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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81화 (81/468)

제 29장. 괴왕이 별거냐. -03

묘한 좌절감이 목소리에 서려 있었으나 서조운과 모용척은 그걸 느끼지 못했다.

대신 얼굴과 온몸으로 대경했다는 걸 표현했다.

선우방의 말마따나 괴왕 단위가 저렇게 두들겨 맞고 있는 게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역시 내 형님이 될 자격이 있어. 스무 살의 나이에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을 때려잡다니.”

“말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천하십대고수죠.”

“맞아. 중요한 건 천하십대고수라는 자리를 수십 년 동안 지키고 있다는 거지.”

모용척은 마치 자신이 단위를 패고 있는 것마냥 거들먹거렸다.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평소라면 그 모습에 딴죽을 걸었을 서조운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서조운도 같은 마음이었다.

“꾸에에엑!”

그런 그들의 귓가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단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제압했을 때의 상처 이후로 반호진은 절대 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두 발만 사용했음에도 단위의 전신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휘이이잉!

그때 한줄기 바람과 함께 하나의 신형이 앞마당에 내려섰다.

반호진과 단위의 격돌로 인해 일어난 충격파를 느낀 담현이 달려온 것이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를 흩뿌리며 하늘에서 착지한 담현이 무서운 눈으로 반호진이 있는 쪽을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오셨습니까?”

“허어?”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기는커녕 담담하게 단위를 발로 차서 날려 버리는 제자의 모습에 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의 발 앞으로 날아와 축 늘어진 단위를 내려다봤다.

얼마나 잘근잘근 밟았는지 괴왕이라 불리는 단위가 흰자위만 드러낸 채로 기절해 있었다.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어째서?”

“선배로서 한 수 가르치려고 왔다고 하는데, 단순히 그런 이유로 오지는 않았겠죠?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담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평소에는 인자한 그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칫 잘못했으면 반호진이 재기불능이 되었을지도 몰랐기에 담현은 싸늘한 눈으로 혼절한 단위를 노려봤다.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거래를 하자고 한 걸 보면 배후를 말할 생각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좀 더 나눠 볼까 합니다.”

“대화라.”

담현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자가 말하는 대화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대화가 아님을 알고 있어서였다.

“물론 거래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제가 거래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지. 너에게는 자격도, 명분도 있지. 다만 그 전에 나에게 시간을 좀 줄 수 있겠느냐?”

“사부님께서 대화를 나눠 보시게요?”

“그래. 나도 마침 묻고 싶은 게 있고.”

“알겠습니다. 대신 손을 더럽히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반호진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다.

담현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은원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하는 법이었다.

“여지를 주지 않는구나.”

“굳이 사부님께서 그러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하구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무림에 꼭 필요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명분이 저에게 있기도 하고.”

“그럼 우선 내가 대화를 나눠 보마.”

반호진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미 허락을 했기에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빙그레 웃고는 무형지기로 단위를 들어 올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형님!”

“역시 형님이세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날아가듯이 담현이 단위를 데리고 사라지자 서조운과 모용척이 다가왔다.

두 눈 가득 경외심을 담은 채로 말이다.

그 뒤로 질린 표정의 선우방과 담담한 얼굴의 정이륭이 다가왔다.

“괴왕을 그렇게 쉽게!”

“역시 존경스럽습니다!”

“그것만 느꼈어?”

“어…….”

헐레벌떡 달려왔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서였다.

“저희가 형님의 검격을 제대로 보기에는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해서요. 그냥 대단하다는 것밖에는 느끼지 못했어요.”

말끝을 흐리는 서조운을 대신해 모용척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변명이나 핑계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렇게 느꼈기에 모용척은 솔직하게 말했다.

“잘 봤네. 본다고 단숨에 배우면 그건 말이 안 되지. 나도 그렇고, 다른 고수들도 마찬가지고. 근데 지금 본 게 언젠가는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건 너희들도 가능하다는 거야. 나도 했는데 너희들이라고 못 할 건 없잖아?”

반호진의 말에 모용척과 서조운은 물론이고 조금 뒤에 서 있던 정이륭과 선우방의 두 눈이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동시에 네 사람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응원의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불타올랐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지만 불가능하지도 않겠죠.”

“맞아.”

서조운이 그리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 보면 광역도발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서조운을 비롯해서 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의를 불태웠다.

모두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기에 넷은 반호진과 나란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랐다.

“으음…….”

침음과 함께 단위는 눈을 떴다.

몇십 년 만에 느껴 보는 눈꺼풀의 무거움을 느끼며 단위는 주변을 둘러봤다.

기절함과 동시에 기억은 끊어졌기에 그는 일단 주위부터 살펴봤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석벽뿐이었다.

“동굴인지 석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군.”

“그럴 수밖에. 최대한 인위적인 걸 배제했으니까.”

“응?”

노회하지만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단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낡은 승복을 입고 있는 담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법왕?”

“오랜만이군. 그대를 이렇게 마주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투가 바뀌었군.”

“제자를 노린 무뢰한에게까지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하하하하!”

생소한 담현의 모습이었으나 단위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의한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신의 몸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지혈은 되어 있고. 마혈은 안 짚었군. 자신감인가?’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기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혈은 점혈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지혈만 하고 치료는 안 한 상태이기에 검에 베인 상처는 그대로였으나 중요한 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쯤이면 몸 상태를 확인했겠지.”

“귀신이구만.”

“그게 일반적이니까. 시도하고 싶으면, 시도해도 되네.”

“소림사의 방장이 협박을 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더불어 내 처지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고. 아직 날 살려 두었다는 건 묻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이겠지?”

단위가 편하게 벽에 기댔다.

마치 담현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나 담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지그시 응시하기만 했다.

“이거 이거 눈빛을 보아하니 몸 성히 나가기는 그른 것 같은데.”

“처음부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당연히 했지. 나 괴왕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모양이로군.”

“내가 생각해도 납득이 안 돼.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럴 수가 있지?”

단위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존재가 있는지 이해가 용납이 안 됐다.

현실적으로 반호진의 존재는, 경지는 불가능했다.

“시간을 끌려는 모양인데 그런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흥.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

“체념한 건가?”

“그럴 리가. 지독하게 꼬인 실타래도 결국 풀리듯이 상황이라는 건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

“누가 시켰지?”

담현이 냉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말에 단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가 포로나 마찬가지의 처지라고 하나 그래도 같은 연배에, 같은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는 무인이었다.

거기다 그런 자신을 다른 이의 도구인 것처럼 말하자 단위는 얼굴 가득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말투가 거슬리는데.”

“예우를 기대하는 건가? 그렇다면 천하십대고수로서의 체통을 지켰어야지. 선배로서 후배를 이끌어 주지는 못할망정 제대로 크기도 전에 짓밟으려고 한 주제에 자신은 대우받고 싶은 건가?”

“…….”

신랄한 지적에 단위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누구지?”

“거래를 하고 싶은데.”

“호진의 말대로 여전히 주제파악을 못 하고 있군.”

“궁금하지 않나? 날 죽이면 배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거다. 그곳도 어리석게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테고. 그 정도 머리는 있는 곳이니까.”

상황이 불리한 건 맞았다.

하지만 소림사 입장에서도 그가 필요했다.

증언보다는 증인이 있는 게 훨씬 더 유리해서였다.

더구나 그냥 증인도 아니고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었다.

무게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단위는 바로 그 부분을 믿었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다. 풀어 준다면 다시는 소림사에 얼씬거리지 않겠다. 또한 신룡에게 찾아가는 일도 없을 거다.”

아무런 말도 없는 담현에게 단위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담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표정으로 일관했기에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고통 없이 편안히 죽는 것. 다른 하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것.”

“……우리 좋게 좋게 가자고. 막말로 당한 건 나야! 오히려 사기를 당한 건 나라고!”

단위가 적반하장식으로 나왔다.

되레 큰소리를 치는 모습에 담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말해. 사기를 당한 게 억울하다면 같이 가야지?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가는 건 억울하잖아?”

“…….”

“어차피 나도 알고 호진이도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확실하게 알고 싶을 뿐이야.”

“약속해라. 날 풀어주겠다고.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주겠다.”

절박한 마음을 숨기고서 단위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숱한 위기가 있었으나 그는 결국 그 많은 사선들을 헤쳐 나왔고, 이겨 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스윽.

한데 그의 말이 끝난 순간 담현이 몸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빛이 들어오는 밖을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난데없는 담현의 행동에 단위가 눈을 끔뻑거렸다.

“다시 보네?”

“너는……!”

“난 물론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근데 들은 것보다 더 멍청한데. 자기가 들고 있는 패의 가치를 이렇게나 모를 줄이야.”

까드득!

느릿하게 다가온 반호진의 모습에 단위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처참하게 두들겨 맞던 기억이 머리에, 몸에 남아 있어서였다.

원래는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이었으나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덤비려면 덤벼. 점혈도 안 당했는데. 겸사겸사 고분고분하게 만들 겸.”

꾸욱!

반호진이 도발하듯 말했으나 단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찢어 죽일 듯한 시선으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그러나 고작 눈빛에 겁먹을 반호진이 아니었다.

“사실 난 당신의 배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 말을 해 줘 봤자 확인하는 것밖에는 안 되니까. 당신은 자신의 말이 굉장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과연 그럴까? 상관세가가 마음먹고 부정한다면 헛소리로 치부될 텐데. 그렇다고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을 거 아냐? 상관세가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남겼을 리도 없고. 결국 모든 건 구두로만 이루어졌을 테지.”

“그럼 왜 날 바로 죽이지 않았지?”

“약간의 쓸모는 있으니까. 잡아떼더라도 세인들이 의심은 할 거 아냐? 그것만으로도 상관세가를 압박할 수 있지. 근데 딱 거기까지야. 해 주면 좋지만 안 된다고 해서 나에게 손해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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