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은룡(隱龍)들. -01
“분위기를 잡은 건 아닌데. 오랜만에 문안인사도 드릴 겸 해서 온 거야.”
“용건은 따로 있겠지.”
모용희수가 쏘아 대듯 말했지만 모용척은 따지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평소 자신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알기에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모용희수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맞받아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틀린 말은 아냐.”
“왜 그래? 갑자기.”
평소에는 화를 잘 내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는 경우도 거의 없지만 모용척에 한해서는 얘기가 달랐다.
오빠이고 가문의 후계자이지만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어서였다.
모용궁은 아들이 언젠가 모용세가의 후계자다운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나 모용희수는 아니었다.
“흐음. 정신을 차렸다고 할까?”
“오빠가?”
“그래도 오빠라고 말은 해 주는구나.”
“아빠 앞이니까.”
“하하하.”
날이 바짝 서 있다 못해 서릿발까지 휘날리는 어조에 모용척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감히 그 부분을 따지지는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난 세월 동안 정말 못난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이 꼭두새벽부터 찾아왔느냐?”
“문안인사를 아직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 같은데, 그것부터 할까요?”
“됐다. 언제부터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고.”
“커흠!”
인자하게 웃고 있지만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렇기에 모용척은 멋쩍게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일단은 분위기부터 환기시키는 게 먼저일 같아서였다.
“어제의 일이 충격이긴 했나 보구나.”
“충격을 안 받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요.”
“무얼 느꼈느냐?”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제가 방에 처박힌 지 어느새 칠 년이 훌쩍 지나 있더라고요.”
“그걸 어제 알았다면 문제가 심각한 거 같은데 말이다.”
차를 들이켜며 모용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장 옷만 보더라도 사계절은 물론이고 자신의 체형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흘러가는 세월을 느끼지 못했다면 무덤덤한 걸 넘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철딱서니 없었죠.”
“그거하고는 다른 거 같은데.”
모용희수가 슬쩍 대화에 참여했다.
말을 정정해 줄 필요가 있어서였다.
“철이 없던 것도 사실이니까 포함되지.”
“인정.”
“하나라도 인정해 줘서 고맙구나.”
“표정을 보아하니 비꼬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근데 진짜 사람이 어떻게 하루 만에 바뀌지? 혹시 내상을 심각하게 입었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거야?”
“……이런 살쾡이 같은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모용척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적당히 받아 주었기에 모용척도 맞받아쳤다.
하지만 모용희수는 더 이상 순수한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색다른 모습을 더 좋아할 수도 있지. 물론 이런 내 모습을 보려면 나와 특별한 사이가 되어야 하겠지만. 천편일률적인 성격보다는 나처럼 상반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낫지 않겠어? 흔히들 말하잖아. 낮에는 현숙하고 밤에는 요부인 여자가 좋다고.”
“어이쿠야.”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여동생의 입에서 요부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용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가족들이 있는 자리라지만 말을 너무 막 하는 것 같아서였다.
“왜? 그게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아냐?”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니까 그렇지.”
“흥. 웃겨. 좋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 그래야 네가 내숭쟁이라는 걸 알 텐데.”
“절대 그런 일은 없을걸.”
모용희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평생 동안 남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살아온 그녀였다.
절대 들킬 일은 없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남매간의 대화는 그쯤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꾸나.”
“아버지. 저 소림사에서 수행 좀 하고 오겠습니다.”
“반 공자 일행을 따라가려는 것이냐?”
“예.”
소림사라는 말에서 모용궁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모용척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알아챈 것과 달리 모용궁의 표정은 애매모호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모용척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굳이 소림사에 갈 필요가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형님들이 필요합니다.”
“형님?”
모용척에게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생소한 단어에 모용궁은 물론이고 모용희수도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모용척에게서 형님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에도 모용척은 당당했다.
“저보다 연장자니 당연히 형님이지요.”
“넌 다른 후기지수들은 인정하지 않았잖아?”
“바로 그겁니다. 그 녀석들은 나이만 많지 형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쥐뿔도 없는 실력으로 거들먹거리기나 했지. 그래서 제가 잠시 방황한 겁니다. 그런 녀석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제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다르다?”
“예. 거기에 조운이까지요.”
모용척의 두 눈에 살짝 분한 기색이 서렸다.
막말로 선우방에게 진 건 사실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치기는 했으나 어쨌든 선우방은 그보다 형이었다.
그렇기에 형에게 졌다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서조운은 달랐다.
“벌써 편하게 대할 정도로 친해진 게냐?”
“아직은 아닌데,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일단 운은 띄워 놓았으니까요.”
“허허허.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지 않더냐.”
“세 사람 다 속 좁은 성격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얘기를 나눠 보니까 뭐 다들 금방 말을 놓았다고 하던데요. 저도 곧 그렇게 되겠죠.”
무사태평한 어조로 말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모용궁은 물론이고 모용희수도 헛웃음을 흘렸다.
매사 당당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두 부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결론은 따라가겠다는 거 아니냐?”
“맞습니다. 기간은 따로 정해 놓지 않았는데,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만족할 정도가 되면 돌아오지 않을까 합니다.”
“넌 차기 모용세가의 가주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는 반 형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강한 가주가 좋지 않겠습니까.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인 모용세가주가요.”
모용궁이 두 눈을 감았다.
그 역시 그러길 바랐고,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다시 오대세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그가 천하십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용척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자신 있느냐?”
“중요한 건 해 봐야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결과도 나오지 않죠. 아, 나오긴 할 텐데 본인이 원하는 결과는 아닐 겁니다.”
“좋다. 허락하마.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제발 사고 치지 마라.”
모용궁의 말에 모용희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가장 걱정되는 게 그거였다.
“에이. 제가 애인가요. 저 내년이면 스무 살입니다.”
“스무 살이라고 해서 다 같은 스무 살은 아니지. 당장 반 공자나 선우 공자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끄응!”
진실로 심장을 때리는 듯한 부친의 말에 모용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었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많이 배우고 오너라. 이왕이면 다 이기고.”
“물론이죠. 처음부터 질 걸 생각하면 절대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상한 신붓감은 데려오지 말고. 최소한 팽화영 정도는 되어야 한다.”
“……오직 재능만 보는 겁니까?”
“희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팽화영의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리는 수준은 아닌데?”
모용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봉의 일인인 모용희수를 매일 봐서 그렇지 팽화영과 팽수영의 외모가 못생긴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근골만 보자면 더없이 뛰어난 게 두 자매였다.
키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긴 하나 다른 조건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림사에서 여자라니요. 사찰에 여자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왜 없어? 금남의 구역도 아닌데. 아미파라고 해서 꼭 비구니만 있지는 않잖아? 속가제자 중에는 남자도 있는데. 소림사도 마찬가지다.”
모용척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였다.
동시에 자신이 소림사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네요?”
“그러니까 행실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함부로 물건 다루지 말고.”
모용궁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정신을 차려서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워낙에 제멋대로 살아온 아들이기에 소림사에 폐를 끼치진 않을까 저어되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따 식사 때 뵙겠습니다.”
“그래. 오늘 떠난다고 하니까 너도 채비하고.”
“예.”
볼일을 다 봤기에 모용척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태도는 정중했다.
건성으로 인사하던 것과 달리 오늘은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서 방을 나서는 모용척의 모습에 모용궁은 내심 흡족했다.
이제야 사람이 된 것 같아서였다.
모용세가를 떠나 며칠째 산만 타고 있었음에도 일행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이 또한 수련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특히 서조운과 마찬가지로 정말 오랜만에 집을 떠난 모용척은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어렸을 때 다른 무림세가를 찾아간 적은 많았지만 대부분 관도를 이용했지 이런 산길을 통해 이동한 적은 없었기에 모용척은 힘들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호진아. 진짜 길은 알고 가는 거지?”
“물론이지. 내가 언제 길을 헤맨 적 있어?”
“어, 없었긴 했지.”
“대답이 좀 늦다?”
“생각할 시간은 줘야지.”
한 박자 늦게 나오는 대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우방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어디를 간다고 정확히 말하지 않았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할 터였다.
“거의 다 왔어.”
“근데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어?”
“북해나 사막에서도 사람이 사는데 이곳이라고 못 살 건 뭐야?”
“그거 말 되네.”
의문 가득한 눈으로 우거진 밀림을 쳐다보던 선우방이 실소를 흘렸다.
사막이나 북해에 비하면 이 정도 환경은 딱히 척박하다고 볼 수 없어서였다.
“누구십니까?”
그때 멀리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은 듯했다.
“소림의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방천문(防天門)을 찾아왔습니다.”
“예?”
갑작스러운 목소리였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반호진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낯선 음성의 주인은 소림이라는 말보다 자신의 사문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방천문과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제 선조께서요.”
“아, 예.”
이어지는 반호진의 설명에 목소리의 주인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낡은 마의(麻衣)를 입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관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삼베옷 때문인지 겉모습만 보면 후기지수라기보다는 농부처럼 보였다.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방천문의 정이륭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