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장. 주제를 모르면. -02
난희주는 새하얀 섬섬옥수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인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두통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럴 때는 차를 음미하며 잠깐 쉬어 주는 게 좋습니다. 결국 두통이라는 건 머리를 과도하게 사용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요. 제가 듣기로 요즘에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주이시니 업무가 당연히 많겠지만 그래도 과로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특히나 수면은 피부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여자 못지않게 새하얀 피부를 가진 미청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난희주에게는 저 미소가 요사스럽게 보였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제 두통이 누구 때문에 발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업무 때문이지 않습니까?”
상관세가의 소가주이자 요 몇 달 동안 그녀를 대놓고 괴롭힌 상관적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난희주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업무는 늘 있던 것이었어요.”
“흐음. 그럼 무엇 때문일까요. 만약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상관적이 진짜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아니, 시치미를 떼는 것을 넘어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기도 했다.
그게 난희주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알면서 저딴 소리를 지껄인다는 걸 알아서였다.
“다행히 도와주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요?”
“하하! 그것 참 다행이군요.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제가 이래 보여도 나름 능력이 괜찮습니다. 머지않아 상관세가가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상관적이 끝까지 모르쇠를 하며 말을 돌렸다.
뜬금없이 호언장담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상관적의 모습을 난희주는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꺼지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후우!”
대신 난희주는 티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만 떠들고 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그런 난희주의 모습에도 상관적은 실실 웃었다.
‘답답하겠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후후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난희주를 지켜보며 상관적이 키득거렸다.
굳이 듣지 않아도 난희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는 알았다.
하나 그렇기에 끝까지 모른 척했다.
난희주라는 대물을 낚아 올리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상관적의 두 눈이 교활하게 번뜩였다.
마치 독사와 같은 분위기가 창졸간에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희주를 손아귀에 넣기 전까지는 순수청년을 연기할 필요가 있었기에 상관적은 해맑게 웃었다.
‘결국 넌 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은 체면 때문에 집요하게 매달리지 못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오히려 상관적은 그런 이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발견했음에도 잡지 않아서였다.
하오문의 소문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개방 못지않은 정보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하오문은 중원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자금력 역시 어마어마했다.
그런 황금 알을 발견했는데 가만히 놔두는 건 어리석은 걸 넘어 병신 같은 짓이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했다.
‘거기다 얼마 전 녹림대군의 무공도 손에 넣었다고 하니 더더욱 놓칠 수 없지.’
상관적은 자기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천운이 닿았다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난희주가 하오문의 소문주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이런 기회를 멍청하게 날렸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 그는 난희주를 만난 걸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준 거지. 세상에 우뚝 서라고.’
물론 난희주 한 명만으로 당장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오문의 정보력과 자금력이라면 본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었다.
게다가 난희주의 미모가 삼봉과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상관적을 더욱 흡족케 했다.
그리고 난희주와 혼인을 한다고 해서 꼭 정실의 자리를 줄 필요는 없었다.
‘두 번째면 충분하지.’
하오문의 소문주라고 하나 난희주의 출신은 별 볼일 없었다.
막말로 뒷골목 출신이었기에 상관세가를 지원한 공로가 있다고 해도 정실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두 번째 자리는 줄 수 있다고 상관적은 생각했다.
‘지금은 가시가 바짝 서 있지만, 글쎄. 과연 언제까지 가시를 세울 수 있을까. 네년은 결국 나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어.’
상관적은 자신했다.
하오문이 상승절학을 수집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중원무림의 음지가 아닌 양지로 나오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지금처럼 그저 그런 세력이 아닌 강대한 무력을 지닌 무림세력으로 말이다.
‘자, 그러니 내 손을 잡아.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이루게 해 주지. 물론 내가 원하는 것부터 이룬 다음에 도와주겠지만.’
속내를 감추고서 상관적은 싱긋 웃었다.
지금은 앙칼지게 튕기지만 결국 난희주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상관적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또르륵.
한데 상관적은 몰랐다.
그의 음흉한 생각을 난희주가 진즉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가식 가득한 미소를 방긋방긋 짓고 있는 상관적을 일별한 난희주가 연신 차를 따랐다.
답답한 마음에 목이 타서였다.
‘하아. 마음 같아서는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고 싶지만…….’
난희주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상관세가가 오대세가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나 그래도 무림의 명문세가였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상관세가뿐만 아니라 다른 명문세가와도 싸워야 했기에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집요한 새끼.’
난희주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상관세가 하나만 상대해야 한다면 하오문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기에 난희주는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따로 미행을 붙여 둔 것인지 그녀가 어디를 가든 다음 날에 상관적이 나타났다.
어쭙잖게도 우연을 가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난희주는 딱히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말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보통의 명문세가 자제였다면 적당히 말귀를 알아듣거나, 혹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알아서 떨어져 나갔을 텐데 상관적은 그러지 않았다.
능글맞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거머리처럼 달라붙었기에 난희주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누가 좀 저 재수 없는 상판대기 좀 치워 줬으면 좋겠다.’
난희주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싫은 티를 대놓고 팍팍 내었으나 상관적은 본체만체했다.
똑똑똑.
“아가씨. 우굉이가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그때 시비가 문을 두드렸다.
왠지 모르게 살짝 들뜬 기세로 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상관적은 거슬렸다.
비록 초대를 받고 온 건 아니지만 엄연히 그 역시 손님인데도 시비가 다른 손님이 왔다고 알리자 상관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손님? 누구?”
“반 공자님과 일행분들이 오셨습니다.”
“반 공자님이?!”
난희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정도로 그녀는 놀랐다.
여기에서 반호진을 만날 줄은 몰라서였다.
반면에 상관적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짙게 떠올랐다.
“어떻게 할까요?”
“바로 모셔!”
“네!”
이런 걸 왜 묻냐는 듯이 큰 목소리로 지시하는 난희주의 모습에 상관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체 반 공자가 누구기에 난희주가 이렇게나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못마땅함이 짙게 서려 있었다.
공자님이라는 말은 찾아온 손님이 남자라는 걸 뜻했기에 상관적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띠었다.
끼이익.
그러나 난희주는 상관적이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방문 앞까지 쪼르르 달려갔다.
지금껏 상관적이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면서 말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반 공자님! 선우 공자님, 서 공자님도 오랜만이에요!”
“갑자기 찾아와서 싫어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반 공자님은 언제라도 환영이에요.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하던 난희주가 눈을 반짝였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두 명이나 있어서였다.
“모용세가의 모용척이오.”
“처음 뵙겠습니다. 정이륭이라고 합니다.”
호기심이 가득한 난희주와 달리 모용척은 누가 봐도 경계하는 기색으로 인사했다.
하오문의 소문주이기도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난희주가 미녀이자 모용척은 반사적으로 경계했다.
반면에 정이륭은 정중하게 난희주를 향해 포권했다.
“아, 인사가 늦었어요. 하오문의 난희주라고 해요.”
한때는 요녕성을 넘어 중원에서도 천재로 이름 높았던 모용척의 등장에 난희주가 속으로 살짝 놀랐다.
설마하니 반호진의 새로운 일행에 모용척이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게다가 정이륭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일단 반호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정이륭은 특별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에.”
상관적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상관세가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난희주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반호진이 왔다는 말에 사실 그녀는 이상하게 든든했다.
오빠는 없지만 마치 오빠가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상한 사람이 계속 따라다니며 치근덕거린다면서요?”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인가?!”
점점 더 도를 넘어가는 발언에 상관적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반호진의 나이가 그보다 어렸음에도 하대를 하지는 못했다.
연배는 그보다 어릴지 몰라도 강호에서의 명성은 비교불가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상관적은 차마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꼭 그쪽을 향해서 한 말은 아닌데, 상황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남자로서 구애하는 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나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데 그걸 넘지 않았습니까?”
“이건 나와 난 소저의 일이오. 반 소협이 끼어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존대와 하대를 넘나들었으나 상관적은 차마 그걸 지적할 수 없었다.
그걸 지적하는 순간 자신이 소인배가 되어서였다.
대인배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이 자리에서 속 좁은 남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죠. 남녀사이의 문제는 두 사람이 푸는 게 맞지요. 제삼자는 끼어들 자격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반호진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난희주를 쳐다봤다.
“친구가 도움을 청한다면 말이 달라지지요.”
“도와주세요.”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희주가 입을 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상관적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이제는 상황이 또 달라졌군요.”
“난 소저!”
“소리는 지르지 마시고.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거라면 최소한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정상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도요.”
“쯧쯧!”
반호진이 매서운 눈빛으로 상관적을 응시했다.
그러자 선우방과 서조운이 동조했고, 모용척은 혀를 찼다.
남자 망신은 다 시킨다고 생각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