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장. 사천당가(四川唐家). -03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상가주님.”
“방장은 어째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네?”
“허허허.”
후기지수들이 연회장에 모여 있을 때 정작 이번 잔치의 주인공인 당비는 자신의 처소에 있었다.
따로 조용히 손님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사에 좋은 일이 있다고 하더니. 역시 얼굴에 티가 나는구먼?”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닙니다.”
“아니긴. 표정에 다 티가 나는데. 역시 소림은 소림이야. 인재가 화수분처럼 나오니.”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 가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호의 소식에 어두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가주였을 때보다 강호정세에 밝았다.
업무에 치이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귀가 열렸고, 그렇다 보니 들리는 게 많아졌다.
“소가주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봤자 신룡에 비할 바는 아니지. 서곤이도 재능이 출중하지만 아직 녹림대군을 때려잡을 정도는 아니니까.”
담현은 말을 아꼈다.
어떤 말을 해도 도움이 안 된다면 차라리 아끼는 게 나았다.
툭.
대신 담현은 미리 챙겨 온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림사에서부터 가져온 선물이었다.
“고희를 축하드립니다.”
“흘흘! 이런 거 안 챙겨 와도 된다고 서신에 적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는 없지요. 대신 값비싼 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절에 돈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던데.”
“잘 아시네요.”
담담하던 담현의 얼굴에 살짝 균열이 일어났다.
설마하니 당비가 소림사의 일을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아무래도 소림사의 일이지 않나. 조금 의외의 일이기도 했고. 또 요즘에 관심이 있어서 말일세.”
“본사에 말씀이십니까?”
담현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금분세수(金盆洗手)까지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반쯤은 은퇴한 삶을 살고 있는 게 눈앞에 있는 당비였다.
그런데 소림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자 담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방장도 알고 있지 않나. 손녀사윗감이 소림사에 있다는 사실을.”
“그 일에 대해서는 답신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담현이 살짝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배로나 배분으로나 당비가 그보다 높다고 하나 담현은 엄연히 일파의 수장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문파나 방파가 아닌 강호에서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의 방장이었다.
그렇기에 담현은 대놓고 불편한 신색으로 당비를 바라봤다.
“알지. 내 그것도 모르고 말을 했을까 봐. 다만 궁금해서 관심을 두다 보니 소림사의 일도 알게 된 것일세. 다른 뜻은 없어.”
“…….”
당비가 극구 부인했으나 담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차를 들이켰다.
“막내제자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
“꼭 제자라서 아끼는 게 아닙니다. 저에게 본사의 모든 제자들은 똑같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호진이의 혼인은 호진이와 부모님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방장답지 않게 칼 같구먼.”
“호진이의 문제니까요. 제가 스승이라고 하나 속세의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지요.”
“흐음.”
당비가 침음을 흘렸다.
이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한 가닥 기대는 있었다.
자신이 나서면 조금은 변수가 생길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담현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완고했다.
“호진이의 삶은 전적으로 호진이의 것입니다. 제가 뭐라 할 수도, 할 마음도 없습니다. 이미 다 자란 제자이기도 하고요.”
“알겠네. 내 더는 묻지 않겠네. 그러니 그만 정색하게나.”
“정색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아니긴. 내가 선배가 아니었으면 한 소리 하고도 남을 표정이었는데.”
당비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근데 두 사람이 좋다고 하면 반대는 안 할 거지?”
“그렇다면야 제가 할 말이 없지요.”
“좋아.”
도와주지도 않겠지만 방해하지도 않겠다는 담현의 대답에 당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더불어 담현이 반호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았다.
“하나 말씀드리자면, 성가시게 하면 바로 떠날 겁니다.”
“그야 알지. 그 녀석 성격이 대쪽 같은 거. 쓸데없는 부분에서 단호하더라고. 사내대장부가 삼처사첩 거느리는 게 흠도 아닌데. 능력이 안 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명문세가 출신이 아니니까요.”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당비를 보며 담현이 대답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건 담현이었다.
당비야 그런 삶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기에 익숙하다지만 반호진은 아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삶의 대부분을 절에서 보냈기에 삼처사첩은 말로만 들은 이야기였다.
‘하나 그걸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인연이 닿는다면 저절로 맺어질 터였다.
안 될 인연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해도 안 되고, 될 인연은 모든 사람들이 막아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니 순리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또 담현은 반호진의 심성과 안목을 믿었다.
“소림사는 명문대파 아닌가?”
“또 절이기도 하지요.”
“……그건 또 그렇군.”
당비가 눈을 끔뻑거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였다.
“묘강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개방에서 말해 주었겠구먼.”
“예. 대막의 철혈성도 중원을 염탐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야 늘 있던 일 아닌가. 경계는 하되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어.”
당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묘강의 구천문에 대해서는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사천성 쪽으로는 문도들을 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보내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본가가 있으니까.”
담현의 말을 당비가 정정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서였다.
“침공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과 대비하고서 싸우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가주도 그건 알고 있네. 철혈성에 대해서도 나 역시 소식은 들었고. 방장의 염려하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네.”
“알겠습니다.”
소림사의 방장이지만 그렇다고 사천당가에게 이러쿵저러쿵 떠들 자격은 없었다.
구천문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알고 있기에 담현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나저나 한 번 보고 싶구먼.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호진이 말씀이십니까?”
“대제자는 보지 않았나. 당연히 신룡을 말하는 거지. 녹림대군을 척살한 실력도 궁금하고. 어쩌면 손녀사윗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담현이 실소를 흘렸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반호진에게로 돌아와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그만큼 반호진이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연회가 이틀이나 남아 있는 만큼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오늘 당장이라도 떠날 성격 아닌가?”
“맞습니다.”
담현은 순순히 긍정했다.
그의 제자지만 어떨 때는 냉정하다 못해 매정하기도 했다.
때문에 당비의 말대로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니까 하는 소리네. 적어도 연회가 벌어지는 동안에는 붙들어 달라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에잉!”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담현의 모습에 당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담현은 당비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당비보다 반호진의 행복이 훨씬 더 중요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제는 품을 떠나는 걸 넘어 천하에 우뚝 서려고 하는 이가 반호진이었다.
괴왕에 대한 게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낭중지추라고 했다.
머지않아 곧 알려지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가야 하나.”
“목마른 자가 우물 파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팽가에서도 눈독을 들인다고 하던데.”
“하북팽가만이 아닙니다.”
“어휴.”
도와 달라는 말을 원천봉쇄하는 듯한 담현의 태도에 당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체면상 먼저 움직이는 건 좀 그랬다.
지금은 뒷방 늙은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강호에서는 대선배가 그였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군. 빈 수레가 요란하다지만 방장이 저렇게 자신만만할 정도라면.’
하나뿐인 손녀이기에 당비는 절대 아무하고나 짝을 맺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가 당서린이었다.
그렇기에 검증은 반드시 필요했다.
‘부디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당비가 처음으로 찻잔을 잡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신기하네.’
당서린은 난생처음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이곳은 사천당가 내에 있는 연회장이었음에도 그녀의 집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그걸 넘어 불편하기까지 한 분위기에 당서린은 당혹감을 느끼기보다는 신선했다.
그녀를 이렇게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일부러 신경을 끌고자 반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반호진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해 봤기에 당서린은 그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후르릅.
심지어 이 자리에 그녀 말고도 또 다른 삼봉 중 한 명인 모용희수가 있었음에도 반호진은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차만 홀짝였다.
다른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면서 말이다.
‘재미있네.’
열다섯 이후로, 삼봉 중 독봉으로 불리기 시작한 뒤로 이런 냉대는 처음이라서 그런지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로웠다.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라서였다.
게다가 소림사에 있을 때부터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었기에 당서린은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고수이니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마주 바라보리라 생각해서였다.
탁.
하지만 당서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의 시선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도 반호진은 힐끔거리지도 않았다.
당서린이 그러거나 말거나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당서린이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신경이 둔하기보다는, 자신감이겠지.’
연회장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에게 쏠려 있었다.
원래부터 은연중에 반호진을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모용희수까지 합류하니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그녀를 비롯해서 사천당가의 소가주도 있었기에 관심이 모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도 반호진은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무덤덤했다.
‘점점 더 관심이 간단 말이지.’
당서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언제나 그녀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는 삶을 살았다.
어쩌면 그래서 남자에 관심이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남자들은 늘 그녀를 갈구했기에 손만 뻗으면 언제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달랐다.
소림사에서부터 퇴짜를 맞았기에 당서린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서운해요. 서신 한 번 안 보내시고.”
“수련에 매진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제가 폐관수련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요.”
여인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서로를 견제하랴, 반호진의 눈치를 보랴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이들과 달리 팽화영은 짐짓 서운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은데 너무 무심한 것 같아서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