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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59화 (59/468)

제 22장. 잠자는 용. -02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서조운이 짐짓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오만 가지 걱정을 하는 선우방과 다르게 서조운은 흑룡강성에 간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살짝 기대를 하고 있었다.

집을 떠난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서조운은 어디를 가든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북해에도 다녀온 서조운에게 흑룡강성은 그리 멀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은 일정에 없다. 나중에는 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요녕성까지라는 말이네요.”

“여기도 충분히 멀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중원 전체를 놓고 따졌을 때 요녕성은 변방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보통의 무인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요녕성에 올 일이 없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도 가급적이면 안 하고 평탄하게 사는 게 좋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들어. 남들만큼, 남들처럼. 적당히라는 말이 괜히 어려운 게 아니지.”

호기롭게 말하는 서조운과 달리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고생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저기가 모용세가입니다.”

“누가 봐도 모용세가네요. 장원도 크고 정문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많고.”

길안내를 했던 호위무사 중 한 명이 익숙하게 앞장서서 걸어가다가 손가락으로 장원 하나를 가리키자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용세가의 위치를 정확히 몰라도 근처만 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팽수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과를 보게 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언니. 얼굴 좀 펴.

-돌아가면 아빠 잔소리 엄청 듣겠지?

-어쩔 수 없잖아. 우리는 할 만큼 했어.

-그치?

-응.

복잡한 심사가 뒤섞인 팽수영의 전음에 팽화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예 노력 안 한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정말 할 만큼 했다.

그런데도 안 됐다면 어쩔 수 없었다.

‘실패에는 세 사람 탓도 있어.’

팽수영이 남몰래 볼을 부풀렸다.

그녀는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한데도 실패한 데에는 세 남자의 탓도 분명히 있었다.

수련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엄청난 수련량을 채웠기에 꼬실 틈이 없었다.

‘심지어 반 공자가 제일 열심히 했지.’

첫인상과 다르게 반호진이 수련에 임하는 자세는 말 그대로 진지했다.

분명 평소의 표정이나 태도는 딱히 수련을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막상 수련을 시작하면 무섭도록 몰입했다.

평소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수련하는 팽수영조차도 집중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죄다 미친 듯이 수련하는데 마음을 어떻게 훔쳐. 그렇다고 옷을 벗을 수도 없고.’

애초에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세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팽수영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관계에 진전이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팽수영은 모용세가의 정문이 보이자 모든 걸 내려놓았다.

“어서 오십시오. 모용세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용세가의 정문에 다가가자 지긋한 나이의 중년인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포권을 해 왔다.

그러자 여기까지 길안내를 했던 호위무사도 마주 포권을 했다.

안면이 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호진 공자님. 선우방 공자님. 서조운 공자님.”

“안녕하세요.”

초면임에도 정확히 세 사람을 알아보는 중년인의 모습에 선우방과 서조운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늘 그렇듯이 덤덤하게 마주 인사했다.

“저는 모용세가에서 총관을 맡고 있는 모용정이라고 합니다.”

상반된 일행의 반응에도 모용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에 한해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에 모용정은 여유롭게 웃으며 세 사람에 팽화영, 팽수영 자매와도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허허. 감사합니다. 나름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우선 숙소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다음에 가주님을 뵈러 가시죠.”

다른 이도 아니고 총관인 모용정이 직접 맞아 주자 정문 앞에 줄을 서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궁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정과 함께 나온 모용세가의 무사들 때문에 직접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친구가 잘나가니 좋네. 모용세가에서 이렇게 대접도 받고.”

“나 때문만은 아니지. 하북팽가와 같이 와서 그렇지.”

“이럴 때는 또 겸손하단 말이지?”

“겸손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눈썹을 씰룩이는 선우방을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요즘 들어 은근히 놀리는 데 맛을 들린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걸 나쁘게 보지 않았다.

성격이 밝아졌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확실히 명문세가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고나 할까요.”

한편 서조운은 이번에도 역시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선우세가와 하북팽가를 찾았을 때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장원 곳곳을 훑어봤다.

“서가장도 있었어.”

“그렇긴 한데, 차이가 좀 나죠. 하하하.”

“잘 봐 뒀다가 나중에 개보수하게?”

“예. 장원은 어떻게 보면 가문의 얼굴이잖아요. 과거의 성세를 되찾으면 얼굴도 본래대로 돌아가야죠. 물론 더 좋게요.”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가장을 서조운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였다.

“경쟁자가 늘어나면 안 좋은데.”

“어쩔 수 없죠. 무림이라는 세계는 무한히 경쟁할 수밖에 없는 세계니까요.”

“지금의 발언, 상당히 도발적으로 들리는데.”

“틀리지는 않습니다. 흐흐흐!”

서조운이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으나 눈빛은 진지했다.

“그 도전, 받아 주지.”

“오 년 후, 십 년 후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이어지는 서조운의 말에 반호진이 자기도 모르게 뜨끔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지.”

“그나저나 심장이 두근두근하네요.”

“모용 소저 때문에?”

“예. 흐흐흐!”

서조운은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기에 서조운은 부푼 가슴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꼭 지금 보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에이. 가주님을 뵙는 자리인데 설마 없을까요? 팽가의 두 분도 계신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선우방이 반호진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모용세가주와 만난다고 해서 꼭 모용희수가 나올 거라는 보장이 없어서였다.

다른 곳에 잠시 갔을 수도 있고, 만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다 만날 수 있지는 않았다.

“너무하세요. 저희는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저희를 잊으신 건 아니죠?”

“에이. 그럴 리가요. 이건 형들이 몰아간 거예요.”

팽수영과 팽화영이 섭섭하다는 듯이 말하자 서조운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서조운의 부정에도 두 자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새치름한 얼굴로 그를 흘겨봤다.

“허허허. 기대하셔도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도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오오오!”

“얘가 너무 가벼워.”

“내 말이.”

은근슬쩍 끼어드는 모용정의 말에 서조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모습에 반호진과 선우방이 혀를 찼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스스로가 받을 것이기에 반호진과 선우방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어서 오게.”

배정받은 별채에 짐을 푼 반호진은 곧바로 모용세가의 집무실인 가주전으로 향했다.

별채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용정이 안내를 해 주었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림의 반호진입니다.”

“선우세가의 선우방입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이에요, 가주님.”

“안녕하세요.”

반호진을 시작으로 일행들이 짧게 읍을 했다.

인원이 적지 않기에 다들 짧게 인사했던 것이다.

“반갑네.”

“안녕하세요?”

모용궁이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끝내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모용희수가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련화라는 별호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서조운의 얼굴이 빨개졌다.

엄청난 미인인 모용희수가 친근하게 맞아 주자 이상하게도 머리로 피가 쏠렸다.

“저러다 터지겠는데?”

“흥흥!”

하북팽가에서나 자신한테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에 팽수영이 콧김을 내뿜었다.

너무나 차이 나는 반응에 흥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조운은 팽수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모용희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모용세가의 모용희수라고 해요.”

“여, 영광입니다!”

“얼씨구.”

허리를 좀처럼 펴지 못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선우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은 남자로서 너무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였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모용희수를 처음 봤을 때 그 역시 충격을 받았던 것 사실이었으니까.

따악!

“정신 차려. 지금의 모습이 결례라는 걸 몰라?”

“죄, 죄송합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모른 채 헤벌쭉 웃기만 하는 서조운의 머리에 반호진이 꿀밤을 놓았다.

이대로 놔두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 같아서였다.

지금이야 처음이니 귀엽다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모용희수가 불편해할 게 뻔했다.

“내가 다 부끄럽다.”

“주의할게요.”

이어지는 선우방의 말에 서조운이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자신의 추태가 떠올라서였다.

“괜찮아요. 은근히 음탕한 눈빛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걸요.”

“그런 이들도 있기는 했죠.”

“막상 쳐다보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지만요.”

서조운의 사과를 받아 주며 모용희수가 생긋 웃었다.

음흉하게 그녀의 몸을 훑는 이들에 비하면 서조운은 순수한 편이었다.

실제로 집 밖에 나온 게 이번이 처음임을 알고 있기도 했고.

“당당하게 쳐다보는 이들도 있던데요.”

“맞아요. 그래서 외출을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소림사에 갔을 때 선우방도 함께 있었기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모용희수를 비롯해서 독봉과 매봉(梅鳳)이 남자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직접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예의를 지키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고 무례하게 집적거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나마 네가 모용 소저와 동갑이라서 이 정도로 넘어간 거야.”

“어머? 제 나이를 알고 계셨나요?”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것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놀랐는데요?”

모용희수가 눈을 반짝이며 반호진을 쳐다봤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자신의 나이를 알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관심을 표현해도 대놓고 모른 척하던 게 반호진이었기에 모용희수는 진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의미로 놀랄 게 있습니까?”

“물론이죠. 사실 소림사에서는 저를 있는 듯 없는 듯 보셨잖아요.”

“그랬었습니까?”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보지 못했다.

선우방이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는 것을.

“같이 있었던 선우 공자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는데요?”

“흐음.”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일은 따로 있죠. 반 공자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줄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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