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장. 찾아온 손님. -01
반호진이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새삼 개방의 힘을 느꼈다.
서가장은 몰락한 무림세가였고, 금가장은 엄연히 따지면 무림과는 살짝 떨어진 상계에 뿌리를 둔 곳이었다.
그런데도 하오문의 난희주와 만난 것을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걸 뜻했다.
“하오문도 선택지에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하오문은 정사중간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믿을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요. 하오문에서 반 공자님께 공을 많이 들이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신뢰할 수 있느냐, 이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그렇습니다.”
“흐음. 이건 좀 주제넘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만, 걱정이 되어서요. 반 공자님은 소림사의 제자이지만 크게 보면 백도무림의 보물이지 않습니까. 향후 무림을 든든하게 떠받칠 기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미인계에 넘어가지 말라고요?”
밑밥을 거창하게 까는 오중건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으며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자 오중건이 토끼 눈을 떴다.
반호진이 그의 생각을 알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하오문을 대표해서 여인이 찾아왔고, 그 여인이 누구인지 오 대협은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닌데요.”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적보다는 친구가 많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만, 중요한 건 ‘믿을 수 있는’ 친구이냐는 것이겠지요.”
오중건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정사중간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언제라도 사파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반대는 불가능했다.
하오문이 정파가 넘어오는 걸 원하는 이도, 반기는 이도 없었다.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정파라고 해서 과연 모두 믿을 수 있을까요?”
“…….”
오중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 대답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는 반호진이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개인적으로 너무 믿는 건 좋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다행히 개방은 믿어 주시는 것 같네요.”
“개방은 의협심 하나로 일어난 곳이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오 대협은 믿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치워 버릴 것 같은데요.”
“이런 말이 있지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오중건에게는 이상하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예전이었다면 농담으로 들렸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그리고 그 이유를 오중건은 알고 있었다.
“일단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요. 남경에서 마주쳤다고요?”
“예, 입을 단단히 다물더라고요. 제가 심문 같은 것에는 잘 모르기도 하고요.”
“시체는요?”
“딱히 특별한 게 없어서 그냥 묻었습니다. 전낭을 통째로 따로 챙겨 놓았는데 이것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별다를 게 없다면 전낭도 돈만 있겠죠.”
오중건은 고개를 저었다.
보통 그런 이들이 꼬리 잡힐 만한 것들은 전부 치워 놓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암호문이 적혀 있는 이 책을 파고드는 게 오히려 훨씬 나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이런 게 제가 할 일인걸요.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확실하게 알아낸 게 있으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해 주셔도 됩니다. 저 역시 이상해서 부탁드리는 것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반호진은 최대한 관심 없는 척 말했다.
다급해하면 오중건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개인적으로는 개방의 능력이 궁금하기도 했고.
다른 이도 아니고 후개이기에 반호진은 얼마나 빨리 철혈성에 대해 알아낼지 궁금했다.
‘철혈성까지는 못 가더라도 수상한 세력이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겠지.’
순수하게 규모로만 따지자면 중원의 그 어떤 무림 세력보다 거대한 게 개방이었다.
또한 가장 많은 제자들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알아내는 건 한계가 있을 터였다.
반호진도 철혈성의 첩자들이 사용하는 표식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꼬리를 잡지 못했을 테니까.
‘지금은 의심만 심어 두어도 충분해.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뒤통수를 맞는 것과 조금은 경각심을 가진 상태에서 맞붙는 건 전혀 다르니까.’
애초에 반호진은 암호문이 적혀 있는 책자 하나로 개방이 모든 걸 알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건 시발점일 뿐이었다.
‘다 알아내면 좋고.’
반호진은 씨익 웃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걸 시작으로 천하사패의 남은 세 곳의 흔적을 발견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반호진으로서는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로서는 이득이었기에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
끼이익.
문을 열기 무섭게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콧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나름 관리를 열심히 한 듯해 보이지만 곰팡이 냄새는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서고는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엄청 많이 모아 놨네.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
금가장은 상가이지만 무공 수집을 꾸준히 하는 편이었다.
재물이 많다 보니 그걸 노리는 이들도 많았고, 자연스레 싸우다 보니 이래저래 얻게 되는 무공서들이 많았다.
그중 상승절학들은 보안이 철저한 곳에 따로 보관했고, 이곳은 그저 그런 무공서들과 하급 무공비급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장난질해 놓은 무공서도 많다고 했었지.”
과거에는 무공서를 은밀히 구입하기도 했다는데 그때 사기를 많이 당했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열심히 익혔는데 주화입마에 빠진 무인들이 많아 폐기한 무공 비급도 많다고 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고에는 무공서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대충 봐도 엄청 오래된 것 같은 무공비급도 많았고.
“구경하는 재미는 있겠네.”
이왕 지원해 주는 거 확실하게 지원해 줄 생각이었기에 반호진은 당분간 금가장에 머물 생각이었다.
이런 호화스러운 대우를 쉽게 포기하기도 어려웠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걸 누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반호진은 금가장의 생활을 최대한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흐음.”
개인 수련에 서조운과 선우방의 무공을 봐주는 건 물론이고 지금처럼 다른 무공서도 살펴봤다.
상승절학들은 따로 빼놓았다고 하나 반호진은 그 작업이 완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그 정도 안목이 있었다면 진즉에 금가장은 뛰어난 실력의 무인을 보유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수준 낮은 무공이라고 해서 배울 게 없다거나 영감을 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샤라락. 샤락.
오히려 색다른 시도를 한 게 많았다.
물론 장점이 그렇다는 것이고 책장에 꽂혀져 있는 무공서들 중 구 할 가까이는 쓰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형편없었다.
상상력이라도 자극하면 다행인데 그런 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내용을 허황되게 담아냈기에 반호진은 초반이 아니다 싶은 무공서들은 미련 없이 책장을 덮었다.
툭. 툭. 툭.
선택을 받은 무공서들이 허공을 날아 출입문 근처의 책상에 켜켜이 쌓였다.
반호진은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게 아니라 무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괜히 금광신보가 탄생한 게 아니었다.
무론에도 밝았기에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할 수 있었다.
“이건 아니고.”
그렇기에 반호진은 초입, 아니 첫 장만 보더라도 무공서가 괜찮은지, 쓰레기인지 판별이 가능했다.
딱 보는 순간 감이 온다고나 할까.
덕분에 반호진은 빠르게 제대로 볼만한 무공서들을 고를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달마삼검과 무상대능력은 분명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무공들이었다.
그러나 이게 최고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달마삼검과 무상대능력에 견줄 만한 무공들이 꽤 많았다.
그 사실을 반호진은 전생에서 몸소 느꼈었기에 공부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막상 시작하기는 했는데, 막막하긴 하네.”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잘 알기에 더 막막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야 했다.
“내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니, 해야지.”
차곡차곡 쌓인 무공서들을 보자기에 담아 묶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봐 볼까.”
멀리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서조운의 목소리에 반호진이 보자기를 어깨에 걸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널찍한 연무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는 서조운의 모습이 보였다.
상대는 금호연의 호위대였는데 벌써 열댓 명이 처참하게 깨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왔어?”
“응.”
“어깨에 그건 뭐야?”
“무공서고에서 가져온 무공비급들.”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나? 아니, 그만한 무공을 반출할 수 있나?”
호위대원들과 연무장 가장자리에 나란히 서 있던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직접 고른 무공서를 꺼내 오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상승절학은 아냐. 초일류까지 갈 수 있는 무공이니 아예 수준 낮은 무공은 아닌데, 대부분 조금 독특한 것들이야.”
“혹시 모래 속의 진주 같은 무공은 없어?”
“모르지. 살짝 훑어본 거라.”
“너 정도면 딱 보면 알잖아.”
선우방이 씨익 웃었다.
금광신보를 반호진이 직접 만들었다는 걸 알기에 선우방은 마치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몰라. 일단은 살펴봐야 해.”
“궁금하네. 만약 그중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절세무공이 있는 거 아냐?”
“가능성은 있지만, 희박하겠지? 애매한 상승절학이야 실수로 놓칠 수 있다지만 절세무공급은 그러기 힘들지.”
“하긴. 근데 네가 골라 왔다니까 은근히 기대가 된단 말이지.”
“그보다 무섭게 느네.”
반호진의 시선이 호위대원과 대련을 하고 있는 서조운에게로 향했다.
처음 겪는 실전에서도 실수하지 않고 제 실력을 뽐냈던 서조운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량이 발전하고 있었다.
경험을 쌓아가자 무섭게 성장했던 것이다.
그걸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는 선우방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말이 안 될 정도야,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왜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표현했는지 알 거 같아. 인세에 놔두면 안 되는 재능이라 하늘이 빨리 데려가려고 한 거 같아.”
“천재 중의 천재긴 하지.”
“한 이삼 년 지나면 지금의 사룡 중에 조운이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야. 내공만 따지면 이미 뛰어넘었고.”
선우방이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절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극을 제대로 받은 표정이었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그런 선우방의 표정을 힐끔거리며 반호진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태호채에 함께 갔을 때부터 조금 느끼긴 했지만 지금 모습에서 반호진은 확실하게 느꼈다.
지난 생보다 선우방의 성장이 훨씬 더 빠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부지런히 수련 중이야. 조운이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고.”
“서가장에서 혼자 수련할 때와는 다르지?”
“엄청. 자극도 되고, 도움도 되고. 그래서 매일 자찬하고 있어. 너랑 조운이를 따라온걸.”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보겠어? 금가장에서. 개방의 오 대협도 이런 곳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
언제 진지했냐는 듯이 선우방이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알았다.
지금 선우방의 마음속에서는 호승심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