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장. 사천당가(四川唐家). -01
‘사천당가는 오랜만이네.’
담현과 법무와 함께 당가타에 도착한 반호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신기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지만 지난 생에서는 몇 번 와 본 적이 있어서였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여기가 그 유명한 당가타로군요.”
“마을 전체가 사천당가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지?”
“예. 달리 당가촌이라 불리기도 한데요.”
무덤덤한 반호진과 달리 당가타에 처음 온 서조운과 정이륭은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해 보여서였다.
반면에 사천당가를 몇 번 방문했던 적이 있는 선우방과 모용척은 조용히 일행들의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아미타불. 오랜만입니다.”
장원이라기보다는 한 채의 성과도 같은 웅장한 정문과 담벼락에 서조운과 정이륭이 다시 한번 놀랄 때 단정한 옷차림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담현을 기다리고 있던 총관이 인사해 온 것이었다.
사천당가의 정문답게 주변은 온갖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으나 반호진은 기다리는 것 없이 곧바로 문을 지났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상가주님의 고희연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허허허.”
“우선 머무실 숙소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 전에 선우세가주님과 모용세가주님이 와 계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총관의 시선이 선우방과 모용척에게로 향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두 사람 다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후계자였다.
그렇기에 총관은 예의를 다했다.
“저희는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께 가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총관이 묻기 전에 이미 일행들과 얘기를 한 상태였기에 선우방과 모용척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하인을 따라 따로 이동했다.
그렇게 둘을 떠나보낸 반호진은 총관을 따라 외원을 지나 내원으로 들어갔다.
소림사라는 이름값을 말해 주듯 사천당가에서 배정해 준 별채는 상당히 훌륭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총관이 짧은 읍과 함께 물러나자 반호진은 대충 아무 방이나 골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조운과 정이륭이 반호진의 양쪽 방을 차지했다.
각방임에도 반호진과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다시 한번 느꼈어요.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하는구나. 명문세가 정도는 되어야 초대장을 받는구나 하고요.”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마. 꼭 초대장을 받는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니까. 방천문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반호진은 짐을 풀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서조운을 달랬다.
어떤 마음인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것도 없었다.
“사천당가에서 방천문을 알았다면 초대장을 보냈겠죠?”
“네 생각은 어때?”
“저는 보냈을 것 같아요.”
반호진과 서조운의 대화에 정이륭은 그저 빙긋 웃고만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넌 어때?”
“당연히 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나 사부님은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형님을 만나기 전에는요.”
“근데 왜 너도 형님이라 그러는 거야? 조운이야 나이 차이가 세 살이나 나지만 너는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체감상으로는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것 같아서요. 척이만 봐도 선우 형한테는 형님이라 안 그러잖아요.”
정이륭의 말에 옆에 있던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갑이지만 묘하게 반호진이 더 형 같은 느낌이 있었다.
언행을 보면 어른스러운 건 분명 선우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연장자처럼 느껴지는 건 반호진이었다.
“이상한 애들이야.”
“원래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 돌려 까는 거지?”
“아닙니다. 저는 순수하게 좋은 의미로 말씀드린 겁니다.”
“흐음.”
반호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정이륭은 당당했다.
진실만을 말했기에 찔릴 것도 없었다.
“근데 형님을 만나기 전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인 건 무엇 때문이에요?”
“형님이 찾아오시고 나뿐만 아니라 사부님도 변하셨거든. 정확하게는 생각이.”
“헤에.”
서조운이 눈을 빛냈다.
묘하게 궁금증을 자극해서였다.
“아마 사부님께서도 지금 강호를 주유하고 계실 거야.”
“예? 밖으로 나오신 거예요?”
“응. 내가 하산한 뒤에 정리를 좀 하고 바로 내려오신다고 했어.”
“그럼 언젠가는 마주치겠네요?”
“그렇겠지?”
정이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때가 되면 찾아올 게 분명했다.
아니면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고.
“뭔가 낭만적이네요. 사부와 제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다가 어느 순간 마주친다니.”
“그런가?”
“그렇죠. 소설 속에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요.”
“혼나지 않으려면 성실하게 수련해야 해. 평소에는 인자하시지만 가르치실 때는 호랑이로 변하시거든.”
정이륭이 살짝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헤어진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잘 먹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야 반호진 덕분에 돈 걱정 없이 생활하고 있지만 상일기는 달랐다.
“어련히 잘 지내실까.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오신 분이야.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렇겠죠?”
“응.”
반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부가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수련에 매진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형님. 그곳도 왔겠죠?”
“아마도? 사천당가에서 초대장은 보냈겠지. 올지 안 올지는 그쪽에서 결정하는 거지만. 근데 왔을 가능성이 크지.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당가에서 보낸 초대장이기도 하고, 아주 궁금할 테니까.”
“속이 새까맣게 탔겠죠? 알아보고 싶어도 움직일 수도 없고, 은밀히 알아보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요.”
서조운이 키득거렸다.
현재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 가서였다.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괴로워하길 바랐다.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왔을 거야.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다만 이해가 되지 않겠죠. 형님은 물론이고 저희들 전부 다 멀쩡하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보여 줘야지.”
“맞습니다!”
서조운이 크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찰나에 아주 날카롭게 빛났다.
삼 일 동안 이어지는 고희연의 첫 날에 반호진은 일행들과 함께 연회장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처소에 있고 싶었지만 그래도 사천당가까지 왔는데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느냐는 법무의 말에 강제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이왕 온 거 인재나 찾아볼까.’
후기지수들이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우연찮게 발견한 게 선우방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이번도 그러지 않을까 아주 조금 기대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천당가 태상가주의 고희연이니만큼 웬만한 가문과 문파의 후기지수들은 다 왔을 게 분명했다.
“연회장이 엄청 넓네요.”
“성세를 보여 주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니까.”
“사천당가가 이 정도면 남궁세가는 더하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반호진과 함께 연회장에 도착한 서조운이 눈을 크게 떴다.
어제 사천당가와 당가타를 보고도 놀랐지만 연회장은 말 그대로 격이 달랐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겠다는 듯이 꾸며져 있었기에 서조운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우리 가문도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꾸밀 수 있어.”
“근데 유명한 사람들을 이만큼 모으는 건 힘들지 않아요?”
“쳇!”
모용척이 입술을 비틀었다.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서조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실망 말아요, 척 형. 저랑 방이 형, 이륭이 형, 그리고 형님은 갈 테니까요. 특히 형님이 가 주시면 무게감이 확 올라가잖아요.”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에이. 사실을 말한 거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미래도 기약할 수 있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나중에는 달라질 수 있죠. 저만 해도 본가를 그렇게 만들 거고요.”
“이 자리에만 경쟁자가 두 명이나 있네?”
“흐흐흐!”
서조운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연배에 따라 또 갈라지는 모양이네.”
“그러게.”
모용척과 서조운이 티격태격할 때 반호진과 선우방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후기지수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중견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강호에서 명숙으로 인정받는 이들도 군데군데 보였고.
그런데 다들 비슷한 연배끼리 모여 있었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고.”
“구석을 선택할 줄 알았다.”
“원하는 곳이 있으면 다녀와.”
“흐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선우방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연회장에 후기지수들은 많았으나 모여 있는 무리들을 보면 딱 티가 났다.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누어져서 앉아 있는 게 말이다.
오대세가의 자제들은 오대세가끼리, 그 밑에 십대세가에 속하는 이들은 그들끼리 모여 있었다.
거기에 속하지 못하는 군소방파들의 후기지수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있었고.
예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에 선우방은 실소를 흘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의 위치이려나.’
예전이었다면 군소방파나 이름만 명문세가인 자제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앉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들보다 더한 윗줄인 오대세가의 자제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가 아니라 반호진을 향한 거지만 중요한 건 이쪽 자리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청 힐끔거리네요.”
“받아들여. 원래 천재는 뭇 범인들의 관심을 받는 법이야. 대부분이 시샘과 질투지만. 근데 그 질시 어린 시선들을 이겨 내야 진짜 고수가 될 수 있어.”
조금 불편한 듯이 말하는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뻔뻔했다.
그가 한창 유명할 때는 이보다 더한 시선을 받아서였다.
심지어 그때는 나이도 지금보다 어리고 혼자였었다.
“형은 못 이겨 냈었나 보네요?”
“어쭈? 이제는 기어오른다?”
“기어오른다니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한 건데. 비아냥거린 거랑 이죽거리는 거랑은 엄연히 다르다고요.”
“내가 기분이 나쁘면 그게 그거지.”
“허어. 직언하는 충신보다 감언이설하는 간신이 더 좋다는 뜻인가요?”
모용척이 두 눈을 매섭게 떴지만 서조운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모용척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꾸했다.
그 모습에 모용척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오냐오냐해 줬어.”
“에이. 형님이나 방이 형이라면 모를까 형은 아니죠.”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모용척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나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까불기는 해도 아끼는 동생이었다.
그렇기에 모용척은 눈을 부라릴지언정 손을 쓰지는 않았다.
“흐흐흐! 폭력을 쓰면 지는 겁니다. 말싸움에는 말발로 이겨야죠.”
“이륭이나 형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나한테는 왜 그러는 거야?”
“저는 그냥 옳은 말을 하는 것뿐인데요?”
서조운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원인은 모용척에게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말에 모용척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일행들의 반응은 반대였다.
정이륭이나 선우방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르릅.
그리고 반호진은 아이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시비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이며 연회장을 찬찬히 둘러봤다.
상관적이 있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