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장. 괴왕이 별거냐. -01
도왕의 칭찬이 완전 헛소리는 아니라는 듯이 반호진은 그의 기세를 느끼고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자 장년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초면 아닌가?”
“맞습니다.”
“근데 어떻게 바로 알아차렸지?”
“회의무복도 그렇고, 풍기는 기도가 말해 주지 않습니까. 거기다 어르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좋은 뜻으로 온 건 아닌 듯하군요.”
반호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일부러 드러낸 기도에서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장년인이 결코 좋은 의도로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님을 말이다.
“눈치도 빠르군.”
“상관세가입니까?”
“허어. 건방지다는 말이 있던데, 영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야. 이렇게 대뜸 떠보다니.”
“숨긴다고 숨겨질 것 같습니까?”
“크하하하!”
바짝 얼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도발을 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장년인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자신을 앞에 두고서 이렇게 도발하는 후기지수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해서였다.
그 어떤 후기지수도, 심지어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후계자들도 자신의 앞에서는 감히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기껏해야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게 전부였는데 반호진은 달랐다.
“무슨 일입니까?”
“누구세요?”
“으음!”
장년인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각자의 방에 있던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심상치 않은 파안대소에 전부 달려 나온 것이었다.
그중 유일하게 장년인을 알아본 선우방이 침음을 흘렸다.
반면에 서조운과 모용척은 삐딱하게 장년인을 노려봤다.
“한 놈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군.”
“단 대협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야 볼 일이 있으니까.”
선우방의 말에 서조운과 모용척, 정이륭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만 듣고는 누구라고 특정 짓기가 어려웠다.
세 사람은 강호 정세에 대해 어둡기도 했고.
“물러나 있어. 나한테 볼일이 있어 온 거니까.”
“……호진아.”
“지켜보기나 해.”
선우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북팽가에서 팽만철과 붙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기에 선우방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방장을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현재 장년인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건 소림사에서 담현뿐이었다.
“듣던 대로 눈치가 빨라.”
“그렇게 사납게 기세를 흩뿌리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사부님께서 오는 걸 원치 않겠죠.”
“맞아. 근데 그것까지 알아챘나?”
“어려운 일은 아니죠.”
“성격은 마음에 드는군. 근데 아쉬워. 그 성격이 오늘 이후로는 보기 힘들 것 같아서.”
파아아앗!
장년인이 기운을 일으켰다.
기막을 펼쳐서 이곳에서 나올 모든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강기들이 충돌하면 후폭풍까지는 막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글쎄요. 제 생각은 다른데 말이죠.”
“미리 말해 두는데,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두 다리가 멀쩡하고 싶다면 말이지.”
장년인의 시선이 반호진을 지나 네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섬뜩했다.
마치 죽일 것처럼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 그 말, 모용세가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이런이런.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난 죽인다고는 말 안 했어. 그리고 꼭 다리가 잘리거나 구멍이 뚫려야만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 그러니 우리 좋게 좋게 가자고. 친분이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잖아? 막말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 녀석을 죽이겠어? 응?”
장년인이 모용척을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그런데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두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기세도 점점 더 사나워졌다.
살기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섬뜩했다.
“나도 모용세가나 선우세가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아. 아, 그렇다고 무서운 건 아냐. 조금 불편해지고, 껄끄러워질 뿐이지. 두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친구들이 있거든. 선우세가의 넌 나에 대해 알고 있으니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습니다. 근데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뭐지?”
장년인이 말해 보라는 듯이 관대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강호에서는 신진고수라 불리며 나름 호사가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하나 그래 봤자 이제 겨우 약관 남짓한 애송이들이었다.
이런 애송이들을 다루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다.
“호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와 본가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서가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용세가 역시 상대해야 할 거요.”
“저와 제 사부님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크하하하!”
겁을 먹고 움츠려들기는커녕 도리어 이빨을 드러내는 넷의 모습에 장년인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도발을 넘어 협박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서인지 장년인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목적은 나일 텐데요.”
“맞아. 근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기어오르려고 하는데 참는 것도 선배의 도리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우선은 나부터 상대하시죠.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도왕의 인정을 받았다고 기고만장하구나. 근데 하북팽가에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데 말이지. 아, 똥개도 제 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을 믿는 건가? 근데 어쩌나? 법왕이 널 구하러 오는 것보다 내 손에 아작이 나는 게 더 빠를 텐데.”
장년인은 흉흉한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말한 대로 죽이지는 않겠으나 대신 반병신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두 눈에 가득했다.
실제로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나 반호진은 살벌한 장년인의 안광에도 오히려 웃었다.
“전 사부님을 믿는 게 아닌데 말이죠.”
“그래?”
“예. 전 언제나 저를 믿었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왜 벌써부터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거지?”
반호진의 말투가 달라졌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완벽한 이형환위가 펼쳐진 것이었다.
하지만 장년인도 만만치 않았다.
“흥!”
육안으로 쫓기 힘든 속도였음에도 장년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호진의 일수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쩌어엉!
맨손과 맨손이 부딪쳤음에도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놀라지 않은 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권장지각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지만 반호진의 진신절기는 누가 뭐래도 검공이었다.
스릉.
그걸 보여 주듯 반호진은 느릿하게 검을 뽑았다.
올 테면 얼마든지 와 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 의미를 장년인은 모르지 않았기에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검이 다 뽑히자 일장을 내질렀다.
웅웅웅웅!
후배이기에 봐주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던 팽만철과 달리 장년인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본신절기를 진심으로 펼쳤다.
반호진의 사지 중 한 곳을 반드시 부러뜨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스윽.
무지막지한 기세로 장강이 쇄도했으나 반호진은 가볍게 피했다.
그런데 장년인의 장강은 여느 강기와는 달랐다.
반호진이 회피하자 그대로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장강이 움직였던 것이다.
“네가 도망칠 곳은 없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장년인이 호언장담했다.
지금의 비무는 단순히 무를 겨루는 게 아니었다.
장년인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고,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첫 수부터 제대로 펼쳤다.
“다행이네. 나도 도망칠 생각이 없었는데.”
히죽 웃은 반호진이 검을 그었다.
검강은커녕 검기도 서리지 않은 검이 단순하게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서걱.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며 반호진의 오른쪽 다리를 박살 낼 듯이 쇄도하던 거대한 장강이 갈라졌다.
마치 두부를 가르듯 너무나 부드럽게 양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극.
장강을 가르고도 힘이 남았는지 한줄기 검풍이 장년인의 가슴팍을 베었다.
정확히 명치가 있는 부분을 얕게 베어 버렸던 것이다.
“……!”
그걸 본 장년인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고작 그 정도에 놀라면 쓰나. 진짜는 지금부터인데. 어디 한 번 잘 피해 보라고. 참고로, 피하지 못하면 잘릴 거야. 넌 날 죽일 수 없지만 난 아니거든.”
스으윽.
너무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반호진이 다시 한번 검을 그었다.
이번에는 종베기가 아니라 횡베기였다.
역시나 그 흔한 검기 하나 서리지 않았지만 반호진의 검이 움직인 순간 장년인은 단전에 있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반호진의 검격을 향해 전부 다 쏟아부었다.
웅웅웅웅!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는 이내 한곳으로 뭉쳐졌다.
압축되고 압축된 강기가 살벌한 소성을 일으키며 반호진을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 죽일 기세로 말이다.
“소용없다니까.”
느긋하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오직 진득한 살기만이 남았으나 반호진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장년인이 그 대단한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괴왕(怪王)이라고 하나 그래 봤자 말석이었다.
또한 수준으로 따지자면 방천문주인 상일기보다도 못했다.
쩌어억!
그 사실을 증명하듯 반호진의 일검은 이번에도 역시 괴왕의 거대한 강환을 반 토막 냈다.
그가 전력을 다한 일격도 너무나 쉽게 갈라 버렸던 것이다.
“신검합일!”
“이제야 알아보면 뭐 해. 이미 늦었는데.”
“마, 말도 안 되는! 어떻게 그 나이에!”
괴왕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워낙에 괴랄하고 괴상한 짓을 자주 하기에 괴왕이라는 별호가 붙었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 험난한 강호에서, 별다른 세력도 없는 그가 살아남았을 리 없었다.
제 마음대로 해도 살아남을 힘이 있었기에 지금껏 살아남고, 괴왕이라 불린 것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지금은 대경한 표정으로 괴성을 질렀다.
그 정도로 그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강호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강하느냐, 약하느냐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흡!”
경악한 괴왕과 달리 반호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가 떠들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대신 느릿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에 괴왕이 황급히 신형을 옮겼다.
스극.
하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극성으로 경신술을 펼쳤음에도 그의 왼쪽 정강이 부분이 갈라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다면 살갗이 아니라 뼈가 베였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저 나이에 벽을 넘을 수 있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괴왕의 얼굴에는 여전히 경악이 서려 있었다.
괴왕이라 불리며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라 불리는 그도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지금의 경지였다.
그런데 그 엄청난 경지를, 천하에서도 공식적으로 열 명 남짓한 정도만이 오른 그 경지에 반호진이 올라 있자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이를 떠나서 벽을 넘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만약 방금 전에 베인 곳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고통이 아니라면 꿈이나 환상이라고 느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다시 한번 쇄도하는 검격이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반호진이 어설프게 그 경지에 발을 들인 게 아니라 확실하게 올라 있다고 말이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이제 와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후회되는 모양이야? 근데 어쩌나. 상관세가에 당신이 원하는 건 없을 텐데.”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