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장. 불청객(不請客). -03
출처를 묻는 오중건을 향해 반호진이 되레 반문했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오중건이라면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떠먹여 줄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모든 걸 할 수 없는 만큼 능력 있는 이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두 곳 중 한 곳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오중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반호진의 예상대로 그는 하오문과 금가장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가짜 정보일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두 곳과 반호진의 관계를 생각하면 거짓 정보를 넘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가 놀라지 않은 겁니다.”
“하긴. 구천문의 행보가 수상쩍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군요. 철혈성에 이어 구천문이라.”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늘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걸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하나 그렇다고 세상에 알릴 수도 없습니다. 괜히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여러 곳에서 들고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오중건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 소식을 듣고 경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을 거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일단 지금 쥐고 있는 게 알려지면 철혈성과 구천문은 더욱더 은밀하게 움직일 게 분명했다.
어쩌면 준비가 안 된 지금을 노리고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렇겠죠. 평화가 길었으니까.”
“……?”
오중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반호진에게서 노회한 무인의 분위기가 느껴져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인 후기지수였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죠. 중원을 정찰한다고 해서 그게 전쟁의 명분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적어도 몇 명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쪽이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똑같이 하면 되지 않습니까?”
“똑같이라.”
오중건이 미간을 좁혔다.
사실 그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동의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괜히 중원에 혼란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알린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개방에 책임을 물을 터였다.
그건 아무리 오중건이라도 부담스러웠다.
“정찰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인력을 따로 배치하지 않고. 오히려 갑자기 인력을 배치하면 두 곳에서 이상함을 느낄 겁니다.”
“그럴 겁니다. 그러니 그 원인에 대해서 알아내려 하겠죠.”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알아 가면 됩니다.”
“본방만 움직이지는 않겠지요?”
오중건은 일부러 두 곳의 명칭을 거론하지 않았다.
서로 알고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교차검증은 필수지요. 다만 오 대협께서 한 가지 알아 두실 게 있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정보 제공은 받습니다만 제가 두 곳을 부리는 건 아닙니다.”
“그렇죠. 선의에 의해 도움을 주는 것이니까요.”
오중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의미로 반호진이 말한 것인지 알아서였다.
그렇다고 반호진이 소림사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기 방장인 법무보다도 무명이 높은 게 반호진이었으나 소림사에서 권한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쪽의 정보력은 개방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핫.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바른 칭찬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평범한 무인도 아니고 반호진에게 인정받은 것이었기에 오중건은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사부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현 중원에서 적어도 소림과 개방은 알고 있는 셈이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알아봐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따로 수고비를 드린 것도 아닌데.”
“수고비라니요. 녹림대군과 대호채를 와해시킨 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저한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중원무림을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오중건이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어서였다.
그 역시 수상하다고 여겼기에 알아봤고, 어떻게 보면 개방과 중원에도 좋은 일이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예 모르고 당할 뻔했으니까.
“대신 오 대협께서 오신다기에 급히 한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비싼 건 아니지만.”
“허어.”
자리에서 일어난 반호진이 방의 한쪽 구석에 보자기로 덮여 있던 것을 드러내자 오중건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죽엽청이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에 그는 이내 헤벌쭉 웃었다.
“전부 다 오 대협의 것입니다. 돈보다는 이걸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물론이지요. 돈은 오히려 안 좋아합니다. 받으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거지가 구걸하는 게 일상이라지만 일정 금액 이상은 뇌물이 되니까요. 하지만 술은 다르죠. 암요! 완전 다르죠!”
오중건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차 커졌다.
흥분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네요.”
“핫핫핫! 이런 선물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예?”
“오 대협과 함께 고생하신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몫까지 준비했습니다.”
오중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번에는 창문을 열었는데 그 밖에는 죽엽청이 그의 키만큼 쌓여 있었다.
거기다 가져가기 편하도록 수레도 있었다.
“저, 저게 다 죽엽청입니까?”
“예. 안주도 준비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혼자 가져가시기 힘드실 것 같아서요. 음식 취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술마다 궁합이 맞는 음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런 쪽에는 아는 게 없어서요.”
“안주는 없어도 됩니다. 정 필요하면 꿩이나 토끼, 들개를 잡으면 되니까요. 중요한 건 술이죠. 암요!”
오중건이 극도로 흥분했다.
방 안에 있는 죽엽청만으로도 행복한데 동료들의 몫까지 신경 써 주자 오중건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마음 같아서는 양손을 잡고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손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기에 그것만은 참았다.
“좋아하시니 저도 기쁘네요.”
“잘 먹겠습니다!”
오중건은 빈말으로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이라면 당연히 거절하는 게 맞았지만 그는 잘 알았다.
반호진의 재정상태가 상당히 좋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오문에 녹림대군의 무공을 팔아서 번 돈이 상당하다는 걸 알기에 오중건은 감사를 표하며 냉큼 받았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말해 주세요.”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넘치도록 많습니다. 오히려 너무 마시면 좋지 않습니다.”
술이라면 죽고 못 사는 개방도가 너무 많으면 좋지 않다고 말하자 반호진은 실소가 나왔다.
그러나 그걸 걸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행복해하니 그걸로 되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옙! 다음에 뵙겠습니다!”
방에 있던 자신의 죽엽청까지 챙겨서 수레를 끌고 가는 오중건의 뒷모습을 반호진은 말없이 지켜봤다.
돈을 제법 쓰기는 했으나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게 먹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었기에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손해는 절대 아니었다.
“개방이 경각심을 가졌으니 앞으로도 계속 신경 쓰겠지. 그럼 이제 남은 건 두 곳인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멀어지는 오중건을 지그시 응시하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선만 오중건에게 향해 있을 뿐 반호진의 머릿속은 두 곳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철혈성과 구천문이 움직이고 있으니 분명 남은 두 곳도 몰래 움직이고 있거나, 혹은 준비 중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생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니까.”
소림사 내부에서 썩어 가는 부분을 말끔히 도려냈고, 개방과 하오문이 새외무림의 움직임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반호진은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썩은 부위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으나 담현과 법무가 이번 일을 겪었으니 당분간은 쉽지 않을 터였다.
“이제 나랑 애들만 잘하면 되네.”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개방에 대한 안배도 해 놓았으니 이제는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이곳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특히 자신에게 말이다.
이번에는 절대 목숨을 희생할 생각이 없었다.
‘한 번이면 족하지. 그리고 나도 이제는 내 인생을 살 자격이 있어.’
죽는 순간 반호진이 떠올렸던 건 딱 한 가지였다.
미련도, 후회도 아닌 억울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삶은 없었기에 이번에는 기필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했다.
‘네 명만 잡으면 돼.’
천하사패의 세력은 하나하나가 전 중원을 상대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나 핵심은 딱 네 명이었다.
금적금왕이라는 말처럼 천하사패의 패주들을 잡을 수 있다면 생각보다 적은 피해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점이었으나 중요한 건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초반에 잡으면 전쟁 역시 빨리 끝낼 수 있어.’
반호진은 네 명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어떻게 보면 그를 과거로 돌려보낸 북해빙궁주를 말이다.
다른 패주들은 몰라도 북해빙궁주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북해빙궁주는 그의 몫이었다.
***
저벅저벅.
회의무복을 입은 평범한 인상의 장년인이 소림사로 향하는 관도를 걸어갔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인상의 장년인이었는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기세가 흘러나오지 않았음에도 앞에 있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길을 비켰다.
‘꼴이 우습게 됐어.’
장년인의 입술이 비틀렸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저쪽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에 장기 말이 될 줄이야.’
정당한 거래라지만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소림사와의 관계가 안 좋아질 게 분명해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년인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어? 저 사람 혹시?”
“뭐야? 아는 사람이야?”
“아닌가? 근데 비슷한데.”
“뭔데 그래? 누군데?”
“근데 저 사람이 소림사에 올 이유가 없는데.”
소림사가 처음이 아니기에 장년인은 익숙하게 방향을 잡고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그걸 본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의무복도 그렇고 얼굴도 그들이 알고 있는 이들과 흡사해서였다.
그러나 직접 장년인을 만났던 이들은 없었기에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군데?”
“방장을 찾으러 왔나?”
주변이 시끄러워졌지만 장년인은 도리어 웃었다.
일부러 알아보라고 대낮에 소림사를 찾은 것이었기에 그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은은하게 기세를 흘리면서.
하지만 법왕은 느낄 수 없도록 조절했다.
작업이 시작되면 마주치겠지만 적어도 시기가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장년인은 딱 필요한 만큼만 기세를 흘렸다.
“어르신이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호오. 나를 아나?”
“강호에서 제일 유명한 열 분 중 한 명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