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장. 주제를 모르면. -01
정이륭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순간적으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였다.
그래서 정이륭은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이제는 너도 견문을 넓힐 때가 되었지. 속세를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얻는 것도 분명히 있다. 나도 그걸 모르지 않았는데 오래 살다 보니 까먹은 모양이다. 어쩌면 너무 나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이륭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있어 상일기는 사부이자 부모였다.
굶어 죽어 가던 그를 살려 준 것도 상일기였고, 지금처럼 무공을 가르쳐 주고 키워 준 것 역시 눈앞에 있는 상일기였다.
상일기가 아니었다면 그는 길거리에서 죽었을 것이기에 정이륭은 지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반 소협 일행과 함께 하산하라는 것이다. 세상을 직접 보고 느끼면 분명 얻는 게 있을 것이다. 혹 하산하는 게 싫은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부님이 걱정됩니다.”
“허허허. 내 나이가 적지 않기는 하나 그렇다고 오늘내일할 정도로 많은 건 아니다. 그리고 말했지 않느냐. 먼저 내려가라고.”
“그 말씀은?”
정이륭의 동공이 커졌다.
뒤늦게 상일기의 말을 이해한 것이었다.
“반 소협과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게 많았다. 그래서 나 역시 중원을 둘러볼 생각이다.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말이지.”
“적당한 때가 되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어떻게?”
“어, 반 형님께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느새 반호진을 아무렇지 않게 형님이라 부르는 제자의 모습에 상일기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서 새삼 느꼈다.
어려서부터 함께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이륭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반대로 내가 찾아가도 되고. 그러니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언제, 어느 순간 내가 찾아가서 확인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폐 끼치지 말고.”
“예.”
상일기가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듯 말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정이륭이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하고 노력할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수행의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반호진의 등장은 정이륭에게도 충격이었겠지만 상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관의 나이에 저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이 있다는 걸 상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무림의 역사에서도 손꼽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무인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이고, 상일기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뒤흔들렸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무인이다. 그리고…….’
상일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단순히 강자와 비무하기 위해 반호진은 그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비무가 목적인 건 맞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반호진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상일기는 느꼈다.
‘분명 그리는 그림이 있어.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그 나이에, 그렇게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음에도 반호진은 눈곱만큼도 자만하지 않았다.
그게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자만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상일기는 이번 강호행에서 그것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근데 형님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그때 정이륭의 목소리가 상념에서 그를 끄집어냈다.
걱정 가득한 제자의 목소리에 상일기가 옅게 웃었다.
“자격이 충분하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구나.”
“자격요?”
“지금 반 소협과 함께 있는 일행들을 보거라.”
“아.”
“선우 공자가 지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것이다. 원래 크고 높은 탑일수록 토대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거든.”
정이륭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상일기가 말했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일기는 단박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긴. 반 형님 성격상 아무 이유 없이 함께 다니지는 않겠죠.”
“정확히 봤구나. 그렇다고 또 급이 맞아야지만 어울리는 건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사부님께서 그렇게 말해 주시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만 넘어가거라. 내일 출발하려면 준비해야 할 게 은근히 많을 테니.”
“안녕히 주무세요.”
자연스러운 축객령에 정이륭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너도 잘 자거라.”
“네.”
정이륭을 배웅한 상일기는 깊은 눈으로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
제자와 달리 그는 내일 당장 떠나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오랫동안 머문 집을 떠날 거라 생각하자 심사가 복잡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으아아! 객잔이다, 객잔!”
마을에 들어오기 무섭게 가장 큰 객잔을 찾은 모용척이 만세를 하듯 두 팔을 활짝 들어 올렸다.
드디어 길고 긴 노숙이 끝났음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전 노숙도 재미있었는데.”
“재미보다는 편한 게 좋지.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 주는 음식이라는 말도 몰라?”
“제 요리가 맛이 없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서조운이 모용척을 째려봤다.
어째 그의 요리를 돌려 까는 것 같아서였다.
“너뿐만이 아니라 내 요리도 까는 것 같은데?”
“에이. 그럴 리가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맛이 없었으면 제가 먹었겠습니까?”
선우방까지 합세하자 모용척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먹어야 하니까. 수련을 위해서라도 적정량의 식사는 필수이기도 하고.”
“자자, 들어가시죠. 일단 방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마을에도 왔으니 필요한 것들도 사야 하고. 일정이 아주 많습니다.”
모용척이 너스레를 떨며 앞장서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장 비싼 별채를 잡았다.
경비가 풍족하다는 걸 알았기에 모용척의 주문에는 거침이 없었다.
“어? 별채요? 어차피 하룻밤만 머물 건데 굳이 별채를 잡을 필요가 있을까요?”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데, 그럴 필요 없어.”
“맞아요. 우리 형님은 물론이고 선우 형이나 저나 돈이 꽤 많거든요. 당장 저 형만 보더라도 모용세가의 소가주잖아요.”
쭈뼛거리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정이륭을 향해 선우방과 서조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이륭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래도 낭비는 가급적 피하는 게.”
“괜찮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또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리 별채에 따로 머무는 게 나아. 우리가 잠만 잘 건 아니잖아?”
“그렇죠.”
“그런 것들을 따지면 이쪽이 더 이득이야.”
정이륭은 이내 수긍했다.
들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일행들을 둘러보니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저녁에 뭐 먹을지나 고민해. 모처럼 객잔에 왔는데 맛있는 걸 먹어 봐야지?”
“네.”
반호진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자 정이륭도 이내 웃었다.
“저, 저기…….”
“응?”
처음 온 곳임에도 자연스럽게 점소이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하는 모용척을 지켜보는데 누군가가 반호진에게 다가왔다.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반호진의 두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반 대협.”
“너는 하오문에서 온 아이구나.”
“네.”
“따라오너라.”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알고 있자 반호진은 단박에 눈치챘다.
남자아이가 어디 소속인지 말이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망설임 없이 남자아이를 데리고 별채로 들어갔다.
“하오문에서 찾아올 일이 있나?”
“금가장에서 헤어진 후로 따로 연락 온 건 없지 않아요?”
“내가 알기로는. 근데 또 모르지. 호진이가 우리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을지도.”
자리에 앉으며 선우방과 서조운이 말을 주고받았다.
모용척이나 정이륭과는 달리 두 사람은 난희주와도 만났었기에 아이가 하오문도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너도 앉아.”
“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우리도 똑같은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편히 말하렴.”
“어…….”
반호진의 말에도 남자아이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편히 말하라고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서였다.
현재 강호에서 무명이 쟁쟁한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반호진이었기에 남자아이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천천히 말해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저희 소문주님을 도와주세요.”
앞뒤 다 자르고 진짜 핵심만 말하는 남자아이의 모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일행들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설명 없이 대뜸 도와달라고 하자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못 알아들어. 자초지종을 설명해 줘야지.”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무슨 일인데?”
“그게, 그러니까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던 남자아이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물꼬를 트자 남자아이는 난희주가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깔끔하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상관세가의 망나니가 난 소저에게 집적거리고 있다는 거잖아?”
“예. 근데 상황이 많이 난감해요. 상관세가가 오대세가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십대세가에는 충분히 들어가는 곳이니까요.”
“흐음. 근데 말이지. 네가 날 찾아온 걸 난 소저도 아니?”
반호진의 말에 남자아이가 시선을 피했다.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반호진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말 도움이 필요했으면 난 소저가 먼저 찾아왔을 것 같은데.”
“아, 아직 모르실 거예요. 요즘에 진짜 정신없이 바쁘셔서요. 저도 운 좋게 반 대협을 본 거라서. 아마 제가 제일 먼저 반 대협을 발견했을 거예요.”
툭. 툭. 툭.
남자아이가 다급히 말을 이었으나 반호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난희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알겠으나 문제는 그녀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괜한 참견이 될 수도 있었다.
‘괜히 철혈마녀라 불린 게 아니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덜 여물었겠지만 그래도 그 성미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지.’
반호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실 어느 쪽을 택하든 반호진으로서는 잃을 게 없었다.
“어떡할 거야?”
“근처에 있다니까 한번 만나 볼까?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걸 알면 난 소저 쪽에서 찾아올 것 같기는 한데.”
“늘 그랬으니까.”
선우방이 과거를 회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가장을 찾았을 당시에 그는 없었지만 금가장에서는 반호진과 함께 난희주를 봤었다.
그렇기에 선우방은 난희주가 반호진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면 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저희가 가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난 소저의 일인데.”
“넌 난 소저를 다시 보고 싶어서 그렇지?”
“에이.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저 그렇게 가벼운 남자 아닙니다. 나름 친분이 있는 사이인데 사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꼭 도와주지 않더라도 인사는 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우연히 만났는데.”
서조운이 절대 흑심이나 사심은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찾아가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기도 하고 말이지.”
“저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반 형님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선우방과 정이륭이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가, 감사합니다!”
반호진의 결정에 남자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없었으나 그래도 난희주를 만나러 가 주는 것만으로도 남자아이는 기뻤다.
반호진 일행이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억제력이 발휘될 게 분명해서였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상관세가의 망나니도 반호진 앞에서는 얌전해질 터였다.
“안내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