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72화 (72/468)

제 26장. 청산하자. -02

사람의 몸은 강철이 아니었다.

하물며 강철도 수명이 있었다.

한계가 오면 강철도 부러지는데 사람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더 일찍 망가지는 게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용(中庸)이 중요한 법이지.’

법무는 반호진이 오히려 자유시간을 갖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하는 만큼 휴식시간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균형이 맞았다.

어쩌면 반호진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장이 아닌 더 먼 미래, 더 높은 곳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요즘에 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허허. 아냐. 늘 해 오던 일이니까. 혼담이 들어오는 거야 잘난 사제를 둔 사형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또 내가 할 일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돼.”

“별다른 일은 없지요?”

“물론. 평화로운 시기잖아. 그래서 살짝 걱정이 되긴 하는데,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 일단 알았어. 혼담은 보류가 아니라 거절하는 쪽으로 할게.”

법무가 슬슬 담소를 마무리 지었다.

예상하기로 해가 지기 전에는 손님들의 거처가 완성될 것 같지만 중요한 건 다 지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생필품들을 가져다 놓고, 가구도 배치해야 하고, 개인의 짐도 풀어야 하기에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법무는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사제에게 말해 주시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걸 일행들도 알았기에 선우방이 대표로 법무를 향해 합장을 했다.

소림사에 온 만큼 절의 법도를 따른 것이었다.

잠시 후 법무가 나가자 일행들은 그의 예상대로 집을 조립하는 데 손을 거들었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는데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근데 사냥도 해 와야 하지 않아요? 소림사는 사찰이라 고기 음식이 아예 안 나올 텐데.”

“어? 그건 생각 못 했네.”

처음 해 보는 경험에 신나 하던 서조운과 모용척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집을 짓는 것도 일이지만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서 할 일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였다.

소림사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주겠지만 여기 있는 이들 중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익숙한 이는 반호진밖에 없었다.

물론 나물이나 채소볶음, 벽곡단에 익숙해지면 되긴 하지만 일부러 사찰 음식에 적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냥은 내가 해 올게. 익숙한 일이기도 하고. 근데 고기 구워 먹어도 되긴 하는 거야?”

속세를 등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궁벽한 곳에서 생활했던 이가 정이륭이었다.

오히려 마을보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의 생활이 더 익숙했기에 자급자족은 그에게 일상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산짐승을 사냥해서 먹어도 되는지가 궁금했다.

“괜찮아. 만들어서 승려들에게 권하지 않으면. 실제로 속가제자들은 소림사에서 수련할 때 몰래 사슴이나 토끼, 혹은 오리 같은 거 자주 잡아서 구워 먹어. 대놓고 구워 먹지는 않지만.”

“아.”

반호진의 설명에 정이륭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림사의 속가제자인 반호진이 말해 주었기에 정이륭은 안심할 수 있었다.

“대개는 등봉현에 내려가서 먹고 오지만 여기서 해 먹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첫날이기도 하니 사슴 큰 녀석으로 잡아 오겠습니다.”

“그래.”

정이륭이 호기롭게 말하고는 익숙하게 우거진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각자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반호진 역시 각 방에 필요한 세간들을 챙기기 위해 다시 내원으로 향했다.

보통은 새소리가 들리는데 오늘은 달랐다.

이른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 기합성이 들려왔다.

늘 혼자였던 공간에 친구와 동생들이 함께 있자 반호진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결코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무럭무럭 자라 다오. 중원의 평화를 위해서.”

지금 흘리는 일행들의 땀이 나중에는 중원무림을 수호하는 힘이 될 것이었다.

더불어 덧없이 죽어 갈 강호의 영령들을 한 명이라도 줄여 줄 터였다.

물론 지금은 그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겠지만.

툭.

반호진은 아침 일찍 사람을 통해 전해진 서책을 찬찬히 읽었다.

그런데 제법 두꺼운 책은 한 권이 아니었다.

무려 세 권이나 되었는데 반호진은 제목도 없는 책을 찬찬히 훑었다.

“많이도 해 먹었네. 내가 알았던 건 새 발의 피였네? 허어.”

중간중간 탄성인지 탄식인지 구분이 안 가는 소리와 함께 반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구리고 더러워서였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나오자 반호진도 살짝 놀랐다.

“이건, 좀 큰데?”

툭. 툭. 툭.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반호진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아니,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외는 없었다.

똑똑.

“나다. 들어간다.”

그때 불청객이 찾아왔다.

문을 두드린 것과 동시에 자기 할 말만 하고서 문이 벌컥 열렸다.

“보통은 집주인의 허락을 들은 뒤에 문을 열 텐데요.”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건너뛰어도 되잖아?”

“글쎄요. 사형과 제가 ‘우리 사이’라고 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아침부터 까칠하긴.”

대뜸 문을 열고 들어온 장필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얼굴 가득 서렸으나 그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왜 온 겁니까?”

“아무리 내가 연락도 없이 왔다지만 앉자마자 본론이냐? 차도 안 줘?”

“용건만 간단히라는 말이 있지요.”

“여전히 재수 없구나.”

“이렇게 태어났는지라.”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장필상은 뭐라 하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노발대발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명백히 그가 을의 위치였기에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맛만 다셨다.

“뭐야? 이 책들은.”

“연구하는 것들입니다. 장경각에 이상한 책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거 다 쓸모없어. 죄다 소설들이잖아.”

“대부분은 그렇죠.”

장필상은 이내 책상 위에 있던 서책들에게서 관심을 껐다.

거들떠도 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어서였다.

“네가 원하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마. 지금 나랑 누구 좀 만나자.”

“싫습니다.”

“……뭐?”

“싫다고요.”

장필상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 역시 반호진이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금까지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으니까.

하나 세상일이라는 게 꼭 개인의 감정에 의해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너에게도 도움이 되는 자리다. 만나서 나쁠 게 없어. 아니지. 오히려 흔치 않은 기회다.”

“마음만 감사히 받죠.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본사에 돌아왔더니 할 일이 많아서.”

“진짜 아까운 자리다. 내가 널 생각해서 만든 자리야!”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서요. 사부님께서 따로 지시하신 일이라.”

꾸욱!

장필상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탁자 때문에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장필상은 그걸 느끼지도 못했고.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당혹감만 떠올라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나가 주면 될 일이다. 그 정도도 못 해 주냐?”

장필상이 자존심을 굽혔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한 사발 내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호언장담한 게 있어서였다.

세간에는 녹림대군을 쓰러뜨린 무인이지만 자신에게는 그저 사제일 뿐이라고 수많은 이들에게 큰소리 떵떵 쳤었기에 장필상은 무조건 반호진을 데려가야만 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부탁이다.”

장필상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살벌했다.

부탁하는 것과 달리 장필상의 얼굴은 악귀처럼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이만 나가 주시죠.”

“정말, 이렇게 나올 거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여기는 제 처소입니다. 말도 없이 찾아온 건 장 사형이고요. 무턱대고 찾아와서 대뜸 같이 가자고 하면 제가 가야 합니까? 저도 일정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부님께서 지시하신 일정이요.”

반호진의 사부는 바로 소림사의 방장인 담현이었다.

그렇기에 장필상은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로 진짜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 장필상으로서는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이런 부탁을 한 적 있느냐?”

“사룡삼봉이 찾아왔을 때요.”

“…….”

조목조목 말하는 반호진의 행동에 장필상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러나 맞는 말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만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오늘 이 일, 잊지 않을 거다.”

“저는 다를 것 같네요.”

으드득!

처음부터 끝까지 얄밉기 짝이 없는 반호진의 언행에 장필상이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지금껏 참아 왔던 살벌한 안광으로 반호진을 쏘아봤다.

하지만 고작 그런 눈빛에 기죽을 반호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장필상의 눈빛을 받아 냈다.

“아마 장 사형도 그럴 겁니다.”

“흥!”

원하는 걸 얻어 내지 못한 장필상이 신경질을 부리며 방을 나섰다.

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닫고는 밖으로 나가는 장필상의 모습에 반호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 흥분하면 쓰나. 아, 흥분하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려나.”

반호진은 세 권을 책을 챙겼다.

배달은 그에게 되었지만 최종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 역시 처소를 나섰다.

또르륵.

언제나 똑같이 깊고 그윽한 향이 가득한 응접실을 반호진이 찬찬히 둘러봤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 반호진은 이곳이 너무나 반가웠다.

지키고 싶었지만 끝내 지키지 못했던 곳 중에 하나가 이곳이었다.

이제는 오직 그만 기억하는 전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반호진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 네가 나를 찾아왔을까? 돌아온 날 말고는 인사도 안 오던 녀석이.”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르며 담현이 빙그레 웃었다.

말은 나무라는 것 같지만 표정은 달랐다.

반호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좋아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평소에 자주 인사드리기에는 너무 바쁘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제자와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눌 시간은 있다.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느냐?”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됐다. 네게서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니. 다만 가끔씩은 찾아 달라는 말이다. 내게서 배울 게 없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부 아니더냐.”

“아직도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반호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공이라는 게 꼭 자기보다 고수한테서만 배우는 건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반호진은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다.

쌓은 탑의 높이가 같다고 해서 그 안의 내용물까지 같은 건 아니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아직 갈 길이 먼 건 사실이니까요.”

“그 정도로도 부족하더냐? 그렇다면 욕심이 과한 것인데.”

“사람마다 목표는 다 다르니까요. 저는 제 목표를 향해 달릴 뿐입니다. 그보다 이것을 좀 봐 주시겠습니까.”

스윽.

반호진은 바랑에서 챙겨온 세 권을 서책을 꺼냈다.

제목도 없고 막 만들어진 티가 나는 서책에 담현의 눈동자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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