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장. 잠자는 용. -01
팽만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반호진과는 달리 크게 선심 쓴다는 투로 말하자 서조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서조운은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열일곱이면 그리 빠른 것도 아니야. 그리고 지금 당장 하라는 것도 아니고. 결혼 날짜 등등 양가의 의견을 조율하면 빨라도 내년은 되어야 할 테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진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가를 거절하는 건가?”
팽만철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단순히 눈을 크게 뜬 것뿐인데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팽만철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세는 반호진의 손짓 한 번에 흩어졌다.
“본인이 싫다는데 너무 강압적인 거 아닙니까?”
“끄응!”
기세를 일으켰음에도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치켜뜨는 서조운의 모습에 팽만철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을 당할 줄은 몰라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둘 중 한 명은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두 사람 다 거절이었다.
“하실 말씀은 다 하신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잠깐만.”
“아직 남았습니까?”
“요녕성은 셋 다 초행이지 않나. 길잡이가 있는 게 여러모로 나을 거야. 인원을 준비시켜 두었으니 같이 가게.”
“꼭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만.”
반호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길잡이를 준비시켜 두었다는 말에 무언가가 떠올라서였다.
“헤매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화영이를 안전하게 데려다준 보답이라고 생각하게.”
팽만철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과 말투로 보건대 반호진이 눈치를 챈 것 같기에 팽만철은 황급히 방을 나섰다.
반호진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정문으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선우방과 서조운도 예상했다는 듯이 뭉쳐 있는 여덟 명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각각 세 명의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서 팽화영과 팽수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데 두 여인 다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웃는 둘의 모습에 반호진은 대놓고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팽만철을 노려봤다.
등이 따가울 정도로 째려봤던 것이다.
“마침 안 그래도 모용세가에 전달할 게 있었거든. 전서응으로는 무리인지라 어떻게 할까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세 사람이 모용세가에 간다고 하니 함께 가게. 길 찾는 건 걱정하지 말고. 두 명이 요녕성을 자주 왕복해서 길은 확실하게 알고 있어.”
“이런 선의는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자, 가게. 너희들도 조심히 다녀오고. 내가 했던 말 명심하고. 알았지?”
“네.”
반호진의 말은 아예 듣지 않겠다는 듯이 팽만철은 자기 할 말만 후딱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거 상황이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 같은데.”
“그러게요.”
“곰인 줄 알았는데…….”
선우방이 미간을 좁혔다.
뒤통수를 맞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얼얼했다.
“좋게 생각하자고. 어쨌든 모용세가까지 찾아가기는 편할 거 아냐.”
“그렇습니다.”
팽화영과 함께 세 사람을 찾아왔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전후사정을 모두 다 알고 있기에 그는 긴장했다.
반호진의 성격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심지어 실력도 뛰어났기에 중년인은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된 거 별수 있나요. 형님 말마따나 좋게 생각해야지. 두 분 소저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온 것 같은데.”
“호호호.”
서조운의 말에 팽수영과 팽화영이 다시 한번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들로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였다.
“제일 빠른 길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시길.”
번거롭고 귀찮아서 그렇지 두 여인을 꼭 데려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모용세가까지는 말이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출발했다.
‘마차가 없는 걸 보면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고.’
팽화영과 팽수영 둘 다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최대한 가볍게 준비를 한 상태였기에 반호진은 새삼 팽만철이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 보니 분하네.
-뭐가?
-우리 너무 짐짝 취급받는 거 아냐?
하북팽가를 벗어난 팽수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동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환대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냉대를 받을 줄은 몰랐기에 팽수영이 볼멘소리를 냈다.
-짐짝이란 말이 틀리진 않지. 원래는 셋이서만 가려고 했었는데. 논의가 아예 안 된 일이잖아. 막말로 우리가 모용세가에 가야 하는데 산동악가의 사내들이 무작정 합류한다고 생각해 봐.
-으윽! 끔찍해!
팽수영이 전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비명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거봐. 언니도 싫잖아.
-이건 비유가 너무 심하잖아. 우리가 산동악가 정도는 아니잖아? 적어도 치근덕대지는 않잖아.
팽수영이 입술을 더욱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산동악가주의 자식들과 비교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근데 그건 우리 생각이잖아. 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그 정도일 수도 있지.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일단 우리는 어여쁜 여인이잖아.
-우리 둘만 함께 가는 건 아니지.
-넌 너무 지나치게 객관적이야. 때로는 주관적일 필요가 있어.
팽수영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단순히 합류만 한 게 아니었다.
부친이 따로 지시한 게 있었기에 팽수영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렇게 신신당부 하셨는데.
-그래서 언니가 보기에는 가능할 거 같아?
-……힘들지. 바늘로 찌를 틈도 안 보이는데.
팽수영의 시선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세 청년에게로 향했다.
출발한 지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셋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다리가 아프지 않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다.
-아빠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
-그래도 하는 시늉은 해야지. 감시자들이 있는데.
-아저씨들더러 감시자라니. 언니 말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호위무사들이지만 동시에 감시자들인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부터 모든 행동들을 보고 팽만철에게 보고할 게 뻔하기에 팽수영은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긴 하지.
-넌 어때? 자신 있어?
-없지. 언니 말마따나 바늘이 들어갈 틈도 안 보이잖아. 애초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거 같은데.
-절에서 자라서 그러나? 보아하니 진짜 희수 때문에 모용세가에 찾아가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희수가 목적인 건 서 공자인 듯?
팽화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가 봐도 모용희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서조운이어서였다.
그리고 선우방도 은근히 기대하는 듯했다.
-역시 아직 어려.
-그 대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지. 진짜 압도적인 재능이야.
-작은오빠가 너무 방심했어.
-무인에게 있어 방심은 죄야. 모든 탓을 방심에 돌리면 안 돼. 달리 말하면 안목이 그거밖에 안 된다는 뜻이니까. 요즘에 너무 건성으로 수련하기도 했고. 난 아빠한테 작은오빠가 한마디 들을 것 같았어.
팽화영이 지극히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오빠지만 한심한 건 사실이었다.
사실 누구보다 좋은 환경 속에서 수련한 게 팽주영이었다.
그런데도 팽주영은 노력하기는커녕 안주하고 나태하게 시간을 보냈다.
-나도 인정. 작은오빠는 패기가 없어. 꿈도 없고. 아무리 둘째라지만 그래도 무인으로서의 패기가 있어야 하는데.
-패기는 저기 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반 공자는 아닌 거 같은데? 분위기만 보면 하루하루 그냥저냥 살아가는 거 같아. 실력이 엄청나서 그런가?
-언니가 잘 몰라서 그래. 하루만 지켜보면 언니도 알게 될 거야. 반 공자님이 어째서 그렇게 강한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사람이 반 공자님이야. 언행불일치의 화신이라고나 할까?
팽화영이 씨익 웃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팽수영과 같이 생각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련은 하지 않고 설렁설렁 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래? 뭐, 지켜보면 알겠지.
-시간은 많으니까.
-모용세가에 갔다가 언제 돌아오려나.
팽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녕성과 하북성이 맞닿아 있다고 하나 모용세가와 하북팽가의 거리는 절대 가깝지 않았다.
더욱이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은 지리적으로 요녕성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기에 왕복 거리가 상당했다.
-별수 있나. 우리는 아빠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래도 얻는 게 전혀 없지는 않으니까.
-너야 비무라도 실컷 할 수 있지만 나는 뭐 해야 하나.
팽수영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팽만철이 목표로 정해 준 서조운을 슬쩍 훔쳐봤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남자라기보다는 남동생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외모는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어. 한 이 년만 지나면 여자깨나 울리겠어.’
아직은 소년미가 남아 있지만 몇 년만 지나면 미청년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게 팽수영의 눈에는 보였다.
거기다 반호진과 달리 여자도 좋아하는 듯하니 화화공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가장 뒤떨어지는 건 선우 공자인데 그런 이에게 큰오빠가 졌으니.’
팽수영의 시선이 선우방에게 제법 오래 머물렀다.
사실 처음 대련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이런 이변이 일어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팽추영이 사룡에 꼽히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가장 근접해 있던 무인이었다.
거기다 소림사에서 돌아온 후 열심히 수련했기에 당연히 선우방 정도는 쉽게 제압할 거라 예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분명 그저 그런 후기지수였는데.’
두각은커녕 별호도 없던 게 선우방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꽤나 실력자였다.
팽수영은 그것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반 공자로 인해서 성장한 건가? 서 공자도 반 공자가 살려 줬고.’
결국 시선의 종착점은 반호진이었다.
팽수영은 오만가지 심사가 뒤섞인 눈으로 반호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렇게 따지면 아빠의 욕심도 이해가 가긴 해. 근데…… 이길 수 있을까?’
같은 여자지만 모용희수의 미모는 차원이 달랐다.
미모에도 천외천이 있다면 삼봉이 그러했기에 팽수영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모용희수와 나란히 서서 경쟁할 자신이 말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모용희수의 미색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니 아빠가 모용세가에 도착하기 전에 결판을 내라고 한 거겠지.’
팽수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부친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덤덤하게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에 들어서는 반호진과 달리 서조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성 하나의 차이인데 많은 것들이 하북성하고는 달라서였다.
변방이 괜히 변방이 아니라는 걸 직접 보여 주는 것 같은 풍경에 서조운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복색도 그렇고 다르긴 하네.”
“흑룡강성은 또 완전 다를 거 같아요.”
“내 생각도.”
은근슬쩍 주변을 살펴보던 선우방이 살짝 눈알을 굴려 반호진을 쳐다봤다.
이번 여정은 오직 반호진의 결정에 따라 목적지가 정해졌기에 혹시나 하고 그의 표정을 살펴본 것이었다.
“흑룡강성이라.”
“거기까지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