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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80화 (80/468)

제 29장. 괴왕이 별거냐. -02

괴왕이 순간 멈춰 섰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괴왕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상관세가에서 받기로 한 거 말이야.”

“……네놈이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지. 나에 대해서 알아봤다면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 텐데?”

괴왕이 마른침을 삼켰다.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후 그는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오만방자하게 산 건 아니었다.

나름 다리를 뻗을 자리를 알아보고 뻗었다.

그렇기에 괴왕은 반호진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반호진의 말대로 소림사를 찾기 전에 따로 알아보았으니까.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고 하나 아직 그가 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괴왕은 반호진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경지에 올라 있으나 반호진은 고작해야 이십 년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

즉 공력을 축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었고, 그걸 본인 스스로가 알기에 공력을 최소한만 사용하고 있었다.

“맞아. 달라지는 건 없지. 내 결정이 달라지는 건 없거든. 다만, 좀 불쌍해서 말이지. 나이도 이제는 적지 않은데.”

“내가?”

괴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 대접을 받기에는 관계가 너무 많이 틀어졌으니까.

그러나 불쌍하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목매고 있으니까. 진짜 가지고 있는지 확인은 해 봤어?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이에게 공증을 받았나? 단순히 상관세가라는 이름만 믿은 건 아닐까?”

“닥쳐라!”

논리정연한 말이었으나 괴왕은 도리어 악을 썼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어리석음 역시 인정하는 꼴이 되어서였다.

동시에 의심이 들었다.

너무나 맞는 말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병신으로 만들면 당신이 과연 멀쩡히 나갈 수 있을까? 후배에게 하는 조언도 조언 나름이지. 방장의 제자에게 폭력을 가했는데 소림사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뭐, 운 좋게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 그런데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상관세가가 그때 도움을 줄까? 내 생각은 아닌데. 어차피 도구는 도구일 뿐이지.”

“…….”

괴왕의 머릿속에 토사구팽이라는 단어가 순간 떠올랐다.

더불어 상관세가주의 야비하고 음흉한 얼굴도.

반호진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확실히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가 아는 상관세가주라면 거짓말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으니까.

꾸욱!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괴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약 반호진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진짜 상관세가주에게 그게 없다면 그는 그냥 쓰고 버리는 패였다.

그와 상관세가주의 은밀히 맺은 거래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잡아떼면 그만이기도 했다.

정사중간에 믿을 만한 뒷배도 없는 그에 반해 상관세가주는 명문세가의 주인이었고, 주위의 인맥도 상당했다.

‘오히려 잡아먹히는 쪽은 나겠지.’

괴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상관세가주를 물고 늘어져도 그가 한 말을 누구도 믿지 않을 터였다.

거기다 상관세가의 영향력은 개방에도 닿아 있었다.

도리어 그가 거짓말쟁이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세력이 없다고 하나 괴왕은 천하십대고수였다.

상대가 제아무리 상관세가라고 해도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제대로 싸운다면 서로 입는 피해가 상당할 테고 그때쯤이면 적당히 타협을 보겠지만 중요한 건 상관세가보다는 그가 더 피해가 클 거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부터 걱정해야겠지만. 죽으면 아무 의미 없잖아?”

스하아앗!

미약한 소성과 함께 괴왕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싸움이 다시 이어지려는 것이었다.

“자, 잠깐만!”

그걸 느낌과 동시에 괴왕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섬뜩한 미소를 지은 채로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예의 가공할 검격이 괴왕의 전신을 노렸다.

처음에는 다리, 그다음에는 팔, 마지막으로 목을.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가 휘두르는 것처럼 별다른 힘이나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데 실상은 달랐다.

하나하나가 그의 사지를 베고도 남을 위력을 품고 있었다.

스극. 슥.

게다가 문제는 베어지는 깊이가 점점 깊어진다는 점이었다.

분명 극성으로 경신술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반호진의 검격은 귀신같이 그를 따라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를 가지고 놀았다.

‘시간을 끌면 돼. 버티고 버티면 결국 제풀에 지쳐 쓰러질 거다.’

겨우 이십 년을 살아온 반호진과 달리 괴왕은 육십오 년을 살았다.

내공을 쌓은 시간만 육십 년이었다.

그러니 순수하게 축적한 양만 따지면 감히 반호진이 비빌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육신은 전성기가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렇다고 급격히 체력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인 법이다.’

도망치기만 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굴욕적이었지만 괴왕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천재들을 마주했었고, 좌절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현재 그보다 강한 무인은 공식적으로 단 아홉 명에 불과했다.

그 많은 이들을 제치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남은 아홉 명도 괴왕은 제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말석이지만 십 년 안에는 최고가 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여기서 짓밟아야 해. 더 이상 크지 못하도록.’

괴왕의 눈동자에 살기가 비쳤다.

처음에는 단순히 선배로서 후배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려고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앞으로 점점 늙어 갈 그와 달리 반호진은 앞으로 더욱더 재능을 만개할 것이기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적어도 이십 년은 제자리걸음을 하도록 말이지.’

괴왕의 두 눈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의 마음을 반호진이 꿰뚫어 보고 있음을 말이다.

“아직도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모양인데.”

서걱.

반호진이 히죽 웃는 순간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괴왕의 신형이 크게 비틀거렸다.

검격에만 신경 쓰는 틈을 타 반호진이 오른발의 뒤꿈치를 베어 버린 것이었다.

“큭!”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애초에 반호진의 검격은 괴왕으로서 막을 수가 없기에 순식간에 양쪽 어깨와 발목이 베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거 안타깝게 되었네. 장기전으로 가서 내 공력이 떨어지길 기다렸던 것 같은데.”

“어, 어떻게?”

“그 정도 잔머리는 딱 보면 나오지.”

으드득!

비아냥거리며 다가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괴왕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언제나 그를 든든히 지켜 주었던 양손과 두 다리는 더 이상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지만 괴왕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해서 싸울 수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전투불능이 되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초월경에 오른 무인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소용없어.”

푸스스스.

괴왕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검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은밀히 날린 무형강기가 소멸하자 괴왕의 눈동자에 절망이 서렸다.

회심의 일격마저 실패하자 좌절한 것이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글쎄. 어떻게 할까나?”

“알고 싶은 게 있지 않나?”

고민하는 투로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괴왕의 두 눈에 기광이 서렸다.

아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미끼를 던졌다.

“상관세가에 관한 것?”

“꼭 그곳이라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무형강기가 실패한 순간 괴왕은 모든 걸 놓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호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어설프게 심기를 건드릴 바에는 차라리 협조적으로 나가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기에 괴왕은 반호진이 가장 알고 싶어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거론했다.

“녹림십팔채라고 우길 생각인가?”

“그곳도 있기는 하지. 근데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적이 제법 많던데?”

괴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부러 혼란을 주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맞아. 그래서 더 알 필요는 없지. 당신이 실패했으니 또 움직일 테고.”

“자, 잠깐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괴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직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만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왜?”

“거래를 하지.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겠어?”

“흐음. 거래라.”

반호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솔깃한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시선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괴왕을 내려다봤다.

“서로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 거래는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인 거래라면 그렇겠지. 근데 지금 우리가 평등한 위치는 아니잖아?”

“크윽!”

반호진의 발이 괴왕의 허벅지 안쪽을 지그시 밟았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위는 아니었으나 체중을 실어서 그런지 고통이 상당했다.

더욱이 근 십 년 이래로 이런 고통과 치욕을 당한 적이 없기에 괴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신은 거래가 아니라 간청을 해야 하는 위치야.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걸 알아서 생각해 내서 말을 해야 하는 입장이지. 그런 다음에 바라는 걸 청해야 하는. 즉,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는 거야.”

“정말, 정말 끝까지 가 보자는 건가?”

“그럴 생각으로 온 거 아닌가?”

“끄으으!”

괴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반박할 수가 없어서였다.

만약 반대 입장이었다면 그는 진즉에 반호진을 반병신으로 만들고 자신에게 지독한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었을 것이었다.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나도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은 없어.”

퍼퍼퍼퍽!

반호진이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했다.

두 손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뒷짐을 지고서 정말 복날에 개 패듯이 괴왕을 짓밟았다.

그 모습에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던 선우방이 입을 쩍 벌렸다.

“형. 대체 저자가 누구인데 그래요?”

“강환을 쉽게 펼치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고수는 아닌 거 같은데.”

멍한 얼굴로 반호진을 지켜보는 선우방을 향해 서조운과 모용척이 물었다.

정이륭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선우방에게 향해 있었다.

“저게 지금 말이 안 되는 광경이야.”

“그 정도로 대단한 고수예요?”

“응. 진짜로. 도왕을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 않아서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저 사람을 저렇게 두들겨 팰 줄이야.”

“그러니까 누군데요?”

서조운이 독촉했다.

그런데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이륭의 눈빛은 서조운, 모용척과 살짝 달랐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놀람과 궁금증이 서려 있는 것에 반해 정이륭은 딱히 놀란 기색은 없었다.

“괴왕(怪王) 단위.”

“예?”

“천하십대고수의 괴왕이라고요?”

선우방의 짧은 한마디에 서조운과 모용척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다시 사정없이 짓밟히고 있는 단위를 쳐다봤던 것이다.

반면에 정이륭은 유일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하십대고수의 위명은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반호진이 꿀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저 광경이.”

“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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