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장. 뜻밖의 수확? -02
더더욱 알 수 없는 말에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옆에 있던 선우방은 모용척의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피식거리고 있었다.
“형님이 왜 당신의 형님입니까? 제가 알기로 형, 동생 하기로 한 적은 없는 것도 알고 있는데요.”
말문이 막힌 반호진을 대신해 서조운이 입을 열었다.
한데 그의 말에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저보다 연장자이시니 당연히 형님이지요. 그리고 남자끼리 마음만 먹으면 친해지는 건 금방이지 않습니까. 만난 시간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통했느냐가 중요하지요. 무림에서는 하루 만에 의기투합해서 도원결의를 맺기도 하니까요.”
“그건 특별한 상황에서고요.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죠.”
“근데 저는 반 형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입니다만.”
사사건건 끼어들려 하는 서조운을 향해 모용척이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이제 그만 끼어들고 조용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압박에 굴할 서조운이 아니었다.
“저는 형님의 동생입니다만. 오늘 알게 된 그쪽과는 신분이 완전 다르죠.”
“그쪽?”
“아, 말이 헛나왔네요. 모용 공자. 아니면 소가주라고 불러 드릴까요?”
웃고 있지만 말에는 비꼬는 기색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걸 모를 수가 없기에 모용척의 눈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하나 흥분하지는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편한 대로 하시죠. 어느 쪽이든 저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럼 그쪽이라 하죠. 제가 비무에서 이겼으니 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서.”
“하. 하. 하.”
신경을 건드리다 못해 후벼 파는 서조운의 한마디에 모용척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살기까지는 아니지만 냉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에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그쯤 해라. 그래도 너보다 연장자인데.”
“넵.”
결국 보다 못한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가만히 놔두면 방 안에서 칼부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오늘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고요.”
“예?”
“오늘 처음 본 사이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딱 그가 기대한 말이 나와서였다.
동시에 모용척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역시 그런가요.”
“근데 이유는 궁금하군요. 굳이 이렇게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는데.”
“깨달았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실행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집을 떠나야만 제가 진짜로 바뀔 수 있다고요. 지금처럼 집에 머문다면 저는 얼마 안 가서 원래대로 되돌아갈 겁니다. 관성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바뀌는 건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모용세가를 떠나겠다는 말입니까?”
“예.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집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이들이 곁에 있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목표라고 할까요. 눈에 보여야 저도 계속 노력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일행으로 받아 달라?”
“예.”
길게 설명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렇기에 모용척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어 살짝 부끄럽기는 했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낫다고 생각했다.
또 어설프게 거짓말을 해서 속여 넘길 수 있는 이들도 아니었고.
‘애초에 칼자루는 저쪽에 있으니까.’
모용척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알고 있었다.
갑을로 관계를 나눈다면 그는 무조건 을이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당연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흐음.”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에 반호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모용척이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굽힐 줄은 몰라서였다.
물론 서조운과의 비무로 인해 받은 충격이 크긴 하겠으나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여덟 글자가 자신의 좌우명이라는 듯이 살았던 게 전생의 모용척이었기에 반호진은 솔직히 지금의 모습이 낯설었다.
“여지도 없는 겁니까?”
“저야 상관없기는 한데. 근데 바로 소림사로 가는 게 아니라서요.”
“그럼 하북팽가에 가는 겁니까?”
모용척은 비무 후에 단순히 수련과 복기만 하지 않았다.
일행들에 대해 가솔들에게 물어 전반적인 정보들을 모두 알아냈기에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따로 갈 곳이 있습니다.”
“어?”
“소림사 가는 거 아니었어?”
반호진의 대답에 서조운과 선우방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용세가 다음에는 당연히 소림사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였다.
따로 목적지가 있는 듯하자 두 사람은 토끼 눈을 하고서 반호진을 쳐다봤다.
“가는 길에 좀 들를 곳이 있어서. 두 사람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넌 어떻게 아는 거야?”
“애들은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는 법이란다.”
“어른은 무슨. 우리 동갑이잖아.”
“어허. 육체적인 나이 말고 정신적인 나이를 봐야지.”
선우방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그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전 어디든 괜찮아요. 형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갑니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형님으로 모시면서 잘할게요.”
모용척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잘난 맛에 살던 모용척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합류는 어렵지 않은데, 전제조건이 두 개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하나는 아주 당연한 겁니다. 가주님의 허락을 받으십시오. 무단가출은 이쪽에서 사절입니다. 괜히 모용세가와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모용척이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한 대로 아주 당연한 조건이었기에 그 역시 이견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실력을 기준으로 서열 정리입니다. 나이에 따라 예의는 지키지만 그래도 최약체라는 걸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최약체라고요?”
“예. 인정할 수 없다면, 증명하면 됩니다.”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말에 모용척의 두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서조운이야 직접 겨루었기에 그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우방은 달랐다.
딱히 특별해 보이지도, 기도가 대단하지도 않았기에 사실 선우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반호진이 선우방도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하자 모용척은 자존심이 상했다.
“어림도 없죠. 저도 방 형은 못 이기는데.”
“뭐라고?”
“우리가 말을 놓기로 했던가요? 내 기억에는 아닌 것 같은데.”
모용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서조운은 다른 부분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뜸 반말을 하자 얼굴을 잔뜩 찡그렸던 것이다.
“서 공자가 졌다고요?”
“예. 방 형도 만만치 않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겪어 보시지요.”
“안 그래도 저도 손이 근질거리던 차였습니다. 한 번 붙어 볼까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용척을 향해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다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선우방은 순수하게 모용척의 실력이 궁금했다.
서조운과 대련을 하는 사이에도 모용척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게 성장인지 아니면 본래의 실력을 회복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손아귀에 땀이 맺히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좋습니다. 무인은 도전을 피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강호의 명숙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이 콧방귀를 끼었다.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곧 완전히 바뀔 모용척의 표정이 말이다.
끄그그긍!
횃불도 없이 월광만이 비추는 연무장에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처럼 곧바로 연무장에 나온 것이었다.
어둠에 시야가 방해받을 정도로 수준이 낮지 않았기에 둘은 곧장 비무를 시작했는데 역시나 반호진이 예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익!”
모용척이 호기롭게 검세를 일으켜 몰아붙였으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실속은 없었다.
아무리 그가 파상공세를 펼쳐도 선우방은 완벽히 막아 냈다.
탄탄한 기본기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듯이 선우방은 단순하고 간결하게 모용척의 공격들을 막아 냈다.
현란한 초식도, 변화막측한 검세도 선우방에게는 일절 통하지 않았다.
웅웅웅!
반면에 선우방이 펼치는 단조로운 일검을 모용척은 막기 급급했다.
변초나 허초도 아닌, 말 그대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찌르기인데도 모용척은 뒷걸음질 쳤다.
잘 보이기에 막는 건 쉬웠다.
다만 완벽하게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부르르르!
맞닿은 검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맹한 힘에 모용척의 온몸이 떨렸다.
서조운과는 격이 다른 힘에 모용척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나 선우방의 일검은 이를 악문다고 해서, 기를 쓰고 힘을 쥐어짠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검격이 아니었다.
선우방이 평생 동안 수백만 번, 수천만 번 반복한 검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검격이었기에 모용척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쿠웅!
더는 버틸 수 없는 검압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검객으로서 검을 놓치는 수치만은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모용척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반각도 버티지 못할 것임을 말이다.
“여기까지 하죠.”
“허업! 후욱! 훅!”
선우방의 말과 함께 그를 짓누르던 무지막지한 검압과 중압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모용척은 일어날 수 없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은 사라졌으나 몸에 축적된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였다.
그리고 육체적인 충격뿐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도 그가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선우 공자가 이 정도면 형님은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지?’
누가 뭐래도 일행 중 최강자는 반호진이었다.
또한 그는 녹림대군을 혼자서 처치한 고수이기도 했다.
더해서 도왕의 인정을 받은 무인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모용척은 머리가 띵해졌다.
‘……가능할까?’
선우방의 일검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는 게 현재의 자신이었다.
한데 이런 선우방도 감히 견줄 수 없는 무인이 반호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모용척은 막막해졌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우선은 처소로 돌아가시죠.”
“…….”
“조운아, 사람 좀 불러.”
“네!”
멍한 표정으로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모용척의 모습에 서조운이 히죽 웃었다.
딱 예상한 대로의 모습이어서였다.
애초에 모용척이 승리할 가능성은 일 할도 없었기에 서조운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선우방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는 모용척을 데려갈 하인을 찾았다.
또르륵.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모용척을 모용궁은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들이 먼저 찾아온 적이 언제였는지를.
“무슨 일인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모용척과 달리 매일 아침 문안인사를 하러 오는 모용희수가 차를 따르며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모용척이 먼저 찾아온 적이 근래에 없었기에 모용희수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