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장. 잠자는 용. -04
모용척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스스로도 꽤 오랫동안 무공수련을 소홀히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던 재능이 어디로 사라진 건 절대 아니었다.
또한 소홀히 하긴 했어도 무공에 아예 손을 뗀 건 아니었기에 모용척은 자신 있었다.
‘이번 비무로 무뎌진 감각을 되살리고 반 공자와 제대로 붙으면 돼.’
모용척은 눈앞에 있는 서조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태양혈을 보아하니 내공을 제법 쌓은 듯하지만 무인들 간의 승부는 공력만으로 우열이 갈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승패가 갈렸기에 모용척은 자신 있었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저도요.”
먼저 입을 열었던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딱 봐도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서조운은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여유만만한 저 표정에 다급함이 서리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일단 형님께서 바라는 게 모용척이 지는 것 같으니 초반부터 몰아붙여야겠어.’
서조운은 다른 이들과 달리 모용척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실전감각을 통해 다져진 직감이 있었다.
한때 오대세가에 속했던 명문세가의 소가주였으나 서조운은 자신이 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더욱이 반호진이 그걸 원하지 않았기에 서조운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검병에 손을 올렸다.
“그럼 시작하죠.”
“선공을 양보하죠.”
“정말요?”
“예. 저보다 나이도 어리신 거 같은데.”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감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스스로의 실력을 과신하는 건지 선공을 양보하겠다고 하자 서조운은 넙죽 받았다.
예의상 거절해도 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철저하게 반호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오시죠.”
“갑니다.”
부우웅!
서조운의 검이 묵직한 파공음을 토해 내며 모용척에게 쇄도했다.
진기를 가득 머금고서 말이다.
그러나 빠르진 않았기에 모용척은 여유롭게 검을 들어 막았다.
까아아앙!
하지만 충돌과 함께 모용척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도양단의 초식이었으나 검에 서려 있는 힘이 상당했다.
거기다 서려 있는 진기도 상당한지 막았음에도 팔이 부르르 떨렸다.
공력은 세월에 따라 축적되었을지 몰라도 근육은 오히려 사라졌기에 모용척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져 갔다.
“이익!”
공력은 비슷하나 근력에서 밀린다는 걸 모용척 스스로도 알았기에 서조운의 검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아무리 무공수련을 등한시했다지만 피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게 패착이었다.
까앙! 깡!
물러나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으로 맞서는 게 정석인데도 그러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모용척의 모습에 서조운이 비릿하게 웃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비무에서는 나이도, 연배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그였다.
그걸 실제로 보여 준 게 반호진이기도 했고.
비무에 있어 중요한 건 승패밖에 없기에 서조운은 공력을 가일층 끌어올리며 더욱더 파상공세를 쏟아부었다.
까가가강! 꽈앙!
근력에서도, 공력에서도, 거기다 실전감각에서도 서조운이 유리했다.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기본기였는데 그마저도 차이는 크지 않았다.
워낙에 모용척이 무공수련을 소홀히 했기에 늦은 시기에 입문한 서조운과 별반 차이 나지 않았다.
그걸 서조운은 십분 활용했다.
콰앙! 꽝!
“큭!”
특히 내공에서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축적한 양도 양이지만 극양지기가 검신을 넘어 서조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극양지기를 온몸에서 뿜어 대며 서조운은 모용척을 압박했고, 이내 우열이 가려졌다.
꽈아아앙!
진기와 진기의 격돌로 굉음과 함께 모용척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결국 시종일관 밀리다가 그대로 패배한 것이었다.
깔끔하기 그지없던 백의경장이 순식간에 더러워졌지만 모용척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패배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모용척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푸른 하늘만 쳐다봤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용척과 달리 서조운은 승리했음에도 딱히 기뻐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반짝이는 천재성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체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그 어떤 기술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거기다 모용척의 문제는 체력에만 있지 않았다.
모든 점에서 무인으로서 미달이었기에 서조운은 무덤덤하게 포권했다.
“잠깐. 잠깐만요.”
인사를 끝내고 몸을 돌리려는데 모용척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십니까?”
“다시 한번 비무 할 수 있을까요?”
“비무요?”
모용척의 말에 서조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무라는 말도 어색했지만 굳이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나 싶어서였다.
지금의 모용척은 비무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몸 역시 무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의미가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의미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모용척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용세가의 소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무인으로서 진심으로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런 모용척의 모습에 서조운이 대답을 미루고서 반호진을 쳐다봤다.
눈빛이 달라지긴 했으나 그래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였다.
“원하는 대로 해 드려. 다만 봐주지 말고.”
“예.”
“예에?”
반호진의 말에 모용척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직역하자면 그를 상대로 서조운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뜻해서였다.
그런데 그 말에 동의하는지 선우방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모용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무시를 받은 적이 없기에 분노하는 것이었다.
“다시 시작하죠.”
“……그러죠.”
난생처음 느껴 보는 굴욕감에 모용척의 표정이 달라졌다.
여유만만 하던 얼굴에 독기가 서리자 서조운이 살짝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무인다운 표정과 기세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는 모용 소협께서 먼저 오시죠.”
“……알겠습니다.”
방금 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모용척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흥분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금 느끼는 굴욕감을 꾹꾹 눌러 삼켰다.
분노는 이긴 다음에 터트려도 늦지 않았다.
‘처음부터 극성으로 펼친다.’
모용척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방금 전 패착의 원인은 선공과 함께 기세를 빼앗긴 게 크다고 생각했다.
물론 근력과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완패했으나 모용척은 그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다고 여겼다.
육체적인 부분보다 심리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기에 모용척은 제대로 무공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웅웅웅!
마음가짐이 달라져서 그런지 처음으로 검명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모용척의 손에서 모용세가의 절학인 은하십검류(銀河十劍流)가 펼쳐졌다.
쌔애애액!
검에서 흘러나온 빛무리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움 속에 섬뜩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
따아앙!
실전감각이 무뎌지기는 했으나 본신의 실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거기다 방금 전의 비무로 인해 아주 조금 실전감각이 돌아왔기에 모용척의 검초는 이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달라진 마음가짐을 보여 주듯 예리하게 서조운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부족했다.
“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모용척의 검이 튕겨졌다.
체력이 조금 회복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는 모든 것에서 열세였다.
그 사실을 서조운은 다시 한번 몸소 느끼게 해 주었다.
츠츠츠츠!
그뿐만 아니라 서조운은 극양지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반호진의 지시대로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르르!
검에서 터져 나오는 기세도 기세지만 화끈한 열기가 모용척을 질리게 만들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에 타개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근력, 체력, 공력, 실전감각 전부 밀렸지만 딱 하나, 기술만큼은 자신 있었다.
‘단기간에 승부를 낸다!’
체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절륜한 기교도 펼칠 수 없었다.
그 진리를 모용척도 잘 알았기에 장기전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웠다.
조금이라도 체력이 회복된 지금 이 순간 승부수를 띄웠다.
츠아아앗!
검기성강 직전의 검사가 줄줄이 뿜어져 나오며 빛살처럼 서조운에게 쇄도했다.
혜성과 같은 빛줄기와 함께 모용척의 검격이 시원스럽게 뻗어 나갔다.
꽝!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힘 대 힘의 대결이라면 서조운이 피할 이유가 없었고, 그 결과 모용척은 다시 한번 나뒹굴었다.
방심을 버리고 혼신의 힘을 다했음에도 패배했다는 사실에 모용척은 얼굴을 뒤덮은 흙먼지를 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하하. 하하하하!”
사람이 너무 크게 놀라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지금 모용척이 그랬다.
자신감과 자존심이 박살이 난 모용척은 다른 이들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지 한참이나 대(大) 자로 누워서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미친 거 아니에요?”
“똑똑한 녀석이라 미치진 않을 거다. 뭐, 미치면 별수 없고. 그게 한계인 거지.”
“근데 재능은 확실한 거 같아요. 그 짧은 사이에 감각이 예리해지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요.”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아. 귀재도 있고. 하지만…….”
“개화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시려고 했죠? 이제는 하도 들어서 첫 마디만 들어도 이어질 말이 예상돼요.”
서조운이 반호진의 말투를 따라 하듯 말했다.
그 모습에 옆에서 듣고 있던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주님.”
“아, 그러게나. 저녁 때 보지.”
“네.”
아들이자 하나뿐인 후계자가 졌음에도 모용궁은 딱히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묘한 눈빛으로 모용척을 주시하고 있었다.
실성한 듯이 모용척이 웃고 있었으나 그는 느끼고 있었다.
앙천광소 속에 지금껏 보지 못한 독기와 승부욕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음을 말이다.
“저희도 가 볼게요.”
“이따 뵙겠습니다.”
반호진 일행이 연무장을 떠나자 팽화영과 팽수영도 뒤따랐다.
모용세가의 소가주가 처참하게 발렸는데 타 가문의 여식이 지켜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 보는 게 좋았기에 두 자매는 모용궁에게 인사한 후 모용희수에게 눈인사하고서 자리를 떴다.
방으로 돌아온 모용척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섬섬옥수처럼 새하얗고 굳은살 하나 없던 그의 양손이 붉게 변해 있었다.
오랜만의 비무에 손바닥이 쓸려 벌겋게 올라온 것이었다.
몇 군데는 벌써 물집이 올라오는지 오돌토돌 살이 올라와 있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었나.”
한동안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내려다보던 모용척이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물론 처음 패배했을 때는 분노가 그의 머릿속을 전부 삼켰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최고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뛰어났기에 모용척은 모든 게 시시했다.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다 쉬웠다.
시작만 하면 경쟁자들을 쉽게 제쳤기에 그는 무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금세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