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86화 (86/468)

제 31장. 신성들. -01

팽화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서운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옆에 있던 팽수영도 마찬가지였다.

반호진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며 그를 쳐다봤다.

“너무하세요.”

“공부가 그렇듯 수련에도 시기가 있지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데요.”

팽화영이 정색하며 말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변명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였다.

한데 반호진은 되레 당당했다.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와, 나쁜 남자.”

“저는 나름 배려한 것입니다만.”

“이런 건 배려가 아니라 무관심이에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반호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관심이 크지 않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무관심인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근데 의외네요. 사천당가에는 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이런 소란스러운 자리는 싫어하시잖아요.”

“맞습니다. 근데 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요.”

“끌려왔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호호호.”

대화하던 팽화영은 물론이고 팽수영과 남궁소연, 제갈혜정이 실소를 흘렸다.

사천당가의 자제들이 같은 자리에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모습이 건방지기보다는 당당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사천당가를 깎아내려서 자신을 돋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기에 다들 오해해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성격이 재미있으시네요.”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던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주 찰나간의 공백을 당서린이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반호진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자 귀를 기울이던 후기지수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삼봉 중 가장 도도한 당서린이 이렇게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라서였다.

“인정은 빠르시네요?”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고쳐야 할 건 고쳐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호오.”

꽤나 도발적으로 말을 걸었던 당서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 하도 단호해서 이런 쪽에는 꽉 막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대화를 나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반 소협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당서건이 슬쩍 대화에 참여했다.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두 눈에는 호승심을 숨기지 않고서 말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천룡 남궁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습니까.”

반면에 반호진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그에게 있어 말을 건 당서건이나 남궁광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두 사람이 강호에게 손꼽히는 후기지수라고 하나 반호진에게는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천하십대고수라면 모를까 후기지수들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공자가 있었군.’

반호진의 시선이 당서린의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앉아 있는 당서곤에게로 향했다.

셋 다 사천당가주의 자식이었지만 신분은 살짝 달랐다.

정실에게서 태어난 당서건, 당서린과 달리 막내이자 이 공자인 당서곤은 첩실의 자식이었다.

즉 당서건, 당서린 남매와는 이복형제였다.

‘몰락의 시작이자 원흉.’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도 억지로 끌려왔다는 듯이 당서곤은 인사 이후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앉아서 차만 홀짝였다.

반호진은 그런 당서곤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그걸 당서건과 당서린이 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런데 그때 반호진과 일행이 앉아 있는 곳으로 한 명의 청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직 반호진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누가 봐도 반호진에게 용건이 있는 듯한 눈빛과 시선 처리, 표정으로 다가온 청년이 절도 있게 포권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 소협. 저는 공손세가의 공손혁이라고 합니다. 실례인 건 알지만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반 소협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오오!”

용기 있게 다가가서 비무를 청하는 공손혁의 모습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들 마음은 한가득 있었지만 정작 나서지는 못했다.

워낙에 반호진의 성격이 까탈스럽다고 알려졌기에 다들 눈치만 봤는데 공손혁이 물꼬를 터 주자 모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공손혁을 시작으로 자신들도 나서려는 것이었다.

“부탁드립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응원에 공손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포권한 상태에서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다 못해 깍듯한 간청에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에게 이동했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할지 다들 궁금했던 것이다.

‘이렇게 판을 벌였으니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거다.’

고개를 숙인 공손혁이 씨익 웃었다.

자신이 저자세로 나간 만큼 반호진으로서는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만약 거절하면 그의 얼굴은 물론이고 공손세가 역시 무시한 꼴이 되었다.

그렇기에 공손혁은 바로 그걸 노렸다.

‘멍청한 놈들. 입을 벌린다고 복숭아가 떨어지나. 나무를 흔들거나, 작대기로 따야 복숭아가 떨어지지.’

공손혁은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확신했다.

자신의 한 수가 먹혀들었음을 말이다.

모두가 그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선뜻 비무를 청하지 못했다.

반호진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특유의 냉랭한 분위기 때문에.

하지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는 것처럼 기회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시도한 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신룡을 이기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쉽게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일단 신룡과 같이 언급되면 그 후는 일사천리니까. 또 모르지. 운이 좋아 이길 수 있을지도.’

공손혁이 내심 히죽 웃었다.

녹림대군을 처치한 반호진을 비무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인 스스로도 생각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승패라는 게 절대적이지는 않았기에 공손혁은 일말의 희망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부르르르!

공손혁이 몸을 떨었다.

상상만 해도 전율이 일어서였다.

만약에 반호진을 이긴다면 단숨에 중원 전역에 그의 이름이 알려질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여 있는 삼봉과 모든 여인들의 관심도 그에게 쏟아질 것이었다.

꿀꺽!

그중 공손혁의 마음을 휘어잡는 건 누가 뭐래도 삼봉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인 삼봉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걸 생각하자 피가 한곳에 쏠렸다.

지금은 인사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지만 만약 반호진을 쓰러뜨린다면 셋 중에서 한 명을 고르는 것도 가능했다.

‘아니지. 셋 다 가지는 것도 가능해. 지금의 반호진을 쓰러뜨린다면 사천당가, 모용세가, 화산파에서 나를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할 테니까.’

공손혁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였다.

동시에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스윽.

앞으로 펼쳐질 탄탄대로를 떠올리며 히죽거리고 있을 때 앞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 소리에 공손혁은 반색했다.

드디어 의도대로 반호진이 움직인 것 같아서였다.

“형님과 비무를 하고 싶으면, 일단 저부터 넘으시죠.”

“응?”

공손혁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기대했던 반호진의 목소리가 아니라 낯선 음성이 들려와서였다.

그래서 공손혁은 머리를 번개같이 들어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형님의 급이 있는데 아무나 상대해 줄 수는 없죠. 사룡이라면 또 모를까.”

“……모용척.”

마치 무명소졸은 상대해 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모용척의 말투에 공손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참이나 어린 모용척이 무시하듯 말하자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척은 공손혁의 안면이 경직되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역시 조사를 하고 오셨네. 통성명도 안 했는데 제 얼굴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아니면 쭉 엿듣고 계셨나?”

모용척이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한데 그 말에 여기저기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왔다.

훔쳐 듣고 있던 게 사실이었기에 민망함을 감추고자 몇몇 남녀들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면 고개를 슬쩍 돌리거나.

“말이 좀, 심한 것 같소이다.”

공손혁이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노성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이 많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또 한참이나 어린 모용척과 드잡이질을 해 봤자 체면을 구기는 건 그였다.

그렇기에 공손혁은 가까스로 표정을 가다듬고서 점잖게 말했다.

“흐음. 그쪽이 형님께 비무를 청하는 건 안 심하고요?”

“뭐라!”

하지만 이어지는 모용척의 말에 공손혁의 인내심은 순식간에 바닥났다.

계속되는 빈정거림에 결국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손혁의 노성에도 모용척은 기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실실 웃었다.

“도전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정 그렇게 형님과 비무를 하고 싶으면, 저부터 넘고 말하시길.”

존칭을 하기는 하나 묘하게 비틀려 있는 듯한 말투에 공손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고는 모용척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좋소이다. 그래야 가능하다면, 그리하겠소.”

휘이익!

이를 갈 듯이 말을 내뱉은 공손혁이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분노를 억누른 걸음걸이로 연회장 주변으로 걸어가자 근처에 있던 후기지수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제가 확실하게 보여 주겠습니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턱도 없다는 것을요.”

“그래.”

모용척이 히죽 웃으며 반호진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긴장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우방을 위시로 서조운과 정이륭도 여유롭게 모용척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강호의 선배로서, 선공을 양보하겠소.”

“흐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공손혁의 시선에도 모용척은 느물느물하게 대답했다.

선공까지 양보하면 공손혁이 할 수 있는 게 더더욱 없어질 게 뻔해서였다.

“양보하겠소. 오시오.”

“그렇다면야.”

아주 혼쭐을 내 주겠다는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하는 공손혁의 모습에 모용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결정을 번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스르릉.

물론 선공을 양보해 줬다고 봐주거나 설렁설렁 비무를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공식적으로 다시 강호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기에 모용척은 제대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다시 돌아왔음을.

잊혀진 천재가 아닌, 여전히 천재라는 것을 말이다.

“오시오.”

모용척이 검을 뽑자 공손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얼른 오라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모용척은 히죽 웃었다.

지금 공손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훤히 보여서였다.

“그럼, 가죠.”

쌔애애액!

모용척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 순간 검이 움직였다.

한때 강호를 호령했던 은하십검류(銀河十劍流)가 펼쳐진 것이었다.

쾌검은 아니지만 뭇 쾌검보다 더욱 빠르고 날카로운 일검에 공손혁이 대경실색했다.

“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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