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장. 답을 주는 자. -03
실전이었다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팽화영의 머리 위에 있었다.
마치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호진은 손목만 살짝 꺾는 것으로 팽화영의 거패도를 튕겨 냈다.
그러고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주르륵.
이번에는 검극으로 살짝 건드는 게 아니라 베듯이 움직였다.
하지만 상처는 없었다.
심지어 옷도 멀쩡했다.
검기가 서려 있음에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압!”
실전이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비무 중이었다.
그렇기에 팽화영은 망설이지 않고 계속 건곤연환탈백도를 펼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광경은 선우방과 서조운에게도 좋은 자극을 주었다.
***
“헉헉헉!”
이른 아침부터 팽화영은 공터를 돌았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숙소를 반호진 일행이 머무는 객잔으로 잡았기에 아침 수련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한데 세 사람의 체력 단련을 팽화영이 따라가지 못했다.
“힘드시면 조금 쉬셔도 됩니다.”
세 사람 중 그나마 다정한 성격인 선우방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했다.
같이 수련을 한다고 해서 꼭 똑같이 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매일, 매일 이렇게 체력 훈련을 하시는 거예요?”
“예.”
꿀꺽.
팽화영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 강도로 매일 체력 훈련을 한다고 하자 기가 질렸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제 지쳐서 널브러진 그녀와 달리 반호진은 쌩쌩했다.
아니, 심지어 선우방과 서조운과 연달아 대련까지 했다.
그녀를 상대하고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말이다.
‘내가 너무 편하게 수련했던 걸까.’
팽화영은 순간 자기 자신을 되돌아봤다.
하북팽가의 여식으로서 너무 편하게 수련한 건 아닐까 하는 자아성찰을 했던 것이다.
동시에 부친의 말도 떠올랐다.
무인에게 있어 첫째고 둘째고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라는 말이.
“조운이도 그렇지만 팽 소저도 너무 무리하면 안 됩니다. 아직 육체적인 성장이 끝난 게 아니니까요. 올해 열여덟이시죠?”
“어? 제 나이를 어떻게 아세요?”
팽화영이 생각에 잠긴 듯하자 슬쩍 자리를 피해 준 선우방을 대신해 반호진이 다가왔다.
땀을 뻘뻘 흘리는 팽화영과 달리 뽀송뽀송한 얼굴로 말이다.
“알아낼 수 있는 경로야 많죠. 소림사에서 팽 공자를 만나기도 했었고.”
“아.”
팽화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오빠와 친하지는 않더라도 안면이 있을 테니 그녀의 나이를 알아낸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의 나이가 큰 비밀도 아니고.
“여자가 남자보다 성장이 조금 빨리 멈춘다고 하지만 그래도 스무 살까지 키가 크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전 키는 그만 자랐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팽화영이 비무 때보다 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키를 줄이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좀 더 클지 안 클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겠죠.”
“여기서 더 크면 저 시집 못 가요. 지금도 큰데.”
“그럼 키가 큰 남자를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덩치 큰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팽화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구의 남자들은 형제들과 가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뭐, 각자의 취향이 있는 것이니 저는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근데 두 사람 다 대단한 것 같아요. 특히 서 공자는 무공에 제대로 입문한 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예. 병을 좀 앓아서.”
“확실히 하늘이 내린 재능은 다른 것 같아요.”
팽화영이 눈을 빛냈다.
오늘의 목표는 두 사람이었다.
반호진과는 어제 대련을 했으니 오늘은 선우방, 서조운과 대련을 할 생각이었다.
“팽 소저의 재능도 엄청난 것입니다만.”
“정말요?”
“예.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만.”
“반 공자님이 말하니 확 와닿지가 않네요. 여기서 제일 강한 게 반 공자님이시잖아요.”
“저는 진심입니다만.”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게 짐짓 서글프다는 듯이 말이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격언이 새삼 떠올라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마치 아는 게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조운이만 하더라도 은둔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팽화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서조운은 알려지지 않은 인재였다.
그러나 구양절맥을 치료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재능을 만개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아, 안 그래도 반 공자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었어요.”
“말씀하시죠.”
“어떻게 제 허초와 변초들을 다 파악한 거예요?”
“파악했다기보다는 속지 않은 겁니다. 허초나 변초는 어떻게 보면 상대를 속이기 위한 수이지 않습니까. 진짜 일격을 감추기 위한. 그러니 속지 않는다면 막아 내는 것도 어렵지 않죠.”
“그……렇죠?”
팽화영이 두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너무나 당연하고 정론적인 이야기에 당황한 것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건 경험의 영역입니다. 수많은 무공을 겪어 보면 비슷한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저는 팽 소저의 건곤연환탈백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봤죠.”
“아, 혹시!”
“예. 한 번 지켜본 겁니다. 변초와 허초는 결국 기본 투로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 틀을 깨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 경지는 천하십대고수나 가능하지요.”
팽화영이 눈을 반짝거렸다.
말로나마 무림십왕의 경지를 엿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직 반호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허초와 변초는 결국 상대방을 속여 자신의 공격을 성공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가 습관이나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지요. 안다면 그걸 고쳐 나가거나, 혹은 이용하기도 합니다.”
“일부러 빈틈을 보여 주는 거군요. 함정처럼요.”
“맞습니다. 그러니 그건 어떻게 보면 약점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근데 문제는 모르는 겁니다.”
“……혹시 그걸 다 외우신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반호진의 대답에 팽화영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나의 초식에서 파생되는 변초만 하더라도 수십, 수백 개가 넘었다.
물론 큰 줄기는 같다고 하나 그럼에도 초식이 열 개만 되더라도 수천 개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그걸 모두 외웠다고 하자 팽화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 게 노력입니다.”
“…….”
팽화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기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성의 없이 무공에 임했는지도 깨달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수련에 쏟아부었느냐, 물론 이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시간에 얼마만큼 집중했느냐입니다. 양도 중요하지만 질도 중요하단 이야기죠. 백 번 대충 휘두르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펼치는 게 더 효과가 좋습니다. 여기저기 들르며 길을 헤매는 것보다 올바른 길을 가는 게 나중에는 결국 더 빠릅니다.”
“아…….”
마지막 말에 팽화영은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 머리에 각인되듯 박혀서였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말이지만 반호진이 말하니 더욱더 무게감이 느껴졌다.
더불어 부친이 왜 그렇게 기본에 집착하는지도 이해했다.
“물론 아는 것과 몸으로 펼치는 것은 다르지만요.”
“반 공자님은 참 신기해요. 저와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내면의 시간이 많이 다르니까요.”
“두 살이요?”
팽화영이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십 년이라면 모를까 고작 이 년 가지고 이러는 게 너무 우스워서였다.
“이 년이라는 시간을 열두 시진, 일다경이나 일각으로 표현하면 어마어마합니다. 허송세월로 보낸 이 년과 전쟁터에서 보낸 이 년은 결코 같을 수 없는 법이죠.”
“너무 극단적인 비교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저희는 각자의 전장에 서 있는 겁니다. 얼마나 수련에 충실했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요.”
“그런 말씀을 하는 것치고는 너무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시는 것 같은데요?”
팽화영이 이번에도 빈틈을 노렸다.
그러나 반호진은 어제의 비무와 마찬가지로 어렵지 않게 그녀의 공격을 튕겨 냈다.
“중요한 건 효율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니까요.”
“검술뿐만 아니라 입심도 대단한 것 같아요.”
“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더 오기가 솟네요. 무공이든 구공(口功)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이기고 싶어졌어요.”
팽화영이 다부진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하지만 호기로운 말과 달리 그녀의 눈동자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지니고 있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금과옥조와도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아서였다.
더욱이 그녀와 반호진은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였다.
“도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법이죠.”
“질 리가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건 모르죠. 다만 저도 노력할 테니 쉽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나와 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열망이 샘솟을 테니까요.”
팽화영은 씨익 웃었다.
반호진의 말대로 도전 자체로도 즐겁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팽화영은 이곳이 너무나 좋았다.
반호진이라는 강자에게 도전할 수도 있었고, 선우방과 서조운이라는 경쟁자가 무섭게 위협했기에 팽화영은 이곳에 온 게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까닥 잘못하면 질 수도 있어.’
정기신이 조화로운 선우방은 계기만 있다면 언제라도 무섭게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팽화영이 쉽게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무인이기도 했고.
그리고 서조운은 그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였다.
정말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고 할까.
‘하지만 역시 최고는 반 공자님이시지.’
토가 나올 것 같은 체력 훈련을 방금 전에 끝내고서 대련하고 있는 서조운과 선우방을 일별한 팽화영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반호진을 몰래 쳐다봤다.
선우방과 서조운을 알게 된 것도 큰 성과이지만 역시 가장 큰 성과는 반호진이었다.
남자를 떠나 인간적으로 반호진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에게도 매정한 게 팽화영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안 들어.’
선우방과 대련을 하고 잠시 쉬고 있던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반호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팽화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늘 가르침과 조언을 받는 건 자신이었는데 그 자리를 팽화영이 빼앗아 간 것만 같았다.
거기다 더 마음에 안 드는 건 팽화영의 실력이었다.
‘저런 고수가 숨어 있을 줄이야.’
선우방이야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사룡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을 뿐.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거라고 서조운은 생각했다.
반호진이 선우세가를 찾은 후 선우방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이었다.
‘혹시 벌써부터 밑밥을 까는 건가?’
서조운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예 현실성이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소림사 방장의 무기명제자에 실력은 천하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그러니 하북팽가에서 반호진을 욕심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안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