근데 그런 팽가주님도 우리 형님한테는 약해지죠.”
“맞아.”
서조운이 가슴을 쫙 펴고서 거들먹거렸다.
마치 자신이 반호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근데 네가 왜 자랑스러워해?”
“저는 형님의 동생이니까요.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하죠.”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런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서조운이 한 번 둘러보라는 듯이 먼저 주변을 느리게 훑어봤다.
하지만 서조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반호진은 무심히 차만 들이켰다.
“내가 보기에는 너부터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예?”
서조운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문했다.
그런데 정이륭은 단박에 알아차렸는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륭이는 눈치챈 거 같네.”
“저도 나름 눈치가 빠른 편이라서요. 의외로 방이 형이랑 조운이는 둔감하더라고요. 척이는 단번에 눈치채던데.”
“그 외모에, 그 재능에. 예전부터 익숙하던 일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정이륭은 금방 수긍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자아도취적인 성향이 만들어진 게 어려서부터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너도 들어 봤지? 남자는 가운뎃다리를 잘 놀려야 한다는 말.”
“물론이죠.”
“앞으로 네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다.”
“네에?”
“일단 새겨 놔. 새겨 놔서 나쁠 건 없으니까.”
눈을 끔뻑거리는 서조운의 모습에도 반호진은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백날 설명해 주는 것보다 한 번 겪어 보는 게 훨씬 빠르다는 걸 알아서였다.
후르릅.
딱 필요한 말만 한 반호진은 이내 어제 했던 고민을 다시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떠오를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아침부터 이어진 선물증정식이었으나 당비의 표정은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물을 주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고, 먼 길을 달려 사천성 성도까지 왔음을 잘 알아서였다.
그에게는 수백이지만 상대에게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당비는 그 차이를 알았기에 벌써 세 시진 넘게 쉬지 않고 축하인사를 받았음에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와 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십시오! 산수연도 하셔야지요!”
“너무 오래 살면 자식에게 욕먹네. 지금도 눈빛으로 욕을 하고 있지 않나.”
감격해하는 장년인을 향해 당비가 농담을 했다.
그걸 장년인도 알기에 맞장구를 치듯 크게 웃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까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푹 쉬게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을 하고.”
“알겠습니다!”
또 한 명과의 대화를 끝내고서 당비가 허리를 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먼 쪽을 응시했다.
기다리고 있음에도 아직 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원탁을 말이다.
‘슬슬 올 때도 된 것 같은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은 진즉에 인사를 끝내고 떠났다.
그리고 명문세가와 대문파들의 차례도 끝났다.
한데도 그가 기다리는 무리들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만철이가 탐을 낼 만해.’
당비의 시선이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는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현재 제일이라는 후기지수답게 처음 반호진을 봤을 때 당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손자인 당서건도 재능적인 부분에서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격이 다르다는 표현처럼 당서건은 감히 반호진에게 비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그런 재능이 반호진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용척과 서조운, 정이륭의 재능은 뛰어나다 못해 눈부실 지경이었다.
거기다 셋은 단순히 엄청난 재능을 가진 걸 넘어 개화까지 한 상태였다.
‘선우세가의 아이도 만만치 않고.’
네 명 때문에 살짝 가려진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선우방의 재능도 진짜였다.
그렇기에 처음 반호진 일행을 봤을 때 당비는 정말 깜짝 놀랐다.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였다.
하지만 다섯 중에 화룡점정은 누가 뭐래도 반호진이었다.
‘서린이의 짝으로 딱인데 말이지.’
실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배경 역시 훌륭했다.
특히 속가제자라는 게 당비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무가가 아닌 평범한 가정 출신이니 데릴사위로 들이기에도 딱이었고.
그리고 당비는 서조운과 정이륭도 탐이 났다.
‘직계는 서린이뿐이지만 방계 쪽에는 여식들이 좀 있으니까.’
반호진과 서조운, 정이륭을 품는다면 남궁세가를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아니, 일단 그가 죽어도 걱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반호진 일행은 지금도 뛰어나지만 앞으로 더욱 대단해질 것이니까.
저벅저벅.
그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오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엉덩이를 떼지 않았던 반호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같이 앉아 있던 서조운과 정이륭도 반호진을 따라 일어나서는 그를 향해 다가왔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안 그래도 자네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어.”
“저를 아십니까?”
의뭉스럽게 반문하는 반호진을 향해 당비가 씨익 웃었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아무리 뒷방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하지만 설마 신룡을 모를까.”
“허명입니다.”
“과례는 비례인 법이네. 허명이 아니라 과소평가되었구만, 무슨.”
겸손하게 고개를 젓는 반호진을 향해 당비가 실소를 흘렸다.
신룡이라는 별호는 후기지수에게 있어 최고의 칭호라고 할 수 있으나 반호진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와 주어서 고맙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희를 축하드립니다.”
당비의 인자한 눈빛에 서조운과 정이륭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약소하지만 그래도 정성이 담긴 선물이었다.
“선물 고맙네. 세 사람의 선물은 내 밤에 직접 뜯어 보겠네.”
“너무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선물은 정성이 중요한 법이지. 그래, 음식은 입에 좀 맞는가?”
정이륭이 눈을 크게 떴다.
대충 선물만 받고 대화를 마무리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질문을 하자 정이륭은 물론이고 서조운도 놀랐다.
더해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