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장. 잠자는 용. -03
약속이라는 단어에 팽화영은 물론이고 팽수영과 서조운, 이 방의 주인인 모용궁도 관심을 보였다.
다들 들은 바가 없기에 궁금했던 것이다.
“가벼운 약속이든 무거운 약속이든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지요. 애초에 지키지 못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힘들다고 말하는 게 예의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은 지난번에 저를 만났을 때부터 본가에 오실 생각이 있으셨다는 뜻인가요?”
“예.”
“역시 저 때문에 오신 건 아니네요.”
모용희수가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짐짓 서운하다는 듯이 반호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반호진은 다른 의미에서 놀랐다.
그녀가 자신의 저의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은 몰라서였다.
“반 소협이 그리 말하니 나도 궁금하구먼. 무슨 일로 본가를 찾아왔는지 말일세.”
“소가주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척이를 말인가?”
“예.”
모용궁이 눈을 끔뻑였다.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반호진의 입에서 흘러나와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아들을 아나?”
“만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들은 적은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알려진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으음.”
모용궁이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이지만, 재능도 확실하게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용척은 그가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바꾸려고 했지만 이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한데 그런 모용척을 만나러 반호진이 이곳까지 왔다고 하자 모용궁은 의아했다.
“제가 따로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말인가?”
“예.”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에 모용궁은 물론이고 모용희수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손님이었고, 아들을 만나게 해 주는 게 딱히 큰일은 아니었기에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네. 지금 가 보지.”
“감사합니다.”
“고마울 것까지야. 오히려 못난 아들을 찾아와 줘서 내가 더 고맙네.”
“가자.”
“우리도?”
모용궁을 따라 일어선 반호진이 서조운과 선우방을 향해 말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선우방이 헛웃음을 흘리며 반문했다.
“싫으면 넌 안 가도 돼.”
“저는 가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응. 네가 핵심이야. 네가 없었다면 내가 나서야 했겠지만, 지금은 네가 있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맡겨만 주세요!”
자신이 필요하다는 말에 서조운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일이든 반호진에게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분명히 그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서조운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도 함께 가도 될까요?”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서조운이 일어나기 무섭게 팽화영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얼굴을 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 척이도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사실 누군가가 척이를 찾아온 건 몇 년 만이네.”
“그렇군요.”
모용궁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얼굴을 보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였다.
그리고 아비로서 모용척이 이제는 좀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벌써 십 년 가까이 방에서 홀로 서책만 봤기에 제발 밖에 나왔으면 싶었다.
“나도 간다.”
“그래.”
모두가 가는 분위기자 선우방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그 역시 함께 갈 생각이었다.
모용척이 궁금하기도 했고.
선우방도 모용척에 대해 듣기만 했지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모용척입니다.”
오랫동안 햇살을 받지 않았는지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의 청년이 정중하게 인사해 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음에도 학사풍의 청년, 모용척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일행들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소림의 반호진입니다.”
“선우세가의 선우방입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입니다.”
“엄청 오랜만이죠?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오랜만이에요, 모용 공자님.”
차례대로 인사해 오는 일행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던 모용척이 빙그레 웃었다.
팽수영의 말이 재미있어서였다.
“물론이죠. 두 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이긴 한데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자라셔서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칭찬인가요?”
“저는 칭찬입니다만,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죠?”
“성격은 여전하시네요.”
“사람은 쉽게 안 변하니까요. 하하하.”
무림세가의 후계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격에 팽화영의 두 눈에 의문이 가득 떠올렸다.
체격만 봐도 모용척이 무공수련을 등한시했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다른 형제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모용궁의 아들은 모용척뿐이었다.
그렇기에 팽화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용희수와 모용궁을 남몰래 쳐다봤다.
“학사가 되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나름 무공수련도 하고 있습니다. 단지 금기서화도 하고, 이것저것 연구하고 공부하는 게 있어서요.”
“하긴. 어릴 때부터 다재다능하셨죠.”
“인생은 한 번뿐이지 않습니까.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요.”
모용척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상당한 역사를 지닌 모용세가의 후계자임에도 그는 무공수련을 소홀히 하고 있음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친과 여동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빠.”
“왜?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하아.”
결국 보다 못한 모용희수가 나지막하게 모용척을 불렀으나 정작 당사자는 당당했다.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얼굴로 말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모용희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저는 왜 찾아오셨습니까?”
똑같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부친과 여동생을 일별한 모용척이 반호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가 반호진 때문이라는 걸 누구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제 허송세월은 그만 보내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예?”
모용척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을 껌뻑거렸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세상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알려 드리려 왔습니다. 세상이 꽤 재미있다는 사실을요. 물론 단순히 재미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조운아.”
“예. 형님.”
“모용 공자와 비무 한 번 해.”
“알겠습니다.”
모용척이 더더욱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비무를 하라고 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희생자인 서조운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해야 하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알겠다고 일어서는 모습에 모용척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일어나시죠.”
“……제가 왜 비무를 해야 합니까?”
“그건 해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지금 저에게 무례를 범한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어리광 부리는 건 그쯤 하시죠.”
파아아앗!
반호진이 싱긋 웃으며 갈무리해 두었던 존재감을 살짝 드러냈다.
오직 모용척만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자 반응은 확실했다.
모용척의 두 눈에 경악이 서렸다.
“허업!”
“장담컨대 실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낭비도 아닐 테고.”
경기하듯 숨을 들이쉬고는 좀처럼 내쉬지 못하는 모용척을 향해 반호진이 한마디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모르겠어.”
“저런 성격이 아니신데.”
“그러니까. 근데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잊혀진 천재와 재능을 막 개화한 천재의 대결이.”
얼빠진 얼굴로 반호진과 서조운, 선우방을 따라나서는 모용척의 뒷모습을 보며 팽화영이 눈을 빛냈다.
반호진의 말만 들어도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반호진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갑자기 비무라니.”
“무슨 생각일까요?”
“나도 모르겠구나. 일단은 지켜볼 수밖에.”
팽화영이 반호진의 속셈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모용궁, 모용희수 부녀도 반호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은 지켜보자는 쪽이었다.
잠시 후 모두가 연무장에 모였다.
‘이번에는 일찍 정신 차려야 해.’
연무장의 중앙에서 적당한 거리를 벌린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용척과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팔짱을 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서조운이 아니라 모용척에게 향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잊혀졌지만 모용척은 한때 천재로 유명했었다.
신동을 넘어 중원 전역에 천재성이 알려졌을 정도로 말이다.
한데 그 명성이 모용척에게는 독이 되었다.
재능이 너무 뛰어났기에 개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매몰되었다.
‘오랜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냈음에도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 줬었지.’
반호진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생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때의 모용척은 지금보다 늙었고, 지니고 있는 힘도 달랐다.
멸문지화를 입고 혼자만 살아남은 충격으로 각성한 모용척은 살귀가 되었는데 그 당시 그의 무력은 천하사패의 패주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조운의 재능도 엄청나지만 모용척의 재능 역시 어마어마하지.’
심지어 모용척은 절맥을 앓은 것도 아닌데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만 하늘은 전부 다 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모용척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난 대신 정신적으로 나약했다.
거기에 더해 다양한 재능을 주었기에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제정신을 차린다면 전생의 모용척보다 훨씬 강해질 거야.’
반호진이 모용세가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난 생에서는 너무 늦게 각성한 탓에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를 그냥 흘려보냈기에 기본기부터 시작해서 육체적으로 많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열아홉 살인 만큼 아직 늦지 않았다.
‘더불어 가족도 잃지 않게 되겠지.’
반호진의 시선이 살짝 기대하는 표정으로 모용척을 바라보는 모용궁, 모용희수 부녀에게로 향했다.
모용척이 허송세월을 보낸 대가로 두 사람은 정말 비참하게 죽었었다.
특히 모용희수가 말이다.
그런 만큼 반호진은 이왕이면 모용세가의 미래를 바꾸고 싶었다.
‘이번 생은 달라져야지. 겸사겸사 나도 좀 도와주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용척이 제정신을 차려야 했다.
반호진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이것 참. 당황스럽네요. 다짜고짜 비무라니. 근데 서 공자는 기분 안 나쁘십니까? 대뜸 비무를 시켰는데.”
“형님께서 시키신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엄청 신뢰하시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요. 저는 오히려 모용 소협이 순순히 비무를 받아들인 게 놀라운데요?”
“저도 그럴 수밖에 없어서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모용척이 미간을 좁혔다.
아까 느꼈던 반호진의 존재감을 곱씹는 것이었다.
또래라고는 믿기지 않던 압도적인 존재감에 모용척은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승부욕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반호진과 겨루고 싶었지만 우선은 눈앞에 있는 서조운부터 상대해야 했다.
“형님께 도전하려고요?”
“예.”
“엄청 깨질 텐데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