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장. 개화기(開花期). -03
“쿨럭!”
동시에 선우방도 선혈을 토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종일관 자신만만하던 팽추영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반면에 선우방은 비록 검에 의지하기는 해도 꼿꼿이 서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팽추영은 진기의 역류로 혼절한 상태였다.
“마, 말도 안 돼…….”
그 광경에 팽추영의 동생이자 이 공자인 팽주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우방의 실력에 대해서는 팽주영도 잘 알고 있었다.
명문세가 출신이기는 하나 딱히 특출 난 것 없는, 그저 그런 실력을 가진 후기지수가 바로 선우방이었다.
즉 팽추영을 쓰러뜨릴 실력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는 선우방의 승리였다.
팽주영은 그게 믿기지가 않았다.
“방이 승.”
적막이 내려앉은 연무장에 반호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그가 직접 판정을 내린 것이었다.
“역시 방이 형! 전 형이 이길 줄 알았어요!”
“흐, 흔들지 마. 머리 울린다.”
“헤헤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저 자식의 콧대를 눌러 준 게 중요하죠!”
“뭐라!”
“시끄러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팽주영이 형인 팽추영을 저 자식이라고 표현한 서조운을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야 했다.
동갑내기인 반호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어서였다.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드는 느낌에 팽주영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고생했다.”
“흐흐.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잘 알지. 네가 한 고생을.”
서조운의 부축을 받으며 온 선우방의 어깨를 반호진이 웃으며 두드려 주었다.
그가 한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반호진은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이제는 제 차례군요.”
“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선우방을 반호진에게 넘긴 서조운이 서늘한 눈빛으로 팽추영을 챙기고 있는 팽주영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대뜸 대련을 신청했다.
“이 공자께 대련을 신청합니다.”
“뭐?”
“피하실 겁니까?”
반호진의 시선을 피할 겸 팽추영을 들쳐 메고 팽만철과 여동생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오던 팽주영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대련을 하자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조운은 진지했다.
“나와 대련을 하자고?”
“예. 힘드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서조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관대한 표정을 지었다.
피하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팽주영이 이를 드러냈다.
반호진에게 꼬리를 내린 것도 짜증 나는데 별것도 아닌 녀석이 어쭙잖은 도발을 하자 팽주영은 여동생들에게 형을 넘기고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좋아. 네 도전 받아 주지.”
“감사합니다.”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이 팽주영이 말했으나 서조운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말은 고맙다고 했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얼굴에 팽주영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이것도 재미있겠군. 근데 두 번 연속 나에게 못난 모습은 보이지 마라.”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팽만철을 향해 팽주영이 호기롭게 말했다.
반호진은 살짝 겁이 났지만 서조운은 아니었다.
딱 봐도 애송이 티가 철철 났기에 팽주영은 살벌한 한광을 뿌려 대며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비무가 시작됐다.
까가가강!
시작과 동시에 두 사람의 거패도와 검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딱 봐도 체격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는데 의외로 대결은 박빙이었다.
팽주영이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 서조운을 찍어 누르려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체구는 작아도 막대한 극양지기를 가진 서조운은 그걸 활용해 오히려 팽주영을 몰아붙였다.
“크으윽!”
“흐읍!”
모두가 놀랐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당황한 사람은 팽주영이었다.
당연히 힘에서 밀릴 것이기에 선우방처럼 최대한 정면승부를 피할 줄 알았는데 그건 오판이었다.
도리어 죽기 살기로 정면대결을 걸어오는 서조운의 모습에 팽주영은 이를 악물었다.
평생을 사내답게 살아온 그였기에 걸어온 싸움을 피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우드득!
그래서 팽주영은 전신의 힘이란 힘은 모조리 끌어올렸다.
근력은 물론이고 내공 역시 전부 다 끌어올려서는 그대로 눈앞에 있는 서조운을 향해 내뿜었다.
적어도 힘 대 힘의 싸움에서는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꽈아아앙!
팽추영과 마찬가지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도기가 허공을 갈랐다.
도객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초식인 일도양단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팽주영은 지금 이 순간도 서조운을 얕잡아 봤다.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과신했던 것이다.
“크아악!”
정면대결의 다른 이름은 자존심대결이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그 어떤 방식보다 승패가 확실했다.
부딪치다 보면 결국 한 쪽은 무조건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허참.”
좀 전의 팽추영과 마찬가지로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구는 둘째 아들의 모습에 팽만철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그대로 적중해서였다.
“크헝헝헝!”
다만 한 가지 다행인 건 둘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아서 그런지 팽추영처럼 기절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뒤로 날아가 두 바퀴를 구른 팽주영은 곧장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튕겨 나간 게 더없이 치욕적이라는 듯이 얼굴을 잔뜩 일으킨 채로 말이다.
“이렇게 나와야지!”
그런데 그 살기등등한 팽주영의 기세에도 서조운은 기죽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투지를 끌어올리며 무지막지한 기운이 서린 검을 휘둘렀다.
검기성강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마어마한 극양지기로 인해 그 직전의 단계까지 닿은 검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팽주영의 거패도를 후려쳤다.
꽈아아앙!
다시 한번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반동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몸이 밀려 바닥에 깊은 고랑을 만들지언정 둘 다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꽝! 꽝! 꽝! 꽝!
오히려 둘 다 이를 악물고 무기를 휘둘렀다.
생사결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악착같이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 결과 곧 우열이 가려졌다.
아직 평온한 서조운의 안색과 달리 팽주영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시뻘게졌다.
“케엑!”
결국 내상을 억누르지 못한 팽주영이 시뻘건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졌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바닥을 나뒹굴었던 것이다.
“크하하하!”
그러나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서조운의 몸 상태도 썩 좋지는 않았다.
팽주영처럼 각혈을 하진 않았지만 입가에는 피가 가득했다.
토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역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조운은 파안대소했다.
“크큭! 내가 이겼다!”
데굴데굴 굴러가 대(大) 자로 뻗어 있는 팽주영을 힐끔거린 서조운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두 팔은 물론이고 두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음에도 서조운은 양쪽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서 승리를 만끽했다.
반면에 누워 있는 팽주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패배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이럴 수가…….”
그리고 그 심정은 셋째이자 맏딸인 팽수영도 마찬가지였다.
큰오빠에 이어 작은오빠도 패배하자 팽수영의 눈빛이 멍해졌다.
하지만 팽화영은 달랐다.
그녀는 이리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충격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녀석들이로구나.”
승리한 서조운에게 다가가 같이 기쁨을 만끽하는 선우방의 모습에 팽만철이 헛웃음을 흘렸다.
전폭적인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너무나 미미한 것 같아서였다.
특히 그는 장남인 팽추영에게 큰 실망을 했다.
사룡은커녕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선우방에게 패했다는 게 팽만철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 기색을 읽어서일까.
정신을 차린 팽추영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이다.
“폐관수련 해라.”
“……예.”
“주영이도 데리고.”
“알겠습니다.”
부친의 명을 거절할 자격은 없었기에 팽추영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 스스로도 지금 더없이 분하기도 했고.
특히 만만하게 봤던 선우방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기분, 생각 절대 잊지 말고 곱씹어라. 열등감에 빠지지 말고 자양분으로 삼아라.”
“그리하겠습니다.”
스윽.
할 말을 다한 팽만철은 고개를 돌려 반호진을 쳐다봤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반호진은 승리에 감격하는 두 일행과 달리 지극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 두 사람에게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희에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만 살짝 돌려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팽만철이 씨익 웃었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니야. 아직 우리에게는 대결이 하나 더 남아 있으니까.”
“아빠?”
두 사람의 대화를 예의주시하던 팽화영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 한 말의 의미를 그녀는 단박에 파악했기에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도왕이 나설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자격은 충분하지. 녹림대군을 혼자서 쓰러뜨린 무인이 아닌가. 그 정도 실력자라면 나와 능히 어울릴 자격이 있지. 혹시 내가 두려운가?”
“씨 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두 아들은 피가 제대로 이어진 모양입니다.”
“크하하하!”
여전히 당돌한 반호진의 대답에 팽만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반호진 또래 중에 이렇게 그를 대하는 이가 없었기에 색다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건 흥미로움이었다.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데요.”
“그런 일은 없다. 나는 도왕이다.”
“훗.”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분명 도왕이라는 이름은 크고 무거웠다.
그러나 나중이 되면 도왕이라는 이름도 색이 바랬다.
“너야말로 자신감이 과한 것 아니냐? 녹림대군은 강호에서 실력순으로 줄을 세우면 마흔 명 안에 들어올까 말까 한 실력이다.”
“그렇겠죠. 근데 아마 가주님이 생각하는 이들과 제가 생각하는 이들은 다를 겁니다.”
“뭐라고?”
“원한다면, 어울려 드리지요.”
“허참.”
팽만철은 물론이고 팽수영과 팽화영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도왕과의 대결이었다.
금보따리를 싸 들고 와서 비무 한 번 해 달라고 해도 안 될 마당에 오히려 자신이 선심 써서 어울려 주겠다는 듯이 말하자 세 부녀가 동시에 헛웃음을 흘렸다.
“오오! 역시 형님!”
“잘하고 와라.”
그리고 그 소식은 막 다가온 서조운과 선우방의 귀에도 전달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반호진과 팽만철의 대결에 두 사람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도왕의 무공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자 둘은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지었다.
“가시죠.”
“크크! 그래.”
끝까지 일관된 반호진의 모습에 팽만철이 피식 웃으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두 아들의 괴력에 의해 바닥 곳곳이 제법 깊게 파여져 있었으나 팽만철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이보다 더한 악조건에서도 생사투를 벌였던 그였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양호한 상태였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선배로서 선수 정도는 양보해 주지. 원래는 삼 초식을 양보해 주려고 했는데, 너무 당돌해서 그건 못 해 주겠어.”
“상관없습니다.”
“크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