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은룡(隱龍)들. -03
-그거 가격이 꽤 나갈 텐데?
-돈 쓸 일이 없어서 용돈을 차곡차곡 모았더니 금액이 꽤 되더라고요. 근데 반 형님은 부자예요? 돈 아끼는 기색이 없던데.
모용척은 그동안 궁금했던 게 문득 떠올라 물었다.
소림사 방장의 무기명제자이긴 하나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반호진은 딱히 명문세가 출신이 아니었다.
무림세가는커녕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본가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모용척은 늘 궁금했다.
대체 어디서 돈을 수급하기에 경비를 다 내는지 말이다.
-호진이 부자야. 녹림대군을 때려잡은 건 알고 있지?
-당연하죠. 그걸 모르면 형님의 아우라고 할 수가 없죠.
모용척이 자신을 무시하냐는 듯이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선우방은 그 모습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한몫 제대로 챙겼거든. 호진이뿐만 아니라 나랑 조운이도.
-아, 산채를 털었군요?
-그것도 있고, 금가장에서 받은 포상금도 있고. 호진이는 따로 무공도 팔았거든. 녹림대군의 진신절기를.
-아하.
모용척은 이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은 고작 산적 나부랭이 아니냐며 천시하지만 그건 헛소리였다.
천하십대고수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녹림대군은 매년 강호인명록에서 백 명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그것도 매해 삼십 위권 안에 들어가는 강자가 녹림대군이었다.
-나도 정확한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가늠은 되지?
-그렇죠. 근데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네요. 그걸 살 만한 곳이 몇 없을 텐데. 녹림대군의 무공이 전부 있었을 것 아니에요.
-맞아.
-근데 또 달리 생각하면 대단하기도 하네요. 녹림대군의 무공을 팔 생각을 하다니. 역시 배포가 아주!
모용척이 눈을 반짝였다.
그가 형님으로 모시는 이답게 그릇이 아주 커서였다.
어떻게 보면 반호진 정도의 고수에게 녹림대군의 무공은 썩 대단해 보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무공의 가치를 모른다는 말은 아니었다.
-녹림대군 말고도 꽤 많이 팔았어. 녹림십팔채의 채주들도 전부 태호채에 있었으니까. 그러니 경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포상금도 두둑이 받기도 했고.
-저에게도 곧 그런 행운이 찾아오겠죠?
모용척이 눈을 반짝였다.
자고로 돈은 많아서 나쁠 게 없었다.
더구나 그는 추후 모용세가의 가주가 될 몸이었다.
그렇기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글쎄다. 호진이의 용모파기가 산적들에게 싹 퍼졌다는 말이 있어서. 일단 소림사 출신의 문파나 표국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야 신경 안 쓴다는데 그런 곳들은 되레 된통 당하니까.
-중원에 산적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모용척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기에 모용척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반호진과 함께한다면 무명도 덩달아 날리게 될 터였다.
“흐흐흐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모용척은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옆에 있는 선우방이 한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작할까요?”
“그래도 제가 선배인데 선공을 양보하는 게 맞지만, 그러기에는 겁이 좀 납니다. 허허허.”
“동시에 시작하죠.”
솔직담백하게 지금의 심경을 얘기하는 상일기의 모습에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정이륭과 마찬가지로 삼베옷을 입은 데다가 체격도 그리 크지 않아 촌부처럼 보였지만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일기가 어떤 무인인지 말이다.
‘신권(神拳)이라 불리는 무인이지.’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권왕조차 가지지 못했던 별호를 얻은 무인이 바로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상일기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에서도 마주친 적은 있어도 겨루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담현이나 법무와 비무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제대로 힘을 꺼내도 괜찮았다.
‘다들 좋은 구경 하겠네.’
반호진이 슬쩍 공터 구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옹기종기 모여서 눈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는 네 사람이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예.”
스르릉.
상일기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반호진이 검을 뽑았다.
그런데 단순히 검을 뽑았을 뿐인데 분위기가 일변했다.
츠츠츠츠!
반호진과 상일기를 중심으로 기이한 소성이 들려왔다.
무언가가 비틀리거나 긁히는 듯한 소리가 공터 곳곳에서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지금 들리는 소리가 서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지기가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소리임을 잘 알아서였다.
꿀꺽!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네 사람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저 경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의 비무는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스윽.
먼저 움직인 쪽은 반호진이었다.
검을 편하게 늘어뜨린 채 서 있던 반호진은 급할 게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한 걸음 내디뎠다.
한데 가벼워 보이는 한 걸음과 달리 반호진의 신형은 순식간에 간격을 좁혔다.
딱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뿐인데 어느새 반호진의 검은 상일기의 목젖 앞에 놓여 있었다.
스르륵.
그러나 상일기는 놀라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파고드는 일검이었으나 상일기는 조금의 미동도 없는 눈빛으로 왼손을 움직였다.
섬광을 뿌리며 쇄도하는 반호진의 일격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굳이 힘을 많이 쓰지 않고 딱 궤도를 비틀 정도의 힘만 사용했다.
슈하앗!
그와 동시에 우권을 내질렀다.
상일기를 무림에서 신권이라 불리게 만들어 준 성명절기이자 방천문을 상징하는 무공인 명왕권(冥王拳)이었다.
간단한 이름처럼 상일기의 주먹은 평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정권 찌르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지.’
평범해 보이는 정권 찌르기였으나 저 안에는 수천, 수만 개의 변화가 담겨져 있었다.
상일기가 일생 동안 수련한 정수가 저 일권에 담겨져 있다는 걸 알기에 반호진 역시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다.
쌔애애액!
상일기가 흘려낸 검을 잽싸게 회수한 반호진이 그대로 참격을 뿌렸다.
회수와 공격을 동시에 펼쳐 보였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는 듯이 검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쩌어엉!
이윽고 반호진의 검과 상일기의 주먹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런데 맨손과 강철로 이루어진 검이 부딪쳤는데 굉음이 터져 나왔다.
거기다 충격파 역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스슥!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적수공권임에도 상일기는 검과 충돌하는 걸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호진을 공격했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검 하나뿐인 반호진과 달리 그는 사지육신 전체가 병기였기에 그걸 십분 활용했다.
파파파팟!
반호진의 수준을 알기에 상일기는 눈곱만큼도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진심을 다해 명왕권을 펼쳤다.
퍼퍼퍼펑!
그 흔한 권기조차 서리지 않은 맨주먹임에도 상일기의 쌍권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폭음이 터졌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주먹에 막대한 진기가 서려 있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달마삼검을 꺼내 든 반호진의 기세도 상일기에 비해 절대 꿀리지 않았다.
쌔애애액!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반호진의 검이 일으키는 파공성은 더욱 묵직해지고 예리해져 갔다.
한데 그럴수록 상일기의 미소 역시 짙어졌다.
이렇게 제대로 무공을 펼치는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였다.
“제대로 가 볼까요.”
“좋습니다.”
웅웅웅웅!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는 듯이 반호진과 상일기가 서로를 응시하며 웃었다.
그 순간 묵직한 공명음이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본격적으로 내공을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만 하더라도 엄청난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 진기로는 둘의 제 실력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꽈아아앙!
그걸 둘 다 알고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공력을 끌어 올렸고, 이내 허공에서 검강과 권강의 향연이 펼쳐졌다.
두 사람이 뿌리는 강기들이 쉴 새 없이 충돌했던 것이다.
“미쳤다.”
“저게 진짜 고수들의 비무.”
“좀 더 물러나야 할 것 같은데.”
하나하나가 고절하기 짝이 없는 초식에 지켜보던 모두가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선우방은 비무가 점점 더 격렬해지는 만큼 충격파와 후폭풍의 강도도 세지는 걸 느꼈기에 일행들을 뒤로 물렸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자칫 잘못해서 두 사람의 비무 영향권에 들어가면 몸이 갈가리 찢어질 게 분명했기에 서둘러 움직였다.
꽈앙! 꽝!
그런 선우방의 조치 덕분에 반호진은 아무 걱정 없이 비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오로지 상일기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얼하네.’
우락부락함과는 거리가 먼 체격을 지닌 게 상일기였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옹골찼다.
단단히 압축된 강철주먹과 부딪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반호진은 상일기의 권격을 맞받아칠 때마다 손목이 저렸다.
‘이게 얼마 만이더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충격은 육신에 켜켜이 쌓였다.
그런데 반호진은 그게 싫지 않았다.
이런 고통이 그에게는 좋은 자극으로 다가와서였다.
생각지도 못한 기적으로 과거로 돌아온 후 그 누구도 반호진에게 이런 자극을 주지 못했다.
‘거기다 나만 느끼는 게 아니고.’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상일기의 표정이 말이다.
그 역시 지금의 비무를 즐기고 있었다.
속세를 떠나 홀로 고행을 했지만 상일기 역시 사람이었다.
이런 비무가 흥겹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그의 전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던가.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실전감각이 떨어져 있어야 정상인데 그렇지가 않다는 거지. 정점의 경지에 있어서 그런 건가?’
상일기의 권격은 간결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변화가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허초와 변초를 펼쳤기에 반호진은 금광신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전방을 가득 채우는 권강들이 폭우처럼 쏟아졌기에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호신강기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콰콰콰쾅!
막지 않아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로 인해 애꿎은 지면만 뒤집어졌다.
쉬이익!
그리고 반호진은 피하기만 하지 않았다.
권강 하나하나가 전신요혈을 정확히 노리고서 쇄도하는 와중에도 빈틈을 찾아내고 그곳을 향해 정확히 검을 찔러 넣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었고 그저 완벽해 보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지난 생에서 죽어 가면서 깨달았기에 반호진의 일검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흡!”
절묘하게 초식의 빈틈으로 파고드는 반호진의 반격에 상일기가 기겁했다.
수천, 수만 번 펼쳤던 초식에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놀란 것과 달리 상일기의 반응은 기민했다.
양팔을 교차해서 반호진의 검격을 막아 냈다.
꽝!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껏 밀리기만 했던 걸 보상받겠다는 듯이 이번에는 반호진의 검이 그를 밀어붙였다.
검해(劍海)가 펼쳐지며 상일기를 압박했던 것이다.
츠츠츠츠!
순식간에 분열되듯 수백 개의 검강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아니, 전방뿐만 아니라 사방과 머리 위까지 덮어 버렸다.
꽈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