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장. 답을 주는 자. -01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반호진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여기서 팽화영을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였다.
팽화영은 반호진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미래의 도후(刀后)가 나를 찾아올 줄이야.’
두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반호진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을 찾아온 이가 하북팽가 역사상 최고의 고수이자 검후와 함께 천하를 호령하던 도후임을 말이다.
“만나 뵙고 싶었어요, 반 공자님.”
“소림의 반호진입니다.”
다른 이였다면 무례하다고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팽화영은 생글생글 웃었다.
애초에 약속도 잡지 않고 무작정 찾아온 건 그녀였다.
때문에 팽화영은 반호진의 행동에도 전혀 기분 나빠 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예.”
“커험!”
예의상 아니라고 해 줄 수도 있을 텐데 너무나 대놓고 면전에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마흔 안팎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런 압박에 흔들릴 반호진이 아니었다.
“들은 대로 되게 솔직하신 것 같아요.”
“거짓말보다는 나으니까요. 부처님께서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렇죠.”
불교 십계 중 불망어계(不妄語戒)를 떠올리며 팽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경을 제대로 본 적은 없으나 워낙에 유명한 말이었기에 그녀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이럴 때 보면 불문에서 수학한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그럼 평소에는 어떻게 보이는데?”
“네 스스로가 잘 알지 않을까?”
“호호호.”
너무나 자연스럽게 티격태격하는 선우방과 반호진의 모습에 팽화영이 섬섬옥수와도 같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두 사람의 우정이 깊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여인인 걸 떠나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팽화영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내가 그렇다고 사고 치고 다니지는 않잖아? 나는 나름 선행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늘 형님 편입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반호진에게 서조운이 힘을 실어 주었다.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살아 있는 증거였다.
반호진이 착하게 살아왔다는.
“에휴.”
그걸 선우방도 모르지 않았기에 더 이상 반호진을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 역시 반호진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그나저나 성격이 완전히 다르네? 성격이 변할 만한 계기가 있었나?’
한편 반호진은 선우방과 대화하면서도 팽화영을 은근슬쩍 살펴보고 있었다.
전생에서 만났던 팽화영과는 기질이 너무 달라서였다.
아니, 일단 표정부터가 달랐다.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 반호진은 너무나 낯설었다.
“이제 저도 입을 열어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저희끼리만 떠들었죠?”
“아니에요. 불청객은 저인걸요. 세 분의 시간을 방해했으니 기다리는 건 당연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과한 선우방은 물론이고 서조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렇게 배려심이 넘칠 줄은 몰라서였다.
특히 서조운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여느 여인들보다 키가 크기는 했지만 비율이 워낙에 좋아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외모도 보면 볼수록 예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첫눈에 확 들어오는 외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꿀릴 만한 수준은 또 아니었다.
“침 삼키는 소리 다 들린다.”
“헉!”
마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반호진의 한마디에 서조운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손은 번개처럼 빨랐다.
눈부신 속도로 손등이 입가를 훔쳤던 것이다.
혹시라도 침을 흘렸다면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기에 서조운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입가를 확인했다.
“진짜 재밌으세요.”
“그러려고 모인 건 아닌데 말이죠. 그보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반 공자님께 청이 있어서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묻는 반호진의 말에도 팽화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쓸데없는 대화 주제로 시간낭비 하는 걸 그녀도 혐오했다.
차라리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좋았다.
“저에게 청이라.”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얼마나 결례인지 잘 알아요. 하지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할 만한 분이 모두 여기에 계셔서 제가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거절당할 것도 염두에 두고 있고요.”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처럼 솔직하고 담백한 대답에 반호진도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몰아붙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서였다.
“저와 비무를 해 주시겠어요?”
“비무 때문에 하북성에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예. 원래는 금가장으로 찾아가려고 했어요.”
팽화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기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말이다.
“그러다가 제가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군요.”
“네. 개방에 약간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걸 말해도 되는 겁니까?”
“나쁜 의도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니까요.”
팽화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기에 부끄러워할 게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 모습은 반호진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비무라.”
“반 공자님께 꼭 한 수 배우고 싶어요.”
“경험이라면 꼭 제가 아니더라도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습니까? 더욱이 오대세가 중 한 곳인 하북팽가라면 빈객들도 많을 텐데.”
“떠나기 전까지 머무시는 분들과 한 번씩 다 만나 봤어요.”
팽화영이 생긋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성격이 다르기는 해도 근본은 같은 듯했다.
“흐음.”
“부탁드릴게요.”
고민하는 반호진을 향해 팽화영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가의 여식답지 않고 한 명의 무인처럼 보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라면 전부 받아들이겠습니다.”
팽화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상과 달리 반호진이 너무나 흔쾌히 허락해 주어서였다.
반면에 뒤에 시립해 있던 중년인들의 표정은 경직되었다.
혹시라도 반호진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조건을 말하기 전에, 뒤에 계신 호위무사분께서는 제가 마음에 안 드나 봅니까?”
“헙!”
은근슬쩍 헛기침을 하며 압박감을 주었던 중년인이 숨을 들이켰다.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살벌하기 그지없어서였다.
마치 온몸을 찍어 누르는 것 같은 존재감에 중년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기침을 하지 말고 말로 직접 했으면 좋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배분은 반호진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다.
그저 늘그막에 담현의 제자가 되었기에 배분에 비해 나이가 어린 것뿐이었다.
게다가 강호는 강자존의 세계였다.
백도무림이 예의범절을 중요시한다고 해도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개인의 실력이었다.
“팽 소저의 신분도 특별하지만 저나 방이, 조운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기도를 드러내기 전이라면 모를까 조금이나마 반호진의 경지를 엿본 중년인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비벼 볼 수 없다는 걸 이번에 확실하게 느껴서였다.
더불어 소문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도 느꼈다.
“죄송해요, 반 공자님. 두 분께도 사과드릴게요.”
“팽 소저께서 사과하실 부분은 아닙니다.”
“아니에요. 가솔의 잘못은 저의 잘못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먼저 말을 했어야 했는데…….”
팽화영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충분히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이렇게 말을 하지 못한 건 그녀의 신분 때문이었다.
감히 면전에서 말할 수 없기에 참았을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기에 팽화영은 선우방과 서조운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직접적으로 압박감을 받은 건 반호진이지만 두 사람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받았을 게 분명해서였다.
“사실 좀 그랬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팽 소저께서 사과해 주시기도 했고.”
“야.”
선우방이 양측의 눈치를 살피며 서조운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서조운은 선우방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저돌적이었다.
“막말로 우리가 하북팽가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아랫사람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서조운의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 것 하나 틀리지 않아서였다.
물론 서조운의 배경이 세 사람 중 가장 떨어진다고 하나 중요한 건 이 일행의 중심이 반호진이라는 점이었다.
방금 전 반호진의 거대한 존재감을 절절하게 느꼈기에 중년인은 망설이지 않고 사과했다.
“그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이고.”
당돌한 서조운의 모습에 선우방이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이미 말리기에는 늦었다.
다 끝난 마당에 그가 끼어들기도 좀 애매했고 말이다.
“왜 그래? 애 기죽게. 잘못을 했으면 혼내는 게 맞지만 조운이가 잘못한 거 없잖아?”
“정확하십니다.”
“무시를 당했다며 칼질도 서슴없이 하는 세계에서 이 정도면 좋게 해결된 거지.”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격렬하게 동조했다.
사실 칼질을 해도 서조운은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위무사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면 힘들겠지만 일대일이라면 쉽게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무섭다. 넌 진짜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라.”
“소림사 제자 같지는 않지?”
“뭐, 그렇지.”
솔직함도 전염이 되는 모양인지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담담하게 대화하는 셋과 달리 중년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반호진이 손을 썼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반병신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시 이쪽으로 넘어와서,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불청객이었기에 팽화영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반호진이 말을 걸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모래사장 위에서 대련을 하죠.”
“알겠어요.”
팽화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떤 의도로 반호진이 모래사장에서 대련을 하자고 하는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더불어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호오. 모래사장이라.”
“새로운 환경이라. 재미있겠는데?”
팽화영과 마찬가지로 서조운과 선우방과 반호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산과 절벽, 계곡에서는 싸워 봤어도 모래사장에서는 둘 다 경험이 없어서였다.
“바로 시작할까요?”
“저는 좋아요.”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팽화영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준비되면 말씀하세요. 굳이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마워요.”
하북팽가의 여식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무인으로서 배려해 주는 반호진의 말에 팽화영이 옅게 웃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후기지수지만 후기지수의 범주 밖에 있는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팽화영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적당히 가라앉혔다.
‘후우.’
너무 긴장을 풀어도 본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적당한 긴장이 최상의 몸 상태를 이끌어 낸다는 걸 알기에 팽화영은 낮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등에 메고 있던 거패도를 뽑았다.
오빠들이 사용하는 거패도보다 살짝 짧고 얇았으나 그럼에도 여자가 사용하기에는 무지막지한 병기가 거패도였다.
그런데 그걸 팽화영은 한 손으로 편하게 다루었다.
스르릉.
팽화영이 거패도를 뽑고서 마음을 가다듬는 걸 본 반호진 역시 검을 뽑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녀와 완전히 달랐다.
평온한 얼굴로 그저 검을 늘어뜨리기만 했다.
‘빈틈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