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장. 찾아온 손님. -03
백년자패라는 말에 서조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반호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는 농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똑똑한 만큼 서조운은 이미 머릿속에 십년지대계가 완성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수정되는 건 있겠지만 큰 틀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가능할까요?”
“모르지.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니까. 꼭 못 잡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반호진이 천하태평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게 솔직한 생각이기도 했다.
실제로 과거로 돌아오는 기적을 경험한 이가 반호진이었다.
그렇기에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거 의욕이 샘솟는데요. 알아보니까 조개 종류의 영물은 음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심해에서 자라서 자연스럽게 음기를 축적한다고 했어요.”
“그중에도 반골은 있겠지.”
“형님처럼요?”
“난 순리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반호진이 코웃음을 쳤다.
일단 그는 최소한 과거로 돌아온 후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남을 도와주면 도와주었지.
거기다 운명까지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어…….”
“거봐요. 방 형도 동의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잖아요.”
“네가 뭘 알겠니.”
부정하지 못하는 선우방의 모습에도 반호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다만 두 사람만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호진이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숙소부터 잡을까요?”
“응. 돈은 많으니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층도 가장 높은 층.”
“역시 부자! 돈은 역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삶이 윤택해지지. 근데 계산은 인원수대로 나눌 거야. 싫으면 방은 각자 알아서.”
“으엑!”
서조운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이렇게 쪼잔하게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물론 서조운도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공짜가 좋았다.
“공짜 좋아하다가 대머리된다. 특히나 너 같은 양강지공을 익힌 무인은 더 조심해야 해.”
“맞아, 양기가 심하면 대머리가 되니까. 신기한 건 다른 곳에는 털이 많아.”
“잘 아네.”
이럴 때는 죽이 척척 맞는 반호진과 선우방의 모습에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안 그래도 탈모는 그에게 있어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다.
매일 밤 괜히 서조운이 머리숱을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미리미리 관리하라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면 늦으니까. 이왕이면 잘생긴 대머리보다 그냥 잘생긴 풍성이가 낫잖아.”
“으으!”
서조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너무 건성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형이자 목숨을 구해 준 반호진이었기에 서조운이 할 수 있는 건 분개하는 것밖에 없었다.
“각출은 농담이고, 얼른 가서 알아봐.”
“옙!”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 서조운이 후다닥 뛰어갔다.
반호진이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객잔을 찾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서조운은 음식도 추가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맛있는 곳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
찰싹! 쏴아아아.
오고 가는 걸 반복하는 파도를 보며 반호진은 느긋하게 낚싯바늘을 던졌다.
따로 산 건 아니고 낚싯줄과 낚싯바늘만 사서는 해변 근처에서 자라는 나뭇가지 하나를 대충 부러뜨려 낚싯대를 만들었다.
“대물을 낚으려면 배를 타야 하지 않을까? 작은 배라도 빌려서. 아니면 만들어도 되고. 작은 배는 우리 셋이서 힘을 합치면 금방 만들 수 있잖아? 결합시키는 건 힘들지만 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파면 어설픈 배는 만들 수 있어.”
“둘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 나는 이걸로도 만족해.”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게?”
낚싯바늘에 미끼 작은 거 하나 꿰어 놓고 갯바위 위에 누워 있는 반호진의 모습에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낚시를 하러 온 건지 그냥 널브러지러 온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웃긴 건 반호진의 표정이 한없이 즐거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세월을 낚기보다는, 여유를 낚는 거지. 얼마나 평화로워? 아이들은 뛰어 놀고, 어른들은 고깃배를 타고 가서 그물을 건지고. 모든 이의 삶이 어우러진 모습이잖아.”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다 봤네?”
“쫙 펼쳐져 있으니까 슥 보면 다 보이지.”
“이야압!”
태평하게 낚싯대를 바위 사이에 끼워 놓고 누워 있는 반호진과 달리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서조운은 누구보다 열심히 낚시를 하고 있었다.
진짜 백년자패를 낚을 셈인지 연신 낚싯바늘을 걷었다가 던졌다가를 반복했다.
“극과 극이네.”
“좋잖아? 가끔씩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쉬어 주는 것도 필요해. 괜히 머리를 비우라고 하는 게 아니지. 뭐,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는 게 정답은 아니지만.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거든. 서로에게 모르는 사이에 영감을 주고, 또는 받지. 괜히 인(人)이라는 글자가 두 획이 맞붙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불경을 본 사람 같단 말이지.”
선우방이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사찰에서 공부한 이답지 않은데 또 가끔씩은 고승이 할 법한 말을 했기에 선우방은 놀라우면서도 재미있었다.
“배 타고 싶으면 직접 만들어. 너 혼자 탈 건 더 빨리 만들 거 아냐?”
“나도 낚시에 목을 맨 건 아니라서. 처음이라서 서툴기도 하고.”
“처음이라고?”
“바다가 익숙한 것과 낚시는 별개니까.”
“그렇긴 하네.”
반호진처럼 낚싯바늘에 미끼로 사용하는 작은 물고기를 대충 꿰고서 선우방이 낚싯대를 크게 휘둘렀다.
목표로 하는 위치에 낚싯바늘이 떨어지도록 힘껏 휘두른 것이다.
나름 검객답게 선우방의 낚싯바늘은 그가 목표로 했던 위치 근처에 떨어졌다.
“실패.”
“……처음은 다 이런 거야.”
“아닌데, 난 한 번에 성공했는데. 검이나 낚싯대나 휘두르는 점에서는 똑같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느린 사람도 있는 거야.”
“오늘따라 말을 잘하는데?”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별거 아닌 듯하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저의를 반호진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더불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당사자는 힘들겠지만 본인 스스로를 아는 건 아주 중요했다.
“아싸! 잡았다!”
“월척은 아니네.”
“아오, 형님!”
물고기를 잡자마자 초를 치는 반호진의 한마디에 서조운이 성을 냈다.
그러나 반호진은 서조운이 악을 쓰거나 말거나 다시 만사태평하게 옆으로 누워서 바닷바람을 쐤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물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서 그저 분위기와 풍경을 만끽했다.
“나도 잡았다!”
그사이 선우방도 한 마리를 잡았다.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게 정말 있다는 듯이 낚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 마리를 낚았다.
그것도 꽤나 큰 녀석을 말이다.
“우와! 일 척은 넘겠는데요?”
“이게 바로 월척이지.”
“첫 수가 월척이라니. 부럽습니다.”
“대신 넌 다 가졌잖아. 이 정도는 나에게 양보해 줘야지.”
서조운이 두 눈을 끔뻑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예?”
“외모, 재능, 거기다 가문까지. 그 정도면 진짜 다 가진 거지. 그러니까 이 정도 행운은 양보해 달라는 거야.”
“에이, 형도 비슷하잖아요.”
“난 외모가 없잖아.”
“어, 음.”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기평가에 서조운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차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였다.
지극히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셋 중에 외모가 가장 부족한 사람은 아무래도 선우방이었다.
“대신 너에게는 재능과 가문이 있잖아. 조운이는 가문이 좀 부족하고. 그렇게 따지면 오십보백보지. 내 앞에서 네가 낫니, 내가 낫니 하는 건 자랑질로밖에 안 들려.”
“너도 어디 가서 꿀리는 신분은 아니잖아. 소림사 방장의 제자에, 천부적인 재능까지 가졌는데. 심지어 너는 더 이상 후기지수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잖아.”
“난 그 정도도 안 되면 죽어야 해.”
두 눈을 뜨지도 않은 채로 반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선우방이나 서조운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안녕하세요?”
“어?”
한가로이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열심히 낚시를 하던 선우방과 서조운이 고개를 돌렸다.
해변에는 사람이 꽤 있었기에 당연히 지나가는 사람이려니 생각했는데 말을 걸자 두 사람 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암.”
오직 반호진만이 놀라지 않았다.
누가 말을 걸건 말건 돗자리를 깔고 누운 반호진은 아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크흠!”
그 모습에 처음 말을 걸었던 늘씬한 여인 뒤에 호위하듯 서 있던 중년인이 헛기침을 했다.
정확히 누워 있는 반호진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스윽. 스윽.
오히려 반호진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린 귀를 후벼 팠다.
그러자 중년인의 얼굴이 순간 벌겋게 변했다.
“쿡쿡!”
한데 그 모습에 인사하며 말을 걸었던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는 처음이어서였다.
게다가 은연중에 느껴지는 선우방과 서조운의 기도도 만만치 않았다.
“누구십니까?”
점점 더 묘해지는 분위기에 선우방이 결국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정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는 없는 듯해서였다.
동시에 선우방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호위무사를 셋이나 대동한 여인이 평범한 신분일 리 없기에 혹시나 마주친 적이 있나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하북팽가의 팽화영이라고 해요.”
“아! 팽가주님의 막내딸이시군요.”
“맞아요. 이렇게 뵈는 건 처음이라 아마 절 몰라보셨을 거예요.”
“팽 소저께서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요?”
“선우 공자님에 대해서는 미리 알아봤죠. 안녕하세요, 서 공자님.”
성격이 키처럼 시원시원한 모양인지 팽화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서조운을 향해 인사했다.
무인답게 포권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서조운의 눈에는 그녀의 인사보다 등에 메어져 있는 거패도가 먼저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서가장의 서조운입니다.”
하지만 당황은 찰나뿐이었다.
몰락하긴 했어도 명문가 출신이라는 게 어딘가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서조운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초면임에도 친근하게 대하는 팽화영의 모습에 서조운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선우방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반 공자님?”
선우방, 서조운과 인사를 마친 팽화영의 시선은 여전히 옆으로 누워 있는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한데 반호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앞선 두 사람과는 확연히 달랐다.
묘한 감정이 서린 눈빛으로 반호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던 것이다.
“호진아.”
대답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는 반호진을 향해 선우방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나 잠이 들었을까 싶어 나지막하게 친구를 부른 것이었다.
“나 안 졸았다. 안 그래도 일어나려고 했어.”
일어나지 않으면 벼락같은 전음이라도 보낼 것 같은 기세에 반호진이 엉덩이를 털며 돗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