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장. 욕심이 과하시네. -03
내상이 더 심했음에도 선우방은 서조운보다 먼저 운기요상을 끝냈다.
이런 내상이 처음인 서조운과 달리 그는 경험이 많아서였다.
그리고 정기신이 조화로웠기에 회복도 비례해서 빠른 편이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냐? 그래도 본가를 생각해야지.”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야 발전도 있는 거고.”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 같아서는 하나 챙겨 가고 싶은 얼굴인데?”
“그럴 수만 있다면. 내상약도 어떻게 보면 비전으로 만든 거니까.”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하북팽가에서 순순히 그렇게 놔둘 리는 없었다.
“나도 하나 받을 걸 그랬나. 난 심지어 도왕이랑 비무를 했는데.”
“자격은 충분하지. 근데 너 전력 다 안 했지?”
“나름 열심히 했는데?”
“나름?”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나름이라는 두 글자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응. 그 정도 했으면 됐지.”
“도왕을 상대로 나름 열심히 했다라. 나는 언제쯤이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의외로 빠를 거 같은데? 네 스스로도 느끼고 있잖아?”
“매일 자기 전에 생각하고 있어. 널 따라 나온 게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후후후.”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역시 자기객관화를 잘하는 성격답게 그의 의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더 넓은 세상을 알려 주었으니까.”
“꼭 내 덕만은 아니지. 결국 나아갈지, 멈춰 설지 결정하는 건 너니까. 지금까지 네가 얻은 모든 것들은 네 선택으로 인한 결과야.”
“그냥 알았다고 하면 덧나냐?”
“사실이니까.”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선우방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 이 순간 웃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동시에 선우방은 다짐했다.
지금은 힘들지라도 언젠가는 반호진의 옆에 나란히 서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받은 걸 조금이라도 돌려주겠다고 생각했다.
“명문세가의 내상약은 다 이런가요? 효과가 엄청 좋네요.”
“좀 더 낫거나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얼추 비슷할 거야.”
“명문세가로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참 많네요.”
운기요상을 끝낸 서조운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상약 하나만으로도 명문세가와 서가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힘든 분야이긴 하지. 아예 똑같이 만들지 않는 이상.”
“베끼는 게 빠를 것 같기는 해요. 근데 이건 양심상의 문제라.”
선우방의 말에 서조운이 잠시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복제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양심의 문제도 있지만 후대의 자긍심을 위해서라도 복제는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나씩 차근차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만큼 만들어져 있겠지.”
“그렇겠죠?”
“이기니까 어때?”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비무에서 이기고 엄청나게 기뻐하는 걸 봤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물었다.
“끝내주죠. 특히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더 좋았어요.”
“이 공자는 이동하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하던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십 년 훌쩍 넘게 수련했는데 핏덩이에게 졌으니까.”
선우방이 짐짓 불쌍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팽주영이 느꼈을 좌절감이 어느 정도인지 그는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사룡들과 비무했을 때마다 느낀 게 바로 그 좌절감이었기에 선우방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팽주영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재능의 차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한계는 정해지는 법이야. 더구나 하북팽가의 이 공자면 유무형의 지원이 얼마나 대단한데. 그럼에도 저 정도밖에 안 되는 건 태만해서야.”
“냉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절박함이 없더라고요. 그냥 대충대충. 보여 주기 식으로 수련한 거 같더라고요. 잘난 힘이 막히니까 아무것도 못 하던데요.”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선우방과 달리 서조운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전적으로 반호진의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내일 출발할 거니까 푹 쉬어 둬.”
“저녁 식사 때 보니까 쉽게 보내 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어쩔 거야. 우리가 가겠다는데.”
선우방이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반호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결정이지 팽만철의 생각이 아니었다.
“얼른 가야죠. 모용세가에.”
“너 백련화 때문에 그러지?”
“에이. 설마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서조운이 정색하며 말했지만 반호진과 선우방은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언행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이가 서조운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 두지. 일단 쉬어. 밤도 늦었으니.”
“예.”
“내일 보자고.”
서조운과 선우방이 방을 나서자 반호진도 옷을 갈아입고는 침상 위에 앉았다.
하지만 바로 잠들지는 않았다.
대신 명상 겸 심상수련에 들어갔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팽만철이 반호진 일행을 따로 불렀다.
갈 때 가더라도 차는 한 잔 하라고 꼬드겼던 것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저희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직 차도 안 따랐는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가주님은.”
“다 그런 건 아니네. 바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지.”
반호진의 말에도 팽만철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제 나눈 대화 덕분인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르륵.
팽만철은 차호를 들어 세 사람에게 차례대로 차를 따라준 후 자신의 찻잔에도 적당히 채웠다.
이윽고 은은한 차향이 방 안에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괜찮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네.”
“말씀하시죠.”
이유 없이 자리를 만들 리 없다는 걸 여기에 앉은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용세가에는 왜 가려는 것인가? 하북성에서야 요녕성이 가깝지 소림사나 선우세가에서는 멀지 않나?”
“원래 목적지가 요녕성이었습니다만. 하북팽가는 팽 소저 때문에 들른 것입니다. 가는 길이기도 했고.”
“혹 백련화 때문인가?”
“그건 왜 묻는 겁니까?”
차를 음미하던 반호진이 고개를 들어 팽만철을 응시했다.
그런데 반호진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마치 그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이 쳐다봤다.
“개인적으로 궁금하다고나 할까. 안면은 있어도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들어서 말이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
직시하는 반호진의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기에 팽만철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겸사겸사 두 사람의 반응도 살펴볼 겸 해서.
그러나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둘 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직 친하다고 말할 정도의 사이는 아닙니다. 다만 모용세가에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요.”
“어쨌든 그게 모용희수는 아니라는 말이군.”
성급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팽만철이 알고 싶은 건 모용희수와의 관계였지 반호진이 만나고자 하는 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팽만철은 입가를 씰룩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자연스럽게 만날 것 같기는 하지만. 만나고 싶어 하는 일행도 있어서요.”
하지만 팽만철의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설레어하는 서조운의 표정을 보자 반호진이 말한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내심 팽수영의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팽만철이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커험!”
그래서 팽만철은 불편한 기색이 가득 담긴 헛기침을 했다.
하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서조운은 그저 헤벌쭉 웃고만 있었다.
“물어보실 건 다 물어보신 겁니까?”
“아직 남았네. 흠흠! 자네, 화영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인으로서 묻는 겁니까, 아니면 여인으로서 묻는 겁니까?”
“당연히 후자지. 무인으로서의 화영이에 대해서 자네에게 물어볼 이유가 뭐가 있겠나.”
“되게 단도직입적이시군요.”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성격이 급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서조운과 선우방 역시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이런 주제는 돌려 말하면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거든. 그럴 바에는 말을 확실하게 하는 게 낫지.”
“그렇긴 하죠.”
“대답을 듣고 싶은데.”
“아직 생각 없습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단칼에 거절하는 반호진의 대답에 팽만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그는 이런 대답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팽화영이 누구던가.
그의 막내딸이자 하북팽가의 여식이었다.
혼처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은 배경을 지니고 있는 게 팽화영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끄응! 굳이 그렇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나? 남녀사이라는 게 보다 보면 정이 들 수 있고, 생각이 바뀌기도 하지 않나.”
“글쎄요. 불확실성에 기대기보다는 확실하게 다른 상대를 찾아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팽만철의 눈이 번뜩였다.
최소한 연적은 없는 듯해서였다.
하지만 최악만 아닐 뿐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또 아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네만.”
“그건 가주님의 생각입니다.”
“만약 뜻을 바꾸기 전에는 못 나간다면?”
“못 나갈 것 같습니까?”
찌릿!
팽만철이 사나운 눈빛으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강압적으로라도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안광에도 반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도리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허참!”
“적어도 저는 정략결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황소고집이야.”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강요하는 건 가주님이죠.”
“한마디도 안 져.”
질린 표정으로 팽만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힘으로 찍어 누르고 싶었지만 그는 내심 느끼고 있었다.
반호진이 어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그가 질 리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쉽게 제압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너무 잘나도 문제야. 적당히 잘났으면 힘으로 밀어붙였을 텐데.’
팽만철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반호진이 크게 욕심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애매모호한 대답보다는 확실한 게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해서요.”
“이참에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건 어떤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포기하지 않으시는군요.”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지금은 별다른 감정이 없다가도 나중에는 생기기도 하는 게 남녀사이니까.”
생긴 것 답지 않게 끈덕진 팽만철의 모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서조운과 선우방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도왕이 이렇게 매달릴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선우방은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얘기하죠.”
“진짜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
“말씀드렸다시피 확실한 걸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그럼 자네는 어떤가?”
쿨럭!
갑자기 팽만철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던 서조운이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사레가 걸릴 정도였다.
“예?”
“아, 화영이 말고 수영이를 말하는 거다. 수영이가 연상이긴 하나, 두 살 차이는 뭐 큰 차이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