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은룡(隱龍)들. -02
언뜻 보기에는 농부처럼 보이는 청년이 정중하게 포권을 해 왔다.
그 모습에 다른 일행들도 황급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우세가의 선우방입니다.”
“안녕하세요. 서가장의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하하. 모용세가의 모용척입니다.”
개성이 강한 세 사람의 시선이 정이륭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이 아는 반호진은 절대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까지의 대화로 보건대 방천문을 찾아온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셋은 웃는 얼굴과 달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이륭을 살펴봤다.
“모두 반갑습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일로 본문을 찾아오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크게는 교류를 위해서입니다. 방천문이 속세에 떠나 있다고 하나 그렇다고 불문이나 도가의 문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사도 나누면서 친분도 나눌 겸 찾아왔습니다. 문주님을 한 번 뵙고 싶기도 했고요.”
“본문에 대해서 꽤 상세히 아시네요.”
정이륭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알기로 방천문이 강호에서 최근에 활동했을 때가 무려 백 년 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아예 안 만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강호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문에 대해서 꽤나 자세히 알고 있자 정이륭은 놀랐다.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도 들은 거라.”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실은 지난 생에서 직접 만나서 들은 것이지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고.
‘가끔은 좀 씁쓸하단 말이지. 다 좋은 인연들이었는데.’
선우방처럼 이번에도 친구가 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완전히 다른 관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네요. 저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요. 아, 일단 가시죠. 사부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천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일행 중 반호진이 유일했기에 대화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대신 다른 세 사람은 대화가 아닌 정이륭이라는 사내에 집중했다.
-어떤 것 같아요, 형?
-뭐가?
-에이. 제가 뭘 묻는지 알고 있으시면서.
반호진과 정이륭을 뒤따르며 서조운이 슬쩍 전음을 보냈다.
이심전심이라고 선우방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해서였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파로 보건대, 상당한 고수야.
-그렇죠? 제가 잘못 느낀 게 아니죠?
-응. 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야.
-허어. 그 정도예요?
-일단 느껴지는 건. 확실한 건 붙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농담은 가끔 해도 빈말은 하지 않는 게 선우방이었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진심으로 놀랐다.
게다가 선우방은 눈썰미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강호에서의 경험만 따지면 넷 중에 가장 많은 게 선우방이기도 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아무리 전해 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찾는 건 불가능한데.’
한편 뒤따르던 모용척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문이 완벽하게 해소된 것도 아니었다.
스윽.
앞의 네 명을 뒤따르며 모용척이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어디를 봐도 길은커녕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노련한 약초꾼과 사냥꾼 들도 길을 찾기 힘들 것 같은 밀림이 이곳이었다.
그런데도 반호진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방천문을 찾아왔다.
‘거기다 가장 큰 이유는 목적이야. 나를 찾아온 것에서부터 방천문까지.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찾아온 것일 텐데 그걸 알 수가 없으니.’
탁 까놓고 얘기해서 모용척까지는 그래도 미심쩍긴 하지만 이유가 설명되기는 했다.
무림인은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강한 무인을 찾아 비무행을 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방천문은 거기에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방천문에 대해 전해 들었다고 하나 모두가 직접 찾아가는 건 아니었다.
‘일단 지켜보면 알겠지.’
모용척의 시선이 반호진의 등에 닿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충격을 주었던 인물이 여전히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란히 걷고 있는 정이륭도 모용척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선우방과 서조운이 느낀 걸 그 역시 모르지 않았기에 모용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봤다.
‘허어.’
방천문의 당대 문주이자 정이륭의 사부인 상일기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외진 곳에 누군가가 찾아온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손님들의 실력과 재능이었다.
모두가 범상치 않은 무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상일기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크게 놀랐다.
특히 그의 눈은 반호진에게 닿은 후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림의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방천문의 상일기입니다.”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신데 말 편히 하시지요.”
“허허.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가 편하도록 반호진이 운을 띄워 주었으나 상일기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더욱더 자세히 반호진을 살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그의 눈에는 반호진의 무경이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반호진이 일부러 드러낸 수준이 아니라 진짜 쌓아 온 무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기에 상일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고작 약관 정도로 보이는 반호진이 저 정도의 경지를 쌓았다는 게 말이다.
그의 제자이자 방천문의 후계자인 정이륭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호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거기다 다른 이들도 이륭이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아.’
상일기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반호진의 존재도 충격적이지만 함께 온 세 사람도 만만치 않았다.
한 명 한 명이 천재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기에 상일기는 이 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했다.
“나중에라도 편해지시면 편히 말씀하세요.”
“알겠습니다.”
“이쪽은 제 일행들입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반호진이 일행들을 소개했다.
이윽고 그의 손짓에 선우방을 시작으로 서조운과 모용척이 차례대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우세가의 선우방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입니다!”
“모용세가의 모용척입니다.”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일단 인사부터 나누었다.
반호진이 데려왔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요? 이륭이와 둘이서만 살기에 좀 좁긴 하지만 그래도 밖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예.”
손님을 밖에 세워 둘 수는 없기에 상일기는 몸을 돌렸다.
집 근처에 정자가 있긴 했으나 모두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지는 않았기에 상일기는 일행을 이끌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관심은 끈 것 같네.’
상일기를 따라 들어가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다행히 첫 단추는 잘 꿴 것 같아서였다.
또르륵.
두 명이서 생활하던 모옥이었기에 접객실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큰 방인 상일기의 방에 일행들이 구겨 앉듯이 둥글게 앉아서는 한 잔씩 차를 받았다.
“제가 직접 재배하고 말린 국화차인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향이 엄청 좋은데요.”
“마셔 본 국화차 중에 향이 제일 진합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상일기와 달리 반응은 뜨거웠다.
다도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용척과 선우방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반면에 차 대신 탕약을 주로 먹었던 서조운은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그러려니 하고 마시는 중이었다.
반호진이야 애초에 음식이나 차를 가리는 성격이 아니었고.
“저도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사실 이륭이를 데려올 때 말고는 사람을 만난 게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네요.”
정말 오랜만에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상일기에 말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기에 반호진을 비롯해서 일행들도 알고 있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시에 반호진은 상일기에 말에 담긴 저의도 파악했다.
“우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다른 곳이었다면 정식으로 연락을 드렸을 텐데 문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쉽게 찾을 수가 없는 곳이라 부득이하게도 이렇게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개방에 부탁을 해도 찾아내기가 힘들 겁니다. 애초에 은거지로 정해 놓고 찾은 장소이기도 하고요. 사실 그래서 더 의문이기도 합니다. 안다고 해서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미로진이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상일기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찾기가 어려울 뿐이지 막상 찾으려고 하면 못 찾을 건 없었다.
다만 그럴 만한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제가 찾아온 건 문주님께 한 수 배우고 싶어서입니다.”
“반 공자님이요?”
“예. 이유는 문주님께서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으음.”
상일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사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무인이 고수를 찾아다니는 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반호진의 실력은 그에게 비무를 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힘들까요?”
“아닙니다. 저 역시 무인인데 어찌 반 공자님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오히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문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기도 하고요.”
“방천문의 숭고한 의지는 여전히 무림에 흐르고 있습니다.”
상일기와 정이륭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이것까지 반호진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두 사제가 정말 크게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딱 여기까지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알려 줄게.”
“신비문파 뭐, 그런 건가?”
“비슷해.”
슬쩍 물어오는 선우방을 향해 반호진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상일기와 정이륭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렸다.
대신 다른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상세하게 말해 준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무는 언제가 편하시겠습니까?”
“저는 객의 입장이니 문주님께서 정해 주시지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할까요? 크게 지치지도 않으신 것 같은데.”
“저야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지요.”
“그럼 지금 하지요.”
상일기가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이 좁은 것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궁금증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에 유일하게 반호진의 무경을 조금이나마 엿본 게 그였기에 상일기는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그러나 상일기는 몰랐다.
반호진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기도를 살짝 흘렸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린 큰 그림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반호진 역시 웃으며 따라 나갔다.
-방천문이라. 넌 들어 본 적 있어?
-저도 들어 본 적은 없어요.
반호진과 상일기를 따라 밖으로 나온 선우방이 모용척에게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모용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아마 대부분이 모를 겁니다. 떠나기 전에 최근의 강호인명록을 봤는데 거기에 방천문주님은 없었습니다.
-강호인명록? 하오문에서 파는 거?
-네.
선우방의 동공이 커졌다.
의외로 준비를 바짝 하고 집을 나왔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게다가 매년 발행하는 강호인명록은 인원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