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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71화 (71/468)

제 26장. 청산하자. -01

집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반호진은 단어 선택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손가락을 튕겼다.

소리 없이 지풍을 날렸던 것이다.

털썩!

밤바람 소리에 가려져 날아간 지풍은 정확히 표적에 적중했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게 아니고 우회해서 뒤통수를 타격했기에 은밀히 숨어 이쪽을 지켜보던 흑의복면인은 그대로 절명했다.

제법 은신술이 뛰어난 이였으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참 재미있어. 지난 생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는 비슷했는데 말이지.”

상관적이 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호진은 내심 놀랐다.

전생의 상황이 이번에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였다.

다만 서로의 위치가 정반대였다.

지난 생에서는 난희주가 철혈마녀라 불리며 상관적보다 신분이 윗줄에 있었다.

그렇기에 상관적이 난희주를 노렸었다.

난희주를 품음으로써 신분상승을 꾀했던 것이다.

“뭐, 이번에도 하오문을 홀라당 삼키려는 건 똑같나.”

전생에서는 반호진에게 있어 난희주나 상관적이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둘 다 중원무림을 배반한 건 똑같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미래가 바뀌는 중이었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난희주를 택했다.

“이런다고 한들 거머리 같은 놈이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경고는 되겠지. 지금과 같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반호진을 의심하기는 해도 직접적으로 감히 따지지는 못할 터였다.

묻게 되는 순간 자신이 난희주를 염탐하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될 테니까.

오히려 반호진이나 난희주가 물으면 상관적은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피이잉. 피잉.

그걸 반호진은 오히려 역으로 이용했다.

망설이지 않고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상관적의 수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던 것이다.

어차피 살아 있어 봤자 상관적의 지시로 세상에 해악만 끼칠 것이기에 반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풍을 연거푸 날렸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순수하게 진기만 담아서.

쿵! 쿵!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른 채 바닥에 쓰러지는 이들의 기척을 느끼며 반호진은 삭월을 올려다봤다.

때마침 구름이 다 지나가서 초승달의 모습이 온전히 보였다.

“애들이 얼른 커야 나 대신 일을 할 텐데. 언제쯤이면 제 몫을 해 주려나.”

반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의 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치열하게 사는 건 충분히 해 봤으니 이번 생은 여유를 느끼며 설렁설렁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었기에 반호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곳이 소림사로군요! 저게 숭산이고!”

“딱히 특별한 건 없어. 산은 그냥 산이지.”

이상하게 들뜬 서조운을 향해 반호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명산인 건 인정하나 그렇다고 엄청나게 감탄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냥 산이라니. 숭산은 중원오악 중 하나인데. 당연히 신기해할 수밖에 없지. 나도 처음 숭산을 봤을 때는 감동이었는데.”

“그런가?”

과거가 떠오른 모양인지 선우방이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숭산이었다.

반면에 반호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어렸을 때 사부의 손을 잡고 올라서 그런지 반호진은 딱히 감흥이 없었다.

“저도 숭산은 처음 봐요.”

“나도. 오대세가는 방문했던 기억이 있는데 숭산은 처음이야.”

서조운만큼은 아니지만 정이륭과 모용척도 눈을 반짝이며 숭산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그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소림사를 찾은 향화객들 중 처음 방문하는 이들이 세 사람과 비슷한 표정으로 곳곳에 서 있어서였다.

“앞으로 실컷 볼 테니 이만 들어가자.”

“네!”

동생들이 어느 정도 지켜볼 때까지 기다려 주던 반호진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런데 소림사에 가까워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잘 다녀왔느냐.”

“저도 있어요!”

법무와 정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 반호진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어떻게 제가 오는 걸 아셨습니까?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

“등봉현(登封縣)은 소림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지.”

“하긴.”

따로 정보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적어도 등봉현에서는 소림사가 모르는 건 없었다.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소림사와 크고 작게 연관되어 있기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림의 법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소림의 이대제자 정현입니다!”

반호진을 일별한 법무와 정현이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며 합장했다.

그러자 일행들도 황급히 포권을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우세가의 선우방입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용세가의 모용척입니다.”

“어, 정이륭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문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또 밝힐 이유도 없기에 정이륭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런데 법무는 그런 정이륭의 마음을 헤아린 것인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히 묻지 않았다.

“소림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희야말로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차기 방장이라 할 수 있는 법무가 직접 마중 나와 있자 선우방은 물론이고 동생들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그래서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반호진도 그렇지만 법무 역시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 저녁때 찾아오라고 하셨다.”

“알겠습니다. 그때 제가 인사드리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꼭 찾아가. 사제가 오기를 많이 기다리셨으니까.”

“알겠습니다.”

법무의 말에 모두가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림사에서도 반호진의 모습은 여전한 것 같아서였다.

“일단 짐부터 풀어야겠죠?”

“그래야지. 근데 네가 안내할 필요가 있을까? 내 거처인데.”

반호진이 정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지만 굳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어서였다.

“다 이유가 있지요. 그리고 사백께서 안 계실 때 처소를 청소하고 관리한 사람이 접니다, 저!”

“그래. 눈물 나게 고맙구나.”

“……진심이 전혀 안 느껴지는데요?”

“허어.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말대꾸도 하고.”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정현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누가 봐도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으나 뒤따르던 이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정현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막냇동생처럼 보여서였다.

우지끈! 쿵!

“야! 제대로 들어! 기둥이 삐뚤어졌잖아?”

“누가 조립만 하면 된다고 그랬어?! 맞는 게 하나도 없잖아!”

“소리 지를 시간에 대패질이나 한 번 더 해! 일단 맞추기는 해야 할 거 아냐!”

반호진이 입을 떡 벌렸다.

상상조차 못한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 것이었다.

반면에 정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행분들과 함께 머물기에는 처소가 작잖아요. 그래서 이참에 이대제자들을 동원해서 함께 짓고 있어요.”

“이왕 지을 거면 미리 만들어 놓지. 꼭 이렇게 짓는 과정을 보여 줘야 하냐?”

“그래야 고생했다는 티가 나죠.”

반호진의 구박에도 정현은 되레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당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정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냥 늦어진 거 아냐?”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알지. 그래도 고맙네. 이렇게 신경 써 줘서.”

반호진이 정현의 맨들맨들한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정현이 소매로 인중을 슥 훔쳤다.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사백님이 저희 무공 봐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오셨습니다, 사백님!”

“오랜만이에요!”

뒤늦게 반호진을 발견한 이대제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해 왔다.

혈기왕성함을 온몸으로 발산하면서 말이다.

더해서 짙은 땀 냄새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그 땀 냄새에 반호진 새삼 자신이 소림사에 돌아왔음을 느꼈다.

“앞으로는 이곳도 시끌벅적하겠구나.”

“예전에도 조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현이 녀석이 워낙에 자주 놀러 와서요.”

밖에서 관리감독을 하겠다며 나간 정현을 떠올리며 반호진이 대답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땀을 뻘뻘 흘리며 사형제들과 같이 작업할 가능성이 높았다.

“네 소식은 다 전해 들었다. 아주 큰일을 뻥뻥 터트리더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녹림대군을 잡고 녹림십팔채를 두드려 팬 게 어쩌다가 한 일이라고 하자 법무가 헛웃음을 흘렸다.

일개 후기지수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음에도 반호진은 딱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데 이 모습이 법무에게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담현과 함께 반호진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고.

“그래도 사문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기야 하다만. 대신 나나 사부님이 아주 힘들어졌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딱히 힘들어질 법한 일이 없어서였다.

오히려 소림사의 무명을 드높이면 드높였지.

묵묵히 차를 마시던 일행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반호진과 같은 표정으로 법무를 바라봤다.

“사제가 너무 유명해지니까 여기저기에서 혼담이 들어와. 그중에는 오대세가도 있고. 물론 오대세가의 경우 콧대가 높은 만큼 찔러보는 정도기는 한데, 문제는 다섯 곳이 전부 다 그랬다는 거지.”

“오오!”

“역시.”

서조운은 탄성을 터트렸고 선우방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오대세가에서 그렇게 나올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오히려 둘은 세간의 평가가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했다.

반호진은 고작 오대세가가 판단한 수준의 무인이 아니었다.

“흐음.”

반면에 모용척은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오대세가가 반호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그에게 결코 좋지 않아서였다.

“전부 다 거절하시면 됩니다.”

“정말?”

“제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몰라서 더 난감했던 거 아닙니까?”

“맞아.”

“당장은 누구를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반호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쟁을 앞둔 마당에 안이하게 여자나 만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철혈성의 간자까지 발견한 상태였기에 반호진의 머릿속에 여자는 없었다.

“알았다. 네 뜻이 그러하다는 걸 사부님께도 전달하마.”

“바쁘시면 제가 이따가 찾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뵐 것 같아서 말이다. 근데 좀 아쉽기도 하구나. 사제가 혼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는데.”

“아직 생각 없습니다.”

법무가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가에 귀의한 그는 혼인을 할 수 없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그렇기에 법무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혼인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지금처럼 골라 갈 수 있는 상황은 절대 흔치 않았다.

‘아니지. 사제는 한때라고 보기 힘들지.’

다른 이였다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말했겠지만 반호진은 상황이 좀 달랐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

곧 있으면 겨울이 올 테고 해가 바뀌면 스물한 살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도 천하를 진동시키는 고수 중 한 명이었으나 앞으로 혼담이 더 들어오면 들어왔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았다.

‘사제도 그걸 알 테지.’

누구보다 명석하고 똑똑한 이가 반호진이었다.

예전에는 철이 좀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설렁설렁 사는 것처럼 보여도 무공수련을 할 때만은 독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친 듯이 집중했기에 법무는 더 이상 반호진에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할 때는 한다는 사실을 알기도 하거니와 무공에 대한 집념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서였다.

‘과한 건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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