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73화 (73/468)

제 26장. 청산하자. -03

“무엇이더냐?”

“읽어 봐 주십시오.”

“흐음.”

설명 대신 보면 알 거라는 듯이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깊은 눈동자도 제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뻗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기다린다고 해서 말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일단은 맨 위에 있는 서책을 집어 들었다.

흠칫!

그런데 첫 장을 넘기자마자 담현이 움찔거렸다.

익숙한 이름이 첫 장에서부터 등장해서였다.

하지만 담현은 성급히 반호진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집중한 눈으로 빠르게 책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텁.

순식간에 첫 번째 책을 완독한 담현은 곧바로 두 번째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단숨에 세 번째 책까지 다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담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반호진은 묵묵히 주시했다.

“금가장이더냐?”

“예. 제가 이 공자와 인연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움을 주어서 그런지 이걸 알려 주었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작성하자마자 저에게만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전달되었을 때도 밀봉되어 있었고요. 제가 첫 번째로 봤고, 사부님께서 두 번째로 보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보여 준 건 법무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겠지?”

“아니요. 사부님께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담현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그러나 고민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반호진이 생각하기에는 거물이지만 담현에게는 아니었다.

“네 생각을 들어 보고 싶구나.”

“저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네 의견은 말할 수 있지 않더냐.”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듯이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는 정론에 담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도 고민은 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어째 너에게는 못난 모습만 보이는 거 같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음먹고 하는데 알아내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요.”

“하나 그래도 다 내 탓이다. 내가 무능력하고 부덕한 탓이지.”

“제가 장담컨대 그렇게 생각하는 제자들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잡초에 비유해 뽑아도 또 이런 이들이 나타난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면 더 크고 넓게 자랄 뿐입니다. 잡초가 있다면 보이는 족족 뽑으면 됩니다.”

“시원시원하구나.”

담현이 헛헛하게 웃었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웃지 않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상태이지만 반호진의 말을 듣고 그는 결심했다.

정석대로 가기로 말이다.

“금가장에는 제가 따로 말을 해 두었습니다. 아는 이들도 별로 없을뿐더러 본사의 치부에 대해서 떠드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내 따로 서신을 보내겠다. 이 공자 쪽만 아는 것이겠지?”

“예. 금가장주는 모를 겁니다. 이 공자의 사람도 금가장주의 사람이니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세세하게는 파고들지 않을 겁니다. 굳이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담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금가장주라도 굳이 깊게 파고들지는 않을 터였다.

정보는 분명 힘이 되지만, 그걸 휘두를 때는 상대를 봐 가면서 휘둘러야 했다.

멍청하게 휘두르면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을 수 있었다.

“또 본사의 일은 본사가 처리하는 게 맞지요.”

“쌓은 덕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공자가 금가장주가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가능성은 꽤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막상막하지만 중요한 건 여기까지 상황이 왔다는 것이니까요.”

장남의 이점이 남아 있으나 반호진이 보기에 이미 기세는 금호연에게 넘어가 있었다.

특히 중립을 지키던 이들이 하나둘 금호연에게 포섭되고 있기에 반호진은 정말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무난히 이기지 않을까 예상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하구나. 이왕이면 네가 선택한 쪽이 이겼으면 좋겠고.”

“저도 지켜보는 중입니다.”

“금가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나쁠 건 없지. 나중에 너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반호진이 눈치껏 일어났다.

볼일을 다 봤으니 처소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담현이 서운한 기색을 띠었다.

“용건을 다 봤다 이거지?”

“그런 게 아니라 이제부터 바쁘실 것 같아서요.”

“괜찮다. 설마 도망이라도 치겠느냐? 뒷수습을 하려고 할 때는 이미 다 끝났을 것이다. 심증만 있다면 모를까 이렇게 물증이 있지 않느냐? 지금쯤 움직이고 있을 거다. 그러니 차는 다 마시고 가거라.”

“예.”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반호진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담현의 말을 곱씹었다.

지금쯤 움직이고 있다는 말을 말이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처음부터 결정을 내리셨군.’

천성이 따뜻한 분이지만 그렇다고 우유부단한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냉정해야 할 때는 그 누구보다 냉정한 이가 담현이었고, 소림사의 방장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물론 사제를 잘라 내야 하지만 소림사와 사제 둘을 저울에 올린다면 어디가 더 중요한지는 자명했다.

‘그럴 거라 예상을 하긴 했지만.’

후르릅.

어쩌면 담현보다 더 그를 잘 아는 이가 반호진이었다.

그래서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담현을 찾은 것이기도 했고.

“같이 온 일행들이 대단하더구나.”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기는 하죠.”

“그것도 그렇지만 서로를 향한 정도 상당하더구나.”

“두 명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남은 두 사람을 차별하는 건 좋지 않아.”

정확히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담현은 반호진이 말하는 둘과 나머지 두 명이 누구인지 알았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어도 나름 반호진에 대한 소식은 꾸준히 전해 듣고 있었다.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함께한 시간이 다르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 명은 내가 봐도 놀랄 정도구나. 어디서 이런 이들이 나타났나 싶을 정도로.”

“방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근데 그 아이는 시간이 꽤 필요할 것 같아 보여. 너로 인해 그 시간이 빨라질 수도 있겠지만.”

반호진이 살짝 놀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연륜의 대단함을 느꼈다.

선우방을 한 번 만나 보고 그걸 알아볼 줄은 몰랐기에 반호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모용세가주에게 연락을 받았다. 고맙다고, 그리고 잘 부탁한다고 말이다.”

“저에게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팽가주는 독촉이 엄청 심했고. 근데 그건 네가 신경 쓸 거 없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구나.”

“자주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반호진의 말에 담현이 빙긋 웃었다.

무공만큼이나 눈치도 역시 빨라서였다.

정확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자 담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속한 게다?”

“예.”

“마음 같아서는 얼마나 성장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시간이 없구나. 그러니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자리를 만들어 보자.”

“알겠습니다.”

반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나가도 된다는 말임을 알아들어서였다.

그러다 곧바로 거처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결자해지라는 말처럼 그로 인해 시작된 만큼 끝도 지켜볼 생각이었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내원이 시끄러웠다.

장필상의 비명과도 같은 괴성이 연이어 터져 나와서였다.

하지만 그의 양팔을 붙잡은 계율원(戒律院)의 승려는 묵묵부답이었다.

장필상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부님!”

“너도 소림의 제자라면 조용히 해라. 괜히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하, 하오나!”

계율원주의 나지막한 일갈에 장필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계율원주의 냉엄한 눈빛에는 일말의 자비심이 없었다.

대신 죄인을 쳐다보듯이 서늘한 눈빛으로 장필상을 주시했다.

“놔라! 내 스스로 갈 것이다! 우선 대사형께……!”

“허업!”

점점 가까워지는 노성에 장필상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와는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장로가 계율원의 무승에게 끌려가고 있어서였다.

장필상은 그 모습을 보자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방장을 찾아간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소이다.”

“계율원주!”

“큰소리치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부터 사형은 장로가 아니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기에 작작 좀 하지 그랬소. 횡령에 배임에. 거기에 사기까지. 소림사 장로라는 사람이 무엇이 그리 부족했소?”

계율원주가 혀를 찼다.

아무리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지만 자신들은 승려였다.

무공을 익힌 무승이긴 하나 그렇다고 불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계율원주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놓아라!”

“참선동(參禪洞)으로 끌고 가.”

“예.”

무공을 폐하지는 않았으나 내공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제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한때 장로였던 담우는 양팔이 붙들린 채로 참선동으로 끌려갔다.

형량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담현의 성격을 보건대 일이 년 갇혀 있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시킨 대로 한 것밖에 없습니다!”

담우가 아무런 반항도 못 한 채 끌려가자 먼저 붙잡혀 있던 장필상이 간절하게 소리쳤다.

자신은 진짜 억울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장필상을 향해 계율원주는 담현이 건네준 책자를 던졌다.

한데 그걸 본 장필상이 눈을 껌뻑였다.

“이, 이건?”

“읽어 봐.”

계율원주가 말했지만 장필상은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발 근처에 떨어진 책자가 익숙해서였다.

낯설지 않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장필상은 이내 옆에 서 있는 계율원 무승들의 눈치를 살피며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내용을 살펴봤다.

덜덜덜.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 장필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보는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비롯해 담우와 몇몇 이들이 저지른 비리들이 모조리 책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증거들까지 담겨 있는 모습에 장필상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마,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는 건 네놈이 저지른 일이고. 속가제자 주제에 간도 크더구나.”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방장께서 정하시겠지. 난 그저 네놈을 참선동까지만 데려갈 뿐.”

꿀꺽!

장필상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눈알을 쉴 새 없이 굴렸다.

지은 죄가 명명백백했지만 그래도 그는 억울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데려가.”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

장필상이 간절하게 호소했으나 끌고 가는 무승들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장필상을 양쪽에서 붙잡고 데려가기만 했다.

그 모습을 반호진은 멀리서 지켜봤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천하의 소림사에도 속가제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했다.

장필상은 그걸 알기에 저렇게 눈물, 콧물을 다 빼고 있지만 저 모습조차도 인위적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게다가 그동안 호의호식한 걸 다 털어 내면 장필상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로 쇄신했다고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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