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은룡(隱龍)들. -04
회피할 공간 자체를 두지 않는 검해에 상일기가 주먹을 내질렀다.
피할 수 없다고 해서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공간이 없다면 만들면 되었다.
그걸 증명하듯 상일기의 주먹에서 일어난 권강이 반호진의 검해를 강타했다.
끄그그극!
하나 반호진의 검해는 견고했다.
이 정도의 위력에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듯이 상일기의 권강을 버텨 냈다.
“흐읍!”
그 모습에 상일기가 공력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검해를 걷어 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다시 한번 정면승부를 걸었다.
웅웅웅
그런데 공력을 더욱더 끌어올리는 것과 달리 상일기의 권강은 서서히 작아졌다.
사방을 뒤덮고 있는 반호진의 검해를 부수기 위해서는 그에 못지않은 크기를 가져야 할 텐데 오히려 상일기의 권강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그러나 풍기는 기운은 달랐다.
“강환이다!”
“정확하게는 권환(拳環)이라고 해야겠지.”
초절정고수의 상징이자 초월경의 경지를 눈앞에 둔 무인만 완성할 수 있다는 강환의 등장에 비무를 지켜보던 모두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검해도 대단하지만 역시 순수하게 위력만 따지자면 강환에 비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상일기의 권환은 단 한 방에 검해를 뒤흔들었다.
꽈과과광!
가공할 기운의 충돌에 폭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뒤흔들렸다.
하지만 아직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상일기가 권환을 시전하자 반호진 역시 질 수 없다는 듯이 검환을 일으켰다.
그러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꽈아앙!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상일기가 권환을 하나 더 생성했던 것이다.
손이 두 개이니 권환도 두 개라는 듯이 상일기는 뒤이어 권환을 하나 더 일으키고는 그대로 반호진을 향해 날렸다.
한데 상일기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은데.’
두 개의 권환을 조종하던 상일기는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들은 반호진이 검환을 생성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는 달랐다.
그가 본 반호진의 경지라면 검환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상일기가 놀란 건 지금 반호진의 모습이 너무나 여유로워서였다.
‘가까스로 유지하는 게 아냐. 그 말은…….’
상일기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초절정 위의 경지는 딱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경지는 오르고 싶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선택받은 이들만 오를 수 있는 경지였고, 그렇기에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이들만 발을 디뎠다.
그런데 그 경지에 반호진이 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강환을 다룰 수 있을 리 없었다.
“생각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많을 수밖에요. 반 소협을 보고 있자니 자꾸 떠오르는 게 있어서요. 더불어 강호의 격언도 같이 떠오르더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상일기가 비무에 집중을 하지 못했기에 반호진은 검을 늘어뜨렸다.
비무를 이어 가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영롱하게 빛나던 검환 역시 안개처럼 흩어졌다.
“실력의 삼 할을 숨겨라.”
“어느 순간에도 전력을 내보이지 말라는 격언이 있기는 하죠. 구명절초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인지 자꾸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근데 놀라운 건 그게 가정이라기보다는 확신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날카로운 눈빛의 상일기를 마주 보며 반호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의뭉스럽게 웃기만 했다.
근데 그게 상일기에게는 확신을 주었다.
저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있어서였다.
“비무는 여기까지 하죠. 더 이상 했다가는 제자의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자고로 적당한 게 좋죠.”
“맞습니다. 과한 충격은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드니까요.”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 드물긴 하죠.”
선문답과도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반호진은 검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비무가 끝난 건 아니었다.
비무라는 게 꼭 몸을 직접적으로 움직여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상일기와 나란히 걸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까아앙! 깡!
반호진과 상일기의 비무가 끝났음에도 공터에서는 연신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선우방과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이 돌아가며 대련을 해서였다.
앞서 이루어졌던 비무가 네 사람의 가슴에 불을 제대로 지폈는지 대련은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 것처럼 넷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매서웠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상일기는 식사 준비를 위해 사냥을 하러 나갔기에 현재 공터에서 짝이 없는 사람은 반호진뿐이었다.
그러나 심심하지는 않았다.
네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해서였다.
특히 반호진은 정이륭과 선우방의 비무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많이 성장했어.”
한 살 어린 정이륭에 밀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림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서였다.
그리고 나이는 어려도 정이륭 역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방천문의 무학까지 이었으니 정이륭이 강한 건 당연했다.
오히려 선방하는 선우방이 놀라운 것이었다.
본래는 나중에 개화했어야 할 선우방이 보다 일찍 알을 깨고 나왔기에 반호진은 방천문을 찾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과거를 비튼 게 미래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거기다 전쟁 도중에 죽었던 서조운이 지금은 살아 있었고, 모용세가가 멸문지화를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모용척이 지난 생보다 훨씬 빠르게 각성했다.
그런 만큼 반호진은 내심 기대했다.
어쩌면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고 말이다.
천하사패와의 전쟁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대신 결과는 바꾸고 싶었다.
“차합!”
“얍!”
반호진이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네 명은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여전히 격렬하게 비무를 하고 있었다.
상대를 바꿔 가면서 말이다.
체력과 공력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네 사람은 대련을 이어 갔다.
하지만 다들 머릿속에는 반호진이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경지가 떠올라 있었다.
“그쯤 해. 더 하면 몸 망가진다.”
한가롭게 뒷짐을 진 채로 상념에 잠겨 있던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반호진은 네 사람의 몸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과한 의욕이 부상을 부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또 날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기에 반호진은 네 사람을 말렸다.
“훅! 후욱!”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맞습니다!”
“그러다가 다치면 자기만 손해인 거 알고 있지?”
하지만 넷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러나 이어진 반호진의 말에 선우방과 서조운, 모용척은 검을 늘어뜨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반호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 세 사람 다 극도로 지친 상태인 건 맞았다.
“저녁 먹고 할까요?”
“시간이 꼭 지금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행히 제가 시기를 잘 맞춘 것 같군요.”
“사부님!”
대화가 얼추 정리되는 쪽으로 흘러갈 때 숲속에서 상일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에는 커다란 수사슴 한 마리를 짊어진 채로 말이다.
그런데 축 늘어진 사슴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웬만한 장정만 한 덩치도 덩치지만 녹용도 거대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고기만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요. 녹용과 여러 가지 약초를 함께 달이면 꽤 좋은 약차가 된답니다.”
모두의 시선이 녹용에게 향하자 상일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름 다도에 조예가 깊은 만큼 상일기는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효험을 보기도 했고.
“말씀만 들어도 몸에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하하.”
상일기의 너스레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선우방과 모용척도 웃었다.
그러나 서조운만은 웃지 않았다.
평생 동안 약을 먹어 온 그였기에 다른 이들과 달리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으으!”
“싫어도 성의가 있는데 먹어야지. 저 정도 녹용은 구하기도 쉽지 않아.”
“네에.”
“몸에 좋은 거 먹어서 나쁠 건 없어. 특히 녹용은 남자에게 좋아. 미래의 너를 위해서도 먹어서 나쁠 건 없어. 나중에 삼처사첩을 거느릴 거라며?”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군요.”
서조운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반호진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누가 뭐래도 약한 남자보다는 강한 남자가 좋았다.
그게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말처럼 쉬웠으면 내가 이렇게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지는 않았겠지.”
“예?”
“그런 게 있다.”
반호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불만이 많은 걸로 따지자면 누구보다 그가 가장 많을 터였다.
물론 다시 한번 생을 살게 된 건 더없이 감사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고생길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올랐기에 반호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일 있으면 저에게 말해 주세요.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혼자 앓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흠흠! 나도 있다.”
“저도 듣는 건 잘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인지 선우방과 모용척이 슬그머니 대화에 참여했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일기, 정이륭 사제도 궁금한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지금처럼 쑥쑥 자라기만 하면 된다.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자, 그럼 도축을 할까요? 지금부터 부지런히 피도 빼고 가죽도 벗겨야 해 지기 전에 다 구운 사슴구이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원이 많으니 금방 할 겁니다. 허허허.”
반호진이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걸 알았지만 상일기는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말하기 싫은 걸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막말로 오늘 처음 본 사이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람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은 하나씩 있는 법이기에 상일기는 익숙하게 목을 크게 찢어 피부터 뺐다.
“저희는 땔감으로 쓸 나무들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동갑내기라서 그런지 비무를 끝내고 급격히 친해진 모용척이 정이륭과 함께 움직였다.
뒤이어 서조운이 물을 뜨러 계곡에 갔고, 반호진과 선우방은 도축 작업에 들어갔다.
상일기가 사슴 요리에 쓸 갖가지 양념들과 약초들을 가지러 갔기에 사슴을 손질하는 건 자연스레 두 사람의 몫이 되었다.
모두가 만족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산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상일기의 방에서는 아직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앉거라.”
“예.”
모두가 잠자리에 든 야심한 시각에 상일기는 정이륭을 불렀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바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손님들과의 비무로 인해 정이륭이 곧바로 잠에 안 들 것 같기도 했고.
그의 예상대로 정이륭의 얼굴에는 아직도 비무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오늘 하루가 즐거웠던 모양이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외로움 때문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사부님과 함께하던 시간들도 좋았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정이륭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상일기는 알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젊은 시절이 있었고, 정이륭처럼 외진 곳에서 사부와 단둘이 수련에 매진했던 때가 있었다.
“벌써 네 나이가 열아홉이지?”
“그렇습니다.”
“먼저 하산하거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