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70화 (70/468)

제 25장. 주제를 모르면. -03

“이익!”

모멸감 가득한 네 쌍의 눈빛에 상관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나 극도로 흥분했음에도 상관적은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현실은 불가능했다.

그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상관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이 굴욕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상관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살기가 눈동자 밖으로 표출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상관적은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신 나중을 기약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 뒤에 갚아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상관적은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반호진은 물론이고 선우방과 모용척의 가문은 상관세가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은 무조건 참아야 했다.

“사내새끼가 겁도 많네. 그러니 치졸하게 여자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협박하지.”

“말이 심하시오!”

“그쪽의 행동이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래도 나름 예의를 지키는 반호진과 달리 모용척은 아예 대놓고 막나갔다.

변변치 못한 실력으로 가문만 믿고 날뛰는 꼴이 너무나 짜증 나서였다.

백도무림 전체를 먹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모용척은 사나운 눈빛으로 상관적을 노려봤다.

나이는 상관적이 위였으나 강호에서 중요한 건 결국 개개인의 무력이었다.

“모용 공자!”

“정 불만이면 덤벼. 근데 그러지는 못하겠지? 당신 스스로도 알 테니까. 나한테는 안 된다는걸.”

부르르르!

상관적의 전신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대놓고 무시하자 대노한 것이었다.

“모용척.”

“형님.”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내가 나설 일이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죄송합니다.”

상관적을 개무시했던 모용척이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반호진에게는 순한 양이 되는 모습에 난희주가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제삼자이니 본인에게 물어보죠. 난 소저. 상관 소협을 만날 의향이 있습니까?”

“없어요.”

난희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단둘이만 있었다면 이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반호진이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었기에 더는 상관적을, 상관세가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난 소저.”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리는데 앞으로도 제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거예요. 당장은 혼인할 생각도 없고요. 저 이제 열여덟 살밖에 안 됐어요.”

난희주는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꾹꾹 눌러 놓았던 말들을 다 방출했다.

그러고는 정말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상관적의 표정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졌다.

거기에 일행들의 비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다시 붉어졌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도 있는 법이지.”

“그 말 이제는 없어져야 해요. 왜 무식하게 열 번이나 찍어요? 두세 번 시도했다가 까이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그건 너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행동이에요.”

“크하하하!”

선우방과 서조운의 대화에 모용척이 박장대소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웃겨서였다.

의외로 둘이 만담이 잘 맞았기에 모용척은 아예 바닥을 구를 듯이 웃었다.

“흠흠!”

정이륭은 그래도 점잖게 헛기침으로 웃음을 숨기려 했으나 아쉽게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숨기려 했기에 더 티가 났고, 상관적은 수치심에 다시 한번 온몸을 떨었다.

벌떡!

“……충고. 잊지 않겠소.”

“마중은 나가지 않겠습니다.”

“…….”

나름 배려해 주겠다고 말했으나 상관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살벌한 기세를 전신에서 뿜어 대며 방을 나섰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말이다.

“저렇게 하면 누가 겁먹을 줄 아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없는데.”

“근데 그걸 모를걸요?”

“인정.”

서조운과 모용척이 서로를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둘 다 같은 생각이어서였다.

“여기서 머무시는 겁니까?”

“예. 공식적으로 볼일이 있어서요.”

“저자도 머물고 있는 것 같던데요.”

“맞아요.”

이제야 편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듯이 깊게 날숨을 내쉬며 난희주가 대답했다.

반호진의 도움으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잠깐일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건대 며칠이 지나면 다시 은근슬쩍 찾아올 게 분명했다.

“일단 숙소부터 옮기시죠. 저희가 머무는 곳으로. 임시방편이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근데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걸 아셨어요?”

상관적의 모습이 사라지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난희주가 물었다.

정말 이곳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난희주의 표정에는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우굉이가 알려 주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저희가 들어오는 걸 우연히 봤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으니 시선을 끌기도 했을 테고요.”

“그것보다는 반 공자님 때문일 거예요. 본문의 문도들은 전부 다 반 공자님의 얼굴을 알고 있거든요.”

난희주가 싱긋 웃으며 말을 정정했다.

분명 서조운과 모용척이 잘생기긴 했으나 그것 때문에 하오문도가 알아보지는 못했을 터였다.

“수배자가 된 겁니까?”

“그럴 리가요. 오히려 다른 의미로 알고 있는 거죠. 반 공자님께서 본문에 많은 걸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문도들도 다 알거든요.”

“너무 금칠을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정당한 거래였을 뿐인데.”

“오늘과 같은 일에도 선뜻 나서 주었잖아요.”

“같은 남자로서, 또한 백도인으로서 너무 추태를 부렸으니까요.”

반호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네 명이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하오문이 탐이 나도 지켜야 하는 선이라는 게 있었다.

서로 죽고 못 살 정도라면 모르겠으나 지금과 같이 일방적인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백도무림의 후기지수라면 말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다른 분들도 와 주셔서 감사해요.”

난희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반호진과 일행들을 향해 읍을 했다.

진심이 담겨 있는 그녀의 행동에 일행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희야 뭐 한 게 있나요.”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그리고 서로 돕고 살아야죠.”

난희주와 안면이 있는 선우방과 서조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난희주의 마음은 달랐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상관세가와는 사이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걸 감안하고서 와 주었기에 난희주는 정말 고마웠다.

“그래도 도와주신 건 도와주신 것이니까요. 상관세가와 껄끄러워지실 텐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우세가와 서가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까요.”

“하긴. 반 공자님을 감당하기도 조금 벅차긴 하겠네요.”

난희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우세가가 명문세가라고 하나 소림사에 비할 바는 못 됐다.

하지만 난희주는 상관적이 물러난 가장 큰 이유는 소림사도 선우세가도 아닌 반호진이라고 생각했다.

후기지수이면서 후기지수가 아닌 게 반호진이었기에 상관적으로서는 상대하기가 두려웠을 터였다.

“호진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말도 틀리진 않죠.”

“우리 형님이 왜요?”

“맞습니다.”

같은 편이었던 선우방과 서조운이 갈라섰다.

인정할 수 없는 말에 서조운이 부정했고, 모용척이 거기에 동조했다.

순식간에 분열해서 다툴 것 같은 모습에 난희주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웃었다.

저런 모습이 정말 친해야지만 나온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결정이 났으니 일단 숙소부터 옮기죠. 상관적의 추이도 지켜볼 겸.”

“네.”

난희주는 활짝 웃으며 문도들에게 지시했다.

그런데 하오문도들도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식경이 채 되기도 전에 모든 짐을 다 챙기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에 반호진 일행은 진심으로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죽 시달렸으면 이랬을까 싶었다.

또르륵.

어둠이 짙게 내린 창밖의 풍경을 보며 난희주는 정말 오랜만에 평온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좋아하는 백호은침까지 함께하자 이곳이 극락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난희주는 지금 마음이 너무나 편했다.

떨어져 있어도 왠지 모르게 시선이 느껴지던 어제의 객잔과 달리 오늘은 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마음이 편안했다.

“친구라.”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백호은침을 한 모금 들이켜며 난희주가 눈을 반짝였다.

이제는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감동은 여전히 그녀에 가슴에 남아 있었다.

여운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때의 감동과 든든함은 난희주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아직 네 분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확실히 가까워진 거겠지?”

난희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도 알았다.

반호진이 선우방과 서조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가능성은 있어.”

일단 단순한 거래 관계인 건 아니었다.

그걸 난희주는 느꼈다.

물론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지워 두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건 반호진이 그녀를 직접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반호진은 그렇지 않았다.

“친구. 친구라.”

너무나 흔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격렬하게 뛰는 게 아니라 잔잔하면서도 깊게 박동하는 느낌에 난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왼손으로 앞섶을 쥐었다.

동시에 그녀는 아쉬움을 느꼈다.

친구도 좋지만 이왕이면 그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었다.

“원래의 계획이 그것이기도 했고.”

난희주가 접근한 가장 큰 이유는 반호진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장차 천하를 진동시킬 고수가 될 게 분명했기에 하오문주는 그녀와 반호진이 맺어지길 바랐다.

하오문의 숙원을 반호진이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반호진의 실력은 훨씬 더 뛰어났기에 난희주는 물론이고 하오문주도 반쯤은 포기했었다.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아니, 적어도 난희주는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가장 앞서 있는 건 확실해.”

연인에서 친구가 되는 건 힘들지만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경우는 주변에서 의외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희대의 명언도 있지 않던가.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말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지금처럼 차근차근 나아가면 돼.”

여자도 그렇지만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급진적으로 다가가면 남자도 부담을 느꼈다.

그걸 잘 알기에 난희주는 절대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휘이이잉.

이제는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끼며 반호진은 별채의 지붕에 앉았다.

초승달에 구름도 많아서 그런지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에게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는 데 있어 어둠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서였다.

“역시라고 해야 하나.”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이었기에 불이 켜져 있는 민가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고요한 야밤에 반호진은 혼자 지붕에 앉아서 어느 한 곳을 주시했다.

예상을 눈곱만큼도 벗어나지 않는 움직임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뭐, 이리 나와 주면 나야 고맙지만.”

피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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