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장. 오고 가는 정. -02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난희주의 눈빛에 반호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진짜로 기분 나쁜 게 없어서였다.
비영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예의에 어긋나지도 않았기에 반호진은 정말로 언짢은 게 없었다.
만약에 반대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반호진은 비영과 똑같이 행동했을 터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믿을 수 있지만 소림사는 아니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제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도 하고요.”
무림에서 태산북두라 불리는 곳이 소림사였다.
일개 사찰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절이기에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많이 방문했다.
때문에 변수가 많았다.
소림사라고 해서 하오문의 모든 은원 관계에 대해서 아는 건 불가능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난희주는 반호진의 짧은 말에서 그런 의미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욱더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 있던 하오문주가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반호진과 제자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이다.
“여기부터가 외원의 시작입니다. 정확하게는 소림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와.”
사천왕문을 넘어 외원에 도착한 하오문 일행이 입을 살짝 벌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소림사에 도착해서였다.
말은 많이 듣고 구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직접 본 건 처음이었기에 난희주는 물론이고 하오문주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변을 구경했다.
향화객들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렇기에 하오문 일행은 더더욱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저기가 지객당입니다. 소림사를 찾은 손님들께서는 보통 저곳에 머무시지요.”
“소림사 건물 중 제일 큰 거 같아요.”
“아무래도 손님들께서 머무는 곳이니까요. 방문객이 많은 만큼 점점 크게 지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머무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런 건가요?”
“사찰 음식이 입에 맞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네 끼 이상은 드시지 않더라고요.”
난희주와 하오문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히 두 사람은 네 끼라는 말에 주목했다.
즉 하루만 머물고 등봉현으로 내려간다는 뜻이었다.
“인생에서 식도락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맞습니다. 사찰 음식을 경험하는 건 하루면 족하죠. 저기가 대웅전입니다.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중 한 곳이죠.”
“멋지네요.”
반호진은 하오문주의 보폭에 맞춰서 안내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만큼 걷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어서였다.
몸도 불편해 보였고 말이다.
그런데도 하오문주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소림사를 구경했다.
‘아직 마수가 닿지 않은 건가?’
하오문 일행을 안내하면서도 반호진은 하오문주를 예의 주시했다.
지금까지는 하오문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신뢰가 어느 정도 쌓이기는 했으나 원래 관계라는 게 이해득실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믿기는 하되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지켜보면 알겠지.’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의심하지도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서 현재에 집중했다.
괜히 의심해서 좋은 관계가 어그러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손해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만 봤다.
“정말 멋지구나.”
“얘기로 들은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역사가 분위기에 묻어 나온다는 느낌이랄까요?”
“맞아. 정말 그런 것 같아.”
반호진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두 사제는 손을 꼬옥 잡고 감탄을 연발했다.
언제 또 소림사에 올지 몰랐기에 두 사람은 주변의 풍경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특히 하오문주는 이번 소림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또 같이 와요.”
“그럴 수 있을까?”
“아직 사부님의 나이는 한창때인 걸요. 건강을 잘 챙기시면 또 올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오래 살아 달라는 뜻이었기에 하오문주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소림사에 와 본 것만으로도 하오문주는 만족했다.
“꼭 그렇게 되실 거예요. 제가 그리 만들 테니까요.”
“호호호. 천명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란다. 바꿀 수 있는 운명도 있지만, 바꾸지 못하는 운명도 있는 법이야.”
하오문주가 난희주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제자의 마음은 알겠지만 천명은 거스를 수 없었다.
그걸 어기는 순간 역천이 되었다.
그러니 안 되는 것에 매달릴 바에는 바꿀 수 있는 것에 노력하는 게 훨씬 나았다.
‘이 정도 삶이면 충분히 만족스럽지.’
하오문주라고 해서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과욕의 끝을 알고 있었기에 멈출 줄도 알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달려갈 때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볼 때였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건 옆에 있는 난희주의 몫이었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더 이루고 싶구나.’
하오문주의 시선이 절대 스무 살 같지 않은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모두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죠?”
소림사 구경을 끝낸 하오문주 일행은 곧바로 반호진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한 이들을 마주했다.
반면에 네 명의 청년들이 처음인 하오문주는 웃으며 한 명 한 명과 인사했다.
쿠웅! 쿵!
한편 밖에서는 비명을 비롯한 호위무사들이 천막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머물 곳을 직접 짓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인재들이로구나.’
선우방을 비롯해서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과 인사한 하오문주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보기에 네 명 모두 범상치가 않았다.
특히 하오문주는 서조운과 정이륭이 탐이 났다.
선우방과 모용척은 명문세가 출신이기에 조금의 여지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정 공자의 신원이 불문명하지만 반 공자의 성격상 아무 인물이나 데리고 있지는 않을 터.’
자글자글한 주름에 가려진 하오문주의 작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까 전까지는 한 명의 유랑객이었다면 지금은 달랐다.
하오문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해 있는 것이었기에 네 사람을 면밀히 살펴봤다.
“상관세가에서는 별다른 짓 안 합니까?”
“아직은요. 하지만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죠. 근데 괜찮아요. 그때는 제가 드러난 상태라 할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이 좁았지만 지금은 다르니까요.”
걱정해 주는 선우방을 향해 난희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하오문의 힘은 드러나지 않았을 때 제대로 발휘되었다.
상관세가가 대단한 위세를 지닌 명문세가라고 하나 그 힘이 발휘되는 건 정면에서 싸울 때였다.
암중에서의 싸움은 하오문을 따라올 곳이 없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든든한 친구가 있잖아요?”
진심으로 대해 주는 선우방을 일별한 난희주가 해맑게 웃으며 반호진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는 면사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곳에 온 순간 면사를 벗은 것이었다.
“지난번과 관계된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지요.”
“약속하신 거예요?”
“남자의 말은 무거운 법이지요.”
문서로 남기지 않은 대화였으나 난희주는 싱긋 웃었다.
수결을 맺은 백 장의 문서보다 반호진의 한마디가 더 믿을 수 있어서였다.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어요. 서신으로 전달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그리고 다섯 분을 직접 뵙고도 싶었고요.”
“그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만.”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는 하오문주의 행동에 선우방을 비롯해서 서조운과 정이륭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반호진이 전면에 나섰고, 해결한 것도 반호진이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함께 움직인 것밖에 없기에 세 사람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모용척은 평소에도 자아도취에 빠지는 성격답게 일행 중 유일하게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저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정도의 일이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강호에서 하오문의 평판은 그리 썩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더 감사했어요. 편견 없이 본문을 봐 주어서요.”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경과 소속도 중요하지만 그게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또 사회적 위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게 무림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사람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죠. 꼭 강호가 아니더라도요. 근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쉽지 않은 일이고.”
반호진의 말을 들으며 하오문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이상은 음지가 아닌 양지로 나오고 싶지만 하오문의 근간을 생각하면 지난한 것도 사실이었다.
반호진은 바로 그 점을 꼬집었다.
양지로 나오기 위해서는 근간, 즉 하오문의 본질을 바꾸어야 했다.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응원하겠습니다.”
“그래도 반 공자님을 비롯해서 네 분과 같은 이들이 있고, 인연이 닿았다는 게 저는 너무나 감사해요. 아, 저번에 녹림대군의 무공을 판매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금가장에서도 노렸을 텐데.”
“그때는 순수하게 상인의 자세로 거래에 임했습니다. 가장 높은 값을 책정한 곳에 팔았을 뿐입니다.”
“희주라는 존재가 아주 약간은 도움이 되었겠죠?”
짐짓 냉정하게 말하는 반호진을 향해 하오문주가 개구지게 웃었다.
반호진이 나름의 배려를 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반호진은 하오문만 신경 써 주지 않았다.
금호연이 서운해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부정하지는 못하겠네요.”
“그래서 저도 자그마한 선물을 가져왔어요. 아마 소림사에서는 반 공자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거예요.”
“제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거라. 궁금하네요. 어떤 것인지요.”
“묘강의 구천문이 요즘 운남성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원래부터 묘강과 가까우니까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사천성, 귀주성, 광서성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주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에요.”
반호진의 눈빛이 변했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는 개방이나 금가장보다는 하오문이 빠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반호진은 소름이 돋았다.
지금 구천문에 대해서 말을 했다는 건 그가 오중건을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하오문주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추했겠지.’
단둘이서만 대화를 나누었기에 내용을 엿들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의 기막을 뚫고 대화를 엿들 수 있는 강자가 있다면 하오문이 고작 녹림대군의 무공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었다.
“무슨 목적인지는 본문도 파악하지 못했어요. 되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서요.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지요. 구천문의 야욕은 역사가 알려 주기도 하고요.”
“그렇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실패했기에 더더욱 조심스럽게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구천문이 조심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실패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구천문은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그래서 다른 세 곳의 세력과 손을 잡은 것이기도 했고.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크지요.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늘 있던 일이기도 합니다. 구천문이 준동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중원에서 자생하는 독초나 독물을 구하기 위해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도 자세한 이유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다만 반 공자께서 새외무림에 관심이 조금 있으신 것 같아서요. 어쩌면 이게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