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53화 (53/468)

제 20장. 개화기(開花期). -02

흥분한 듯 온몸에서 사나운 기세를 내뿜는 팽추영을 향해 팽화영과 팽만철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중재에도 팽추영은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반호진과 한 번 붙어 보고 싶었다.

소림사에서는 기회가 없었지만 이곳은 하북팽가였다.

‘남궁광을 이긴 건 인정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하지만 녹림대군은 달라.’

팽추영은 세간의 소문을 믿기 힘들었다.

분명 반호진이 강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녹림대군을 쓰러뜨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남궁광과 녹림대군은 말 그대로 격이 달랐다.

녹림십팔채의 총표파자라는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팽추영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남들이 모르는 비겁한 수를 썼을 거야. 아니면 차륜전을 하고 마지막에 나섰다든가. 금가장의 후계다툼을 생각하면 일부러 그렇게 소문을 냈을 가능성도 있지. 아니, 그걸 떠나서 내가 이기면 지금의 명성을 내게로 전부 다 가져올 수 있다.’

팽추영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룡이라 불리는 남궁광은 후기지수 중 최강이라 불리는 실력자였으나 팽추영은 자신의 실력이 그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좀 더 낫다고 생각했고.

거기다 본가로 돌아와 절차탁마했고, 성과가 있었기에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

“저와 대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그렇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팽추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하대를 했다.

그러자 서조운과 선우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너무 무례한 것 같아서였다.

특히 서조운이 잡아먹을 듯이 팽추영을 노려봤지만 정작 그는 온 신경이 반호진에게 향해 있었기에 그 눈길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생각이 없는데.”

“뭐라!”

“큰오빠!”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지르는 팽추영의 모습에 팽화영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연신 미안한 표정으로 반호진과 일행을 쳐다봤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기에 팽화영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팽추영은 멈출 기색이 아니었다.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저희는 손님으로 왔는데.”

“맞습니다.”

그때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팽만철을 보아하니 말릴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은근히 기대하는 기색을 읽은 선우방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말했다.

“너에게 한 말 아니다.”

“허!”

그러나 선우방의 말을 팽추영은 단칼에 잘랐다.

자신과 반호진의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 안하무인한 모습에 선우방을 거들었던 서조운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멋대로도 이런 제멋대로가 없어서였다.

“설마 도망치지는 않겠지? 녹림대군도 쓰러뜨린 녀석이. 무인이라면 당연히 도망치지 않겠지. 자신의 무명을 위해서라도.”

“맞아.”

이 공자인 팽주영이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팽추영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도발에 합류했다.

하지만 둘의 도발에도 반호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도발도 통하는 법인데 둘은 한참 부족했기에 무시로 일관했다.

“굳이 호진이까지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저벅저벅.

선우방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팽추영을 직시하며 반호진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뭐라?”

“제 선에서 정리될 것 같아서 말이죠.”

“이놈이!”

“크하하하! 재미있구나! 그래! 사나이라면 그런 맛이 있어야지!”

도발에 똑같이 도발로 응하는 선우방의 모습에 팽추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과 달리 조용히 지켜보던 팽만철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혈기와 혈기가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광경을 보자 그도 피가 끓어올랐다.

오래전 과거가 떠오른다고 할까.

그리고 그가 들은 것과 달리 선우방의 경지는 팽추영에게 있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아, 아버지?”

“왜 그러느냐? 설마 저 아이의 도발에 겁먹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팽추영이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에게 있어 선우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목표는 오직 반호진이었다.

반호진 말고는 그 누구도 팽추영에게 있어 의미가 없었다.

“그럼 붙어 봐.”

“……알겠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부친의 지시였기에 팽추영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반호진에게 향해 있었다.

“우선 저부터 넘고 도전하시죠.”

“흥!”

빙긋 웃는 선우방의 모습에 팽추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그의 눈에는 너무나 가소로워 보여서였다.

하지만 팽추영은 보지 못했다.

웃고 있는 입가와 달리 선우방의 눈은 서늘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동하죠. 여기서 비무를 할 수 없으니.”

“모두 따라오도록.”

“아빠.”

팽만철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팽화영이 다급하게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이러는 건 결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괜찮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지. 그리고 사과는 나중에 하면 된다.”

“그래도…….”

“정말 못 참겠으면 진즉에 뛰쳐나갔겠지. 딱 보니 한 성깔 하는 것 같은데.”

“진짜 사과하실 거죠?”

“물론. 나도 체면이라는 게 있어. 이대로 정리하면 소림사가 가만히 있겠느냐?”

과격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든 걸 다 감안하고 일을 벌인 것이기에 팽만철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막내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약속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세 사람을 데려온 네 체면도 있는데. 걱정 마라.”

“믿을게요.”

팽화영은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다.

세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자신이 가만있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고는 연신 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전음을 보냈다.

초대한 사람이 그녀였기에 대신으로나마 사과를 한 것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기도 하고요.

-네?

반호진의 대답에 팽화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로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반호진은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팽만철을 따라가면서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 팽화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왠지 모르게 지금의 상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스르릉.

“난 준비됐다.”

“저 역시.”

가주전 뒤쪽에 있는 개인 연무장에 도착한 팽추영과 선우방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동시에 거패도와 검을 뽑았던 것이다.

그리고 연무장의 한쪽 구석에는 팽만철의 자식들과 반호진, 서조운이 적당히 떨어진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작해라.”

준비가 다 된 듯하자 팽만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선우방과 팽추영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팽만철의 네 글자가 끝나는 순간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흥!”

달려드는 선우방의 모습에 팽추영이 코웃음을 쳤다.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에 자신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자 어이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팽추영은 좋게 생각했다.

쉽게 끝내고 반호진을 상대하면 된다고 말이다.

쌔애액!

그래서인지 팽추영의 참격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단 일격에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듯이 말이다.

까아앙!

그러나 팽추영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그의 참격을 선우방이 정면으로 막아 냈던 것이다.

체격의 차이로 인해 순수한 힘에서는 선우방이 밀렸으나 그 차이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살짝 밀리기는 했지만 정면으로 막아 낸 건 사실이었다.

“감히!”

그리고 그게 팽추영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선우방이었기에 팽추영은 그가 감히 자신의 일격을 막아 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힘을 끌어 올려 재차 참격을 날렸다.

이번에는 검과 함께 반 토막을 낼 기세로 말이다.

까가가강!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선우방은 그의 도격을 막아 냈다.

간신히 막아 내긴 했으나 중요한 건 받아 냈다는 사실이었다.

“이익!”

그 모습에 팽추영이 급격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두 번 연속 막혔다는 사실에 팽추영은 시뻘게진 얼굴로 연신 거패도를 휘둘렀다.

‘계획대로 됐어.’

반면에 선우방은 속으로 웃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그는 자연스럽게 팽추영의 참격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던 방금 전과는 달리 이제는 서서히 회피했던 것이다.

쌔애애액!

그런데 그게 또 팽추영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미꾸라지처럼 회피하자 노기가 더욱 거세졌다.

웅웅웅!

그 결과 팽추영의 거패도에서 도기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과도한 진기가 주입되자 도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친 것이었다.

콰아앙! 쾅!

도기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거패도가 살벌한 기세로 선우방의 정수리를 노리고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거패도가 쪼갠 건 선우방이 아니라 애꿎은 땅바닥이었다.

놀랍게도 그 짧은 사이에 회피한 것이었다.

쉬이익!

그리고 선우방은 단순히 피하기만 하지 않았다.

틈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어림없다!”

하지만 팽추영도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선우방의 반격을 거패도의 넓은 검신을 이용해 튕겨 냈다.

쌔애액!

동시에 커다란 거패도를 마치 작대기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막기 무섭게 반격해 왔던 것이다.

“흡!”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터트리며 쇄도하는 참격에 선우방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재빨리 이동했다.

이윽고 그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거패도가 꽂히며 흙과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저게 더 피하기 힘들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시야도 가려 버리는 먼지구름에 선우방이 미간을 좁혔다.

사실 팽추영의 공격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맹하기는 하나 그렇기에 팽추영의 도세는 단순하고 투박했다.

타고난 힘만 믿고 휘두르는 공격이었기에 궤적을 보면 피하는 건 쉬웠다.

‘이 정도도 못 피하면 안 되지.’

선우방이 씨익 웃었다.

매일 괴물 같은 반호진과 대련하는 사람이 그였다.

그런 선우방에게 팽추영의 도격은 무식하게 힘만 센 아이가 휘두르는 칼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물론 팽추영이 원하는 대로 비무를 진행한다면 패배하는 쪽은 그였겠지만 중요한 건 선우방이 그렇게 해 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제까지 미꾸라지처럼 도망만 칠 셈이냐!”

얄미울 정도로 얍삽하게 회피하는 선우방을 향해 팽추영이 포효하듯 소리쳤다.

모든 공격이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아서였다.

더욱더 강하고 빠르게 도를 휘둘렀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병기끼리 충돌은 있어도 팽추영이 원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

게다가 더 짜증 나는 건 선우방이 그의 말에 일절 대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두르기만 했다.

팽추영은 그게 더욱 거슬렸다.

“크아압!”

결국 짜증에 짜증이 겹쳐 뚜껑이 열려 버린 팽추영이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의 절초를 꺼냈다.

강력한 한 방으로 아예 날려 버리려는 것이었다.

막아 볼 테면 막아 보라는 듯이 팽추영은 모든 진기를 거패도에 쏟아부었다.

‘지금!’

그리고 그 순간 선우방의 두 눈이 번뜩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드디어 찾아와서였다.

팽추영이 모든 힘을 끌어올린 순간 선우방의 검이 절묘하게 거패도를 후려쳤다.

꽈아아앙!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두 사람 사이에서 번쩍였다.

진기와 진기의 충돌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피를 토하며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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