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장. 신성들. -02
예상했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쾌검에 공손혁이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가슴께로 들어 올린 검신에 모용척의 검 끝이 닿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은 거기까지였다.
이어지는 모용척의 검격에 공손혁의 백의무복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극. 슥!
공손혁이 어떻게든 막아 내려고 애를 썼으나 첫 공격 이후로 금속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무복이 갈라지는 소리만 들렸다.
교묘하게 공손혁의 검세들 사이로 모용척이 검을 휘둘렀기에 옷만 찢어졌다.
“이익!”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기에 공손혁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하나 아무리 빨리 검을 휘둘러도 충돌은 없었다.
깔끔하면서도 현란한 모용척의 기교를 그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기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공손혁이 악을 질렀다.
동시에 단전의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검술로 상대가 안 된다면 공력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기교도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는 무너지는 법이었기에 공손혁은 가지고 있는 모든 공력을 검에 쏟아부었다.
웅웅웅!
이십오 년 동안 축적한 내공이 한순간에 검에 담겼다.
그러나 검기를 넘어 검사까지는 형상을 이루었지만 검강으로 넘어가지는 못했다.
무인으로서 마주하는 첫 번째 벽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을 공손혁은 아직 넘어서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터엉! 터어엉!
검신에서 솟구친 검사들이 휘몰아치며 검막을 이루었다.
기술의 부족함을 공력으로 채워서 만들어 낸 검막이었다.
그 결과 처음으로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용척의 검격을 드디어 막아 낸 것이었다.
“차하압!”
그러나 공손혁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당한 굴욕을 생각하면 똑같이 되갚아 주어도 모자랐다.
이자까지 톡톡히 돌려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이기에 공손혁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검사가 꿈틀거리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만큼 시원스럽게 모용척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흥.”
하지만 살벌한 기세로 쇄도하는 공손혁의 검격을 보고도 모용척은 긴장하지 않았다.
아니, 콧방귀를 끼었다.
고작 검사 따위로 기고만장해하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서였다.
그래서 모용척은 몸소 알려 주었다.
투웅.
모용척의 검이 순간 번뜩였다.
한줄기 섬광처럼 허공을 가르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동시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장내를 갈랐다.
바로 반 토막 난 공손혁의 검신이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쿨럭!”
더불어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서 있던 공손혁이 시커먼 피를 토했다.
찰나였지만 검이 부딪친 충격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반면에 공손혁의 검을 말끔히 잘라 낸 모용척의 신색은 평온했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제가 이겼군요.”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어 대답을 못 하는 공손혁을 응시하며 모용척이 거만하게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걸 불편해하는 이는 없었다.
공손혁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에 다들 충격을 받아서였다.
“화려하게 복귀하네.”
“그러게.”
“공손 공자도 나쁜 실력은 아닌데.”
“단지 척이가 더 강했을 뿐이지. 승패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거니까.”
승자와 패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둘을 지켜보며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어조에서 모용척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모용척이 이길 거라 알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선우방은 반호진과는 다른 관점으로 모용척을 바라봤다.
“콧대가 엄청 오르겠는데?”
“언제는 안 올랐나?”
“하긴. 너랑 이륭이가 있어서 그나마 겸손한 거지 만약에 너희 둘이 없었으면 아주 기고만장해서 날뛰었을 거야.”
“아닐걸? 여전히 자신의 방에 처박혀서 이것저것 들쑤시고 있었을 거다.”
“그런가?”
선우방이 고개를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조용히 듣고 있던 모용희수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반호진의 추측에 십분 동의했다.
“저도 형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형님과 조운이라는 충격요법이 없었다면 여전히 허송세월을 보냈을 거예요.”
정이륭도 동의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친구기에 정이륭은 더더욱 냉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천재지만 괴짜 같은 성격을 가진 게 모용척이니만큼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척이 형은 사건사고들을 터트리고 다닐 성격이잖아요.”
“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진심이 담긴 서조운의 말에 모용희수가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모용척의 성격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으음!”
동갑내기인 모용희수의 말에 서조운이 의미심장하게 반문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듯이 말이다.
그 시선에 모용희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따앙! 따다다당!
한편 모용척은 공손혁에 이어 화산파의 후기지수와 비무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도전자를 상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놀랍게도 매화검수였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척이의 별호가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근데 넌 안 하게?”
반호진이 선우방에게 슬쩍 물었다.
수준 높은 비무가 연달아 이어지자 연회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피가 끓는 청춘들이 모였는데 거기에 모용척이 불을 지피자 열기가 무섭게 치솟았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비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너랑 비무를 해서 그런가. 딱히 안 땡기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네가 이해한 그대로의 말이지. 이제는 굳이 비무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 척이나 조운이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지만 난 아니니까.”
“저도 딱히.”
정이륭이 슬쩍 합류했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였다.
그리고 정이륭은 무명을 날리고 싶다는 야망 자체가 없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까지는 마. 큰맘 먹고 다가온 이들도 있을 텐데.”
“너에게 그대로 해 주고 싶은 말인데?”
“나도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다만 지금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반호진의 말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궁광과 당서건, 제갈기정이 눈을 빛냈다.
특히 남궁광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소림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기에 그는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한데 반호진이 여지를 남기자 남궁광은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눈을 반짝였다.
“생각할 거?”
“응.”
대답은 했지만 반호진은 부연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선우방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사패와의 전쟁에 있어서, 특히 구천문과의 싸움에서 사천당가의 존재는 필수적이야. 그렇다면 몰락을 막아야 하는데…….’
반호진의 시선이 당서건과 당서곤으로 향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서곤이었으나 크게 보면 두 사람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하나 반호진이 사천당가의 일에 끼어드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금가장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으니까.
‘난감하군.’
반호진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천당가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금호연처럼 도움을 청하면 모를까 지금의 그는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그리고 아직 본격적으로 형제의 난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기에 먼저 말하는 것도 웃겼다.
‘진퇴양난이로군.’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중앙에서 벌어지는 비무에 쏠려 있는 것과 달리 반호진은 일절 관심이 없었다.
모용척에 이어 서조운과 선우방도 비무를 시작했지만 반호진은 혼자만의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선우세가의 소가주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제와 같이 지내면서 많이 성장했습니다.”
“허어. 함께한 시간이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후기지수들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오중건이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그 정도로 선우방의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무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시간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느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놀라는 오중건과 달리 법무의 표정은 담담했다.
소림사에서 머물렀기에 그로서는 딱히 놀랄 게 없었다.
간간이 만나기도 했고.
“모용세가의 소가주는 완벽하게 부활했네요. 이제는 늦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간 앞에서는 별수 없지 않습니까.”
“열아홉이면 또 그렇게 늦은 건 아니니까요. 중간에 검을 놓아서 그렇지 어려서부터 무공을 수련한 몸이지 않습니까.”
오중건의 시선이 모용척에게로 향했다.
살짝 거만한 끼가 있기는 하지만 저 정도는 그래도 자신감으로 봐줄 수 있었다.
게다가 모용척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고.
다만 오중건이 놀란 건 반호진의 행보였다.
“도대체 왜 모용세가까지 갔을까요. 법무 대사께서는 혹 아십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저에게 일일이 보고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흐음. 그렇습니까.”
오중건이 턱을 쓰다듬었다.
철혈성의 암호문을 받은 걸 시작으로 오중건은 그동안 반호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뒷조사가 아니라 그간의 행보를 지켜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반호진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목적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저 성격상 중원을 뻔질나게 돌아다닐 리가 없지.’
오중건이 미간을 좁혔다.
알고 지낸 시간이 제법 되는 만큼 그는 반호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오중건은 궁금했다.
대체 반호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습니까. 인재가 많을수록 중원무림에는 좋은 일이니까요. 더욱이 지금처럼 새외무림의 정세가 심상치 않을 때에는.”
“뭐, 그렇긴 하죠.”
오중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중원을 침공할 낌새는 보이지 않으나 대비는 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대비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는 건 완전히 달랐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선우방과 모용척의 성장은 중원무림의 홍복이었다.
거기다 서조운과 정이륭의 등장 역시 좋은 일이었다.
다만 살짝 걱정이 되는 건 사문을 알 수 없는 정이륭이었다.
“정 소협의 사문이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요.”
“마공이나 사공을 익히진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끼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사제가 아무 생각 없이 데려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법무가 믿음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설렁설렁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법무였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애초에 소림사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에 그런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에게 말했을 터였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철두철미한 성격이니까요. 근데 다시 봐도 놀랍긴 하네요. 특히 서 공자의 성장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