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장. 괴왕이 별거냐. -04
단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건성건성 말하는 것과 달리 안에 담긴 내용은 날카로웠다.
무조건 반호진의 말대로 될 리는 없겠지만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날 아직 살려 두었다는 건 원하는 게 있다는 거겠지?”
“전혀. 오히려 정반대다. 애초에 난 원하는 게 없었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고 있거든. 단지 사부님께서 시간을 달라고 하셨기에 그걸 받아들인 것뿐.”
꿀꺽!
단위는 느꼈다.
처음 석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반호진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반호진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당신이 원하는 무공. 그거 상관세가에 없거든.”
“뭐, 뭐라고?!”
“애초에 사기를 당했다는 거지. 당신이 그 무공을 십 년 넘게 찾아다닌 거, 다른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걸 내가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고. 다만 그건 알고 가라고. 그래야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할 테니까.”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단위에게는 악마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거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상관세가에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에 단위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날 살려 주면 그곳과 싸우겠다.”
“나를 병신으로 아나? 상관세가랑 은밀히 손잡고 날 노릴 게 뻔한데 놓아 달라고?”
단위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으나 반호진은 오히려 조소를 흘렸다.
박쥐 같은 인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애초에 단위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이용당한 사람은 또 이용당하는 법이었다.
상관세가와 단위를 싸움 붙인다면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반호진에게는 그 결과가 너무나 빤히 보였다.
“너에게도 이득일 텐데?”
“왜 나한테 이득이지? 내가 직접 하면 되는데.”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다른 이들은 그렇겠지. 근데 나는 달라. 내가 살계를 어기지 말아야 하는 스님도 아니고.”
푹.
반호진의 발끝이 단위의 아랫배에 닿았다.
바로 무인에게 있어 제이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단전이 있는 곳이었다.
그와 동시에 단위의 얼굴은 물론이고 목과 손등에 핏줄이 섰다.
눈에 보이는 모든 신체 부위에 핏줄이 일어났던 것이다.
“끄으으으!”
단전에서 시작된 어마어마한 고통에 단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표정을 보면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단전에 있던 공력을 역류시킴과 동시에 아혈을 짚었기에 단위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사지를 비틀며 죽어 갔다.
역대 악인들처럼 단전을 전폐시키고 참선동에 평생 가두어도 되었지만 반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후환거리는 남겨 두지 않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살아 있어 봤자 식량만 축내는 것들은 아예 없애는 게 나았다.
“어쩌면 속가제자가 있는 게 이런 일을 위해서일지도.”
기본적으로 불가의 제자는 살계를 범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속가제자들은 달랐다.
속세에서 살아가는 만큼 십계를 지킬 필요가 없었기에 반호진은 참선동을 관리하는 이를 진산제자가 아닌 속가제자가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속가제자가 이 깊은 산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리가 없겠지만.
똑똑똑.
“들어오너라.”
“예.”
안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담현의 목소리에 반호진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무실 특유의 경전 냄새와 차향이 확 풍겨 왔다.
그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의자 앞에 찻잔이 놓여 있는 걸 보며 반호진은 자리에 앉았다.
“차가 식기 전에 딱 맞춰 왔구나.”
“다시 데운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고.”
담현이 실소를 흘렸다.
괴왕 단위를 처분했음에도 별다른 심정의 변화가 없는 듯해서였다.
고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부동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담현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원하는 것들은 들었느냐?”
“쉽게 입을 열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활한 자이기는 하지. 그래서 정사중간임에도 지금껏 살아 있었던 것이고.”
무림은 단순히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나 세력이 없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게 처세술이었다.
단위는 본신의 실력만큼이나 처세술도 뛰어난 이였다.
“마지막까지 거래를 하려고 하더군요. 자기가 쥐고 있는 패가 쓸모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저에게는 별로 필요치가 않아서.”
“상관세가인 건 확실하느냐?”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나도 알아보마.”
담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의외로 후기지수를 망가뜨리는 일은 빈번했다.
자신의 자식, 혹은 제자를 위해서 미래에 방해가 될 법한 이들을 치우는 것이었다.
치사하고 더러운 짓이지만 그렇기에 효과는 확실했다.
“본사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그래서 개방에 도움을 구할 생각이다.”
“분명 거기까지 생각했을 겁니다.”
“그럴 테지.”
“그래서 저는 하오문과 금가장에도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담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소림사와 개방의 관계가 두텁다지만 상관세가 역시 백도무림에 속해 있는 세력이었다.
그런 만큼 알아보는 데 한계가 있을 게 분명했다.
다툼의 여지가 있다면 중재할 가능성도 높았고.
그러나 금가장과 하오문은 달랐다.
공적으로 엮여 있기는 하겠으나 개방보다는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알아볼 터였다.
“일종의 교차검증이로구나.”
“개방만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솔직히 개방에게는 남의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솔직히 상관세가에서 잡아떼면 거기에서 끝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두 곳에 은밀하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후르릅.
담현이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이번 일을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의 제자인 반호진이 엮인 일이었기에 담현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개방에는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구나.”
“예.”
“처음부터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정확하게는 개방이 나서든 안 나서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판을 보는 게 역시 범상치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더 이상 반호진을 예단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대신 한 가지만 기억해다오. 나는, 그리고 소림은 언제나 너의 편이란 것을. 언제라도 힘들 때는 기대도 된다.”
“알겠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의 품에서 벗어난 제자이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다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게 사부의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느니라.”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도 사부님께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담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 하늘로 훨훨 날아간 제자가 반호진이었다.
그런데 부탁할 게 있다고 하자 담현은 의아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합니다. 소림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사부님의 건강도 같이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께서 건강하셔야 소림 역시 건재할 수 있습니다.”
“허허허. 고마운 말이지만 전부 다 동의하기는 힘들구나. 당장 내가 없더라도 네가 있지 않더냐? 법무도 있고. 사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하단다. 소림의 안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흘리며 담현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아서였다.
반호진과 법무가 잘 성장해 준 것도,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것도 그는 감사하고 기뻤다.
“그래도 이제는 건강을 신경 쓰실 때가 됐습니다. 건강은 아플 때 챙기면 늦는 법이라 했습니다. 오히려 건강하고 아무 문제 없을 때 챙기는 게 가장 좋답니다.”
“그래그래. 알았다.”
진심이 담겨 있는 반호진의 말에 담현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반호진의 말에 얼마나 큰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기에 반호진은 그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에 서조운은 등불 하나를 켜 놓고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침의를 입은 채로 서조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바로 오늘 낮에 있었던 반호진과 단위의 대결을 떠올리면서.
“천하십대고수.”
서조운이 자기도 모르게 곱씹었다.
그러면서 그 무게감에 몸을 떨었다.
천하십대고수.
다른 말로는 무림십왕이라 불리는 이들 중 한 명이 오늘 쓰러졌다.
그것도 반호진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때문에 서조운은 충격과 묘한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벌써 거기까지 올라가셨다니.”
원래부터 존경했던 사람이지만 오늘의 일로 서조운은 더욱 반호진을 경외하게 되었다.
더불어 슬금슬금 올라오던 자만심을 짓누를 수 있었다.
아니, 자만심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겸손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서조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반호진이 이긴 건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중요한 건 왜 단위가 찾아왔느냐였다.
모두가 결과에만 집중하는데 서조운은 이유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심 가는 곳은 세 군데. 그중 형님이 생각하시는 곳은 상관세가.”
서조운이 탁자를 두드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가장 유력한 곳은 상관세가였다.
반호진에게 수모를 당한 만큼 이유도 확실했다.
다만 문제는 상관세가가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 그런데 그걸 형님도, 방장께서도 알고 계시겠지.”
설사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관세가는 명문세가였다.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하지만 십대세가에는 충분히 들어갈 만큼 강호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상당했다.
즉 쉽게 응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상관세가도 그걸 아니까 차도살인지계를 사용한 거겠지. 여기까지 보고.”
서조운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강호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하고 무서운 곳인지 느꼈다.
결국 무림은 약육강식의 절대법칙으로 흘러가는 세계였다.
그러니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했다.
꾸욱.
“……더 강해져야 해.”
만약 반호진이 약했다면 단위에게 처참하게 망가졌을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다른 일행들도 똑같이 당했을 터였다.
상관적이 수모를 당하던 자리에 그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서조운은 자신을 바라보던 단위의 눈빛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나를 지키고, 서가장을 키우고, 형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서조운은 반호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걸 반호진이 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한 실제로 반호진의 우려대로 흘러가는 중이기도 했다.
“더욱 노력해야 해.”
지금까지는 단순히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서조운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불이 켜져 있는 건 서조운의 방만이 아니었다.
다른 방들도 전부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