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장. 오고 가는 정. -01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내부의 적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장필상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다 자업자득이었다.
장필상이 올바르게 살았다면 이런 일 역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번 일로 계율원 역시 경각심을 가질 테고.”
사람이 사람을 믿는 건 절대 잘못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믿는 건 옳지 않았다.
때로는 확인해야 했고, 그게 계율원의 임무 중 하나였다.
아마 오늘 일로 한동안은 계율원주를 비롯해서 계율원 전체가 바삐 움직일 터였다.
“어차피 하등 도움 안 되는 것들이니 미리 치워 버리면 좋지.”
중간급밖에 안 되는 장필상만 잡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금호연은 그 이상의 거물까지 잡을 수 있도록 증거를 가져왔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예상보다 큰 성과를 얻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
가을이 한층 더 다가왔음을 알려 주듯 나뭇잎들의 색깔이 가지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기다 관도의 양쪽 끝에는 낙엽들이 풍성하게 쌓여 있자 수행원들과 함께 길을 걷던 노파가 눈을 반짝였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중요한 건 장소였다.
그녀로서는 평생 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장소였기에 노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으로 하염없이 주변의 풍경을 구경했다.
“사부님.”
“호호호. 내가 살아생전에 이곳에 올 줄이야.”
“저도 사부님과 이렇게 함께 올 줄은 몰랐어요.”
“마음만 먹으면 오는 거야 힘들지 않지만, 왜 그런 거 있잖니. 괜히 찔리고 불안한 심리. 아마 그래서 역대 문주님들께서도 등봉현에 오지는 못했을 거야. 오지 말라는 사람도 없고, 막는 사람도 없는데.”
오만 가지 감정이 담긴 사부의 목소리에 난희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부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가 가서였다.
사실 난희주 역시 소림사에 들어간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저도 그랬을 것 같아요.”
“아이들은 얼굴에 시름이 한가득이지만 말이다.”
흠칫!
노파의 말에 최소한의 인원으로 두 사람을 호위하고 있던 호위대주가 움찔거렸다.
욕심 같아서는 은신술이 뛰어난 이들로 암중호위를 붙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소림사의 사천왕문을 넘기도 전에 불순분자로 몰려 죄다 붙잡힐 게 분명했다.
아니, 좋게 말해 붙잡히는 거지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때문에 그로서는 지금처럼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호위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소림사는 괜찮아요. 부대주는 크게 긴장 안 하잖아요.”
늘 난희주의 곁을 지키던 부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구파일방이 오대세가였다면 이렇게 직접 방문하는 걸 결사반대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림사는 괜찮았다.
반호진이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이 실수하지 않는 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 역시 희주와 같은 생각이야. 조금이라도 불안했다면 자리를 따로 만들었겠지.”
“다른 무승들은 몰라도 반 공자님은 믿을 수 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노파가 싱긋 웃었다.
난희주의 생각에 동의해서였다.
만약 다른 뜻과 생각이 있었다면 반호진은 거래를 하지도, 그리고 도움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노파는 더욱더 반호진을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선우 공자님과 서 공자님도요.”
“네가 그토록 대단하다던 두 사람도 궁금하구나. 이번에는 모용 공자도 합류했다던데.”
“정 공자님도 범상치 않더라고요.”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떻게 그런 이들만 쏙쏙 골라내서 데려왔을까?”
노파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난희주의 안목 역시 상당했다.
어려서부터 온갖 군상들을 보고, 상대해 왔기에 얻은 능력이었다.
그런 난희주가 직접 만나 본 후에 보고했기에 신뢰도는 확실했다.
“저도 궁금해요. 허황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랬다면 저런 행보를 보여 주지는 않겠지. 야망을 드러냈어도 진즉에 드러냈겠지. 약관의 나이에 무림십왕을 넘보는 무위를 가졌는데.”
사실 노파는 이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에 그녀가 반호진이었다면 최고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준비를 착착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강호유람을 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치? 우리만 그런 게 아니지?”
“네.”
“궁금하구나. 과연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지. 어쩌면 간웅도 되지 못할 그릇일 수도 있고.”
“그 정도 그릇이 녹림대군과 한판 붙을 배짱이 있을까요?”
난희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보기에 반호진의 그릇은 결코 작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짐작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궁금한 거야.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남자인 거지. 너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니까.”
“실력부터 이미 대단하시잖아요.”
“호호. 그렇지. 근데 우리도 향을 피워 볼까? 언제 또 소림사에 올지 알 수 없잖니?”
“사부님께서 하신다면 저도 할게요. 어?”
지팡이가 있었으나 난희주는 사부를 부축했다.
오르막길이다 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지금이야 들뜬 기색 때문에 힘든 걸 못 느끼지만 나중에는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었다.
그걸 우려해 자연스럽게 팔을 붙잡고 부축하는데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니?”
“반 공자님?”
잘 따라오다가 멈춰 서는 난희주의 모습에 노파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어진 제자의 말에 노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호진을 부르는 말에 놀란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예. 이때쯤 올 거 같더라고요.”
놀라서 멈춰 있는 두 사람의 곁으로 반호진이 천천히 내려왔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렇고 실제로는 미끄러지듯이 이동했다.
그 표홀한 움직임에 호위무사들의 눈동자에 감탄과 경외가 떠올랐다.
“반 공자님이 마중을 나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소림사니까요. 등봉현에 한해서는 하오문이나 개방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호호호.”
당연한 걸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에 난희주가 웃었다.
느낌이 거들먹거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였다.
세간에 반호진이 오만하다는 소문이 있는데 난희주가 생각하기에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상대에 따라 대처가 다를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주님.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만나서 영광이에요, 반 공자님. 희주에게서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네요.”
“불편한 것보다는 편한 게 낫지 않습니까. 우선 저를 따라오시죠.”
“마중 나와 주어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반호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하오문주는 달랐다.
그녀는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문도들 대부분이 기생이나, 잡부, 점소이같이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좋게 말하면 이런 직업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지 하오문도들 중에는 잡도둑이나 소매치기들도 많았다.
그래서 하오문도라 하면 무인들은 보통 천대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짜증 나는 건 그게 사실이었기에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반호진의 태도는 여느 무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진짜로 편견이 없구나.’
반호진은 하오문 소속이라고 해서 천시하지 않았다.
또 연장자라고 해서 무조건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의 존중과 예의를 보여 주는 모습에 하오문주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기에 감동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묻는 게 웃기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요. 저희가 지객당에 머물러도 될까요?”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본사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과거에 은원이 있지도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본사에 해를 끼치기 위해 방문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이에요.”
난희주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를 비롯해서 일행들은 절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소림사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오직 반호진을 만나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었기에 다부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아무 문제 없습니다. 따로 별채를 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저에게 그 정도 권한은 없어서요. 아시다시피 제가 속가제자라 별다른 권한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지객당만으로도 충분한걸요. 오히려 소림사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게 저는 신기해요.”
“호호호. 저도 그렇답니다.”
난희주가 손사래를 쳤다.
지객당에 머무는 것에 불만은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하오문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두 사제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래도 방은 이 인실입니다. 호위무사분들이 머물 방과 붙어 있으니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인생에서 소림사 지객당이라니.”
“저도 설레어요, 사부님.”
“호호호.”
“저기…….”
십 대 소녀처럼 들뜬 하오문주와 달리 시종일관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굳어 있던 호위대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다 힘겹게 입을 떼는 모습에 반호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혹 반 대협의 처소 근처에서 머물 수 있을까요? 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방을 요구할 생각도 없고요. 대신 저희가 노숙할 장비를 가지고 있으니 이왕이면 반 대협의 처소 근처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이번 여정의 호위대주이자 무려 사십 년 넘게 하오문주의 그림자로 살아온 호위대주가 간청하듯 말했다.
그간의 세월을 말해 주듯 머리가 이제는 회색빛이 되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젊었을 때와 똑같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안전한 곳을 택했다.
소림사이니만큼 지객당에 머물러도 큰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호위대주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곳에서 가장 안전하게 하오문주와 난희주를 보필하고 싶었다.
“비영(秘影).”
“외람되는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반호진에게 비영이 허리를 숙였다.
거의 정수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말이다.
스으윽.
그러나 비영의 허리는 굽혀지자마자 다시 천천히 들려졌다.
반호진이 무형지기를 이용해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낀 비영이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단순히 무형지기로 공격하는 것보다 이렇게 세밀하게 다루는 게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역시 격이 달라.’
새삼 녹림대군을 때려잡은 고수라는 걸 비영은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반호진은 힘겹게 승리를 따낸 것도 아니었다.
직접 관전한 이의 말에 따르면 녹림대군을 가지고 놀다시피 상대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과대평가되었다고 떠들지만 그를 비롯한 하오문의 핵심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요. 알겠습니다.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지객당 구경은 해야겠죠? 명색이 소림사까지 오셨는데.”
“물론이에요.”
조금은 딱딱해진 분위기에 난희주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면사로 인해 눈웃음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주변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을 확 끌었다.
“가시죠.”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뇨. 충분히 이해합니다. 소림사는 크고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