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장. 개화기(開花期). -01
다만 문제는 팽화영이 안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서조운은 콧방귀를 끼었다.
반호진의 옆에 서기에는 미모도, 가문도 다 부족했다.
‘못난 건 아니지만 난 소저에 비하면.’
그리고 그 평가는 제법 냉정했다.
비교 대상이 명확히 있어서였다.
반호진을 찾아온 것이지만 어쨌든 서조운은 난희주를 직접 대면했었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팽화영보다는 여자로서 난희주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말이다.
“왜 그렇게 살벌하게 쏘아 봐? 팽 소저가 깜짝 놀라겠다. 자객이 왔는 줄 알고.”
“에이. 제가 언제 쏘아봤다고 그래요?”
“바로 지금.”
선우방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가락으로 서조운의 눈과 팽화영을 가리키면서.
그 행동에 서조운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아니에요. 그냥 쫌 그래서 쳐다본 것뿐이에요.”
“뭐가 쫌 그런데?”
“이제 안면을 튼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너무 친한 척을 하는 것 같아서요.”
“친해지는 데 시간이 왜 중요해? 마음만 맞는다면 첫 만남에 의형제를 맺는 게 강호인데.”
오히려 선우방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팽화영을 좋게 생각했다.
명문세가 출신 특유의 우월의식도 없을뿐더러 여인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우방의 입장에서는 신선하기 그지없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럼 질투?”
“지, 질투라니요!”
“근데 말은 왜 더듬어?”
정곡을 찔린 것마냥 화들짝 놀라는 서조운의 모습에 선우방이 놀림거리 하나 물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뭐도 다 안다는 듯이 능글맞게 웃었던 것이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니까 놀란 거죠. 저 아직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열일곱 살이에요.”
“열일곱이면 장가를 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지. 게다가 어제는 팽 소저의 호위무사를 때려잡을 기세던데.”
“그건 저쪽에서 먼저 재수 없게 나왔잖아요. 신분은 둘째 치고 강호에서의 위상이 다른데. 어디서 감히.”
서조운이 콧김을 내뿜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도 반호진은 아니었다.
나이를 떠나 반호진이 보여 준 걸 생각하면 어제의 태도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도 그건 인정. 솔직히 기분 나빴어. 하북팽가가 오대세가 중 한 곳이라고 하지만 호진의 신분도 어디 가서 꿀릴 게 아닌데.”
“그러니까요.”
“막말로 기분 나빴다고 팔 하나를 잘랐어도 하북팽가에서는 한마디도 못 했을걸. 소림사에서 호진이의 위치가 은근히 높거든. 당대의 소림사 방장의 제자이자 차기 방장의 사제니까.”
“진짜 그렇게 되었어도 재미있었겠네요. 형님 성격상 달려들면 그냥 다 뚜드려 팰 것 같은데.”
서조운이 히죽 웃었다.
어떻게 대응할지 상상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웃긴 건 반호진이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녹림대군을 상대할 때도 서조운이 보기에 반호진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말이 안 되지만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는 바로 자신감이었다.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기에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반호진은 오만하지 않았다.
만약 오만에 빠졌다면 매일 그렇게 죽기 살기로 수련에 열중할 리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근데 질 것 같지가 않아.”
“형도 그렇죠?”
“응. 일단 보여 준 게 있기도 하고, 녹림대군을 상대할 때 너도 봤잖아. 악전고투하는 느낌이었어?”
“전혀 아니었죠. 오히려 가지고 노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천하의 녹림대군을 어린아이 다루듯이 상대하며 제압했던 모습은 아직도 두 사람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천하십대고수에 꼽히지는 못하더라도 녹림대군은 충분히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이자 강자였다.
그런데 반호진은 그런 무인을 너무나 쉽게 쓰러뜨렸다.
“그니까. 근데 하북팽가라고 무서워할까? 냉정하게 말해서 녹림십팔채의 최정예라면 하북팽가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어.”
“흐음. 그렇죠.”
언제 팽화영을 질투했냐는 듯이 서조운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북팽가가 오대세가 중 한 곳이라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녹림십팔채 전부와 비교하면 조금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숫자는 두말할 것도 없고 정예 대 정예라면 약간 우세.
그러나 엄청난 숫자를 쏟아부으면 제아무리 하북팽가라도 힘들었다.
“말 그대로 가정이기는 하지만.”
“그에 반해 형님은 혼자니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싸우면 진짜 골치 아프죠. 아니면 금적금왕이란 말처럼 수장만 슥 해도 되고요.”
서조운이 손날로 목을 그었다.
근데 그 말이 선우방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진짜 어디서 저런 괴수가 떨어졌을까.”
“그래도 저희는 사정이 좀 낫잖아요. 일단 적도 아니고 조언도 받고 있으니까요. 마치 해결사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명확하지. 우리의 의문을 늘 완벽하게 해결해 주니까. 심지어 확신을 가지고. 웬만한 경지가 아니면 힘든데. 아무리 먼저 길을 걸어갔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그래서 저는 잘 따라갈 생각입니다. 옆자리에만 서도 저는 만족해요. 지금의 제 삶은 형님 덕분이기도 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서조운은 알 수 있었다.
반호진을 따라잡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서조운은 목표를 수정했다.
뛰어넘을 수 없다면 옆에 나란히 서겠다고.
“호진이와의 만남은 나에게도 행운이야.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려 주었으니까. 여러모로 말이지.”
선우방의 시선이 반호진을 지나 팽화영에게 향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팽화영은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붓고 있었는데 의외인 건 반호진이 툴툴거리면서도 대답은 어찌어찌 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천재들이 있겠지?’
은거고수, 은둔고수라는 거창한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우방은 반호진과 함께하면서 진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천재들과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야생의 세상을 말이다.
그러나 충격은 받아도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에 없던 승부욕이 무섭게 끓어올랐다.
‘호진이는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선우방의 두 눈 속에서 작지만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승부욕이라는 이름의 불꽃이 말이다.
***
“하북팽가는 다 크네요. 사람들의 체격이 커서 그런가.”
“아무래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하니까.”
“본가도 언젠가는 이 정도로 커지고 사람도 많이 찾아올 거예요.”
마치 성처럼 거대한 장원을 바라보며 서조운이 결의를 다졌다.
언젠가는 서가장도 지금 보이는 하북팽가처럼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옆에 있는 선우방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세요, 하북팽가에.”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집이니까요. 거기다 세 분도 함께 와 주셨고요.”
평소에도 웃음이 많은 팽화영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집에 온 만큼 심적으로 편안해진 듯했다.
“저희야 내일 떠날 건데요.”
“그래도 손님은 손님이니까요. 그리고 아빠가 꼭 만나고 싶대요. 세 분을요.”
“저도요?”
들뜬 팽화영과 달리 하북팽가가 처음이 아닌 반호진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심지어 하북팽가의 주인이 보자고 했음에도 표정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특히 서조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서 공자님과 선우 공자님도요.”
“시간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없는 시간도 내야죠. 그리고 의외로 안 바쁘세요, 아빠는요.”
팽화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개구쟁이처럼 말이다.
두 눈 가득 담겨 있는 장난기에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팽화영이 세 사람을 이끌었다.
“어서 가요.”
“네.”
“숙소부터 가는 겁니까?”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서조운과 달리 반호진은 숙소부터 찾았다.
여독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건 질색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팽화영과 함께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아뇨. 가주전으로 가요.”
“네에?!”
“기다리고 계세요.”
가주전이라는 세 글자에 서조운은 물론이고 선우방도 놀랐다.
오자마자 하북팽가주를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였다.
쿠웅!
근골이 장대한 집안내력 때문인지 가주전의 방문 역시 컸다.
보통 문보다 족히 두 배는 더 클 것 같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네 명의 남녀가 세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선우방과 서조운이 긴장했다.
오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하북팽가주를 대면한다고 하자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벅저벅.
반면에 반호진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북팽가의 주인이자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도왕(刀王)이 그를 응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소가주와 이 공자도 매서운 눈빛으로 반호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간의 소문을 두 사람도 들었었기에 마치 반호진을 해부할 듯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녀왔어요.”
“그래. 원하는 건 이뤘고?”
“네.”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만족한 얼굴이구나.”
“찾아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하는 팽화영의 모습에 팽만철이 함박 미소를 지었다.
막내딸이 무슨 말을 하든 좋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건 딱 막내딸 한정이었다.
함께 온 반호진과 선우방, 서조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아주 매서웠다.
“팽만철이다.”
거두절미하고 딱 자기 이름만 말하는 팽만철의 모습에 반호진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불어 장난질을 하는 것도.
움찔!
당대의 천하십대고수이자 도왕이라 불리는 팽만철의 패도적인 기세에 선우방과 서조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납기 그지없는 기세에 둘 다 버티려고 기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팽만철의 시험을 알고 있는 이는 그를 포함해서 네 사람밖에는 없었다.
팽화영을 비롯해서 자식들은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반호진입니다.”
사하하하.
팽만철이 했던 것처럼 반호진도 간결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마주 기세를 일으켰다.
세 사람에게만 쏟아지던 팽만철의 사나운 기세를 갈라 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선우방과 서조운의 얼굴도 평온해졌다.
“선우세가의 선우방입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입니다.”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채운 건 분노였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으로 찾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팽만철이 도왕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와 행동에는 불만이 짙게 서려 있었다.
“호오.”
하지만 두 사람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말거나 팽만철의 시선은 오직 반호진에게만 향해 있었다.
건성으로 기세를 일으켰다고 하나 그래도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그가 뿌린 기세였다.
그런데 그걸 너무나 쉽게 중화시키자 팽만철은 살짝 놀랐다.
녹림대군을 쓰러뜨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그의 기도를 흩어 버릴 줄은 몰랐기에 팽만철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사가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은데.”
“내 말이.”
소가주와 이 공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린 선우방, 서조운과 달리 반호진의 인사는 건방지기 짝이 없어서였다.
“무례에 그대로 응대한 것뿐인데.”
“뭐라고!”
소가주인 팽추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팽추영의 호통에도 반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빠!”
“그만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