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장. 궁한 자가 움직여야지. -03
금호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정확히 금상룡을 파악하고 있어서였다.
이번에 본 게 두 번째일 텐데도 제대로 꿰뚫어 보자 금호연은 신기했다.
“한 잔 드시죠. 뛰어오신 것 같은데.”
“티가 많이 났습니까?”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하하.”
금호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름 체통을 지킨다고 표정을 관리했는데 역시 몸은 속일 수 없는 듯했다.
또르륵.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들어오는 순간 알았습니다. 사실 믿고 있기도 했고요.”
반호진이 따라 주는 차를 단번에 마시며 금호연이 대답했다.
오래 식혀서 그런지 차갑진 않아도 살짝 시원한 느낌의 차에 속도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믿었다고 하기에는 땀을 많이 흘리던데요.”
“날씨가 아직 더우니까요. 제가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뭐, 그렇다고 해 두죠.”
“근데 흔들리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돈으로 후려치려 들었을 텐데.”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반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랫동안 경쟁을 해서 그런지 상대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의문도 살짝 들었다.
금호연은 금상룡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거 같은데 반대로 금상룡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 인간이 할 줄 아는 게 돈지랄밖에 없거든요.”
“돈지랄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근데 그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요. 재력, 즉 금력은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비견되는 힘도 있고, 늘리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운 게 돈입니다.”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그래야 잘 지배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마 일 공자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금호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욕심 많은 금상룡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게다가 반호진이라는 패는 금호연이 가진 최상의 패지만 반대로 최고의 약점이기도 했다.
금호연을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준 게 반호진인 만큼 그가 떠난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었다.
“제가 일 공자에게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누군가의 도구로 살아갈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무인의 자긍심을 떠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전 저로서 살고, 죽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금호연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담아서 고마움을 표현했던 것이다.
더불어 한 줄기 의심도 사라졌다.
반호진은 돈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가 아니었기에 이제는 진짜 믿을 수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제 친구 정도는 될 수 있는 겁니까?”
“근처까지는 온 것 같습니다만.”
“더욱 노력해야겠군요, 하하하.”
웃는 얼굴과 달리 금호연은 내심 아쉬웠다.
선우방이나 서조운과는 대하는 게 살짝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금호연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면 허물면 되었다.
그리고 처음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금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서서히 좁혀 가면 될 일이었다.
반호진을 휘하에 거둘 수는 없겠지만 친구를 넘어 형동생까지는 가고 싶었다.
‘금가장주가 되어서도 반 대협은 반드시 필요해.’
당장 이번 일만 하더라도 그가 한 건곤일척의 도박은 성공했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 예상을 했기에 모든 판돈을 걸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는 성공했다는 것이고 처음으로 금상룡을 찍어 눌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금호연의 목표는 고작 금상룡을 치워 내는 게 아니었다.
‘더 높은 곳.’
금가장에서 오직 한 명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더불어 중원상계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금호연의 목표였다.
그러나 거기는 목표이지 끝이 아니었다.
또한 정복보다는 유지가 더 중요한 만큼 반호진과의 관계는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더욱 중요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오늘 표정을 보아하니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더군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대로 무너지면 제가 실망입니다.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요. 모두에게 제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일 공자는 좀 더 버텨 주어야 합니다.”
“다 보여 준 후에 보내 주겠다는 말이군요.”
“예. 반 대협께서 도와주시는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호연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대로 포기하면 오히려 그가 실망이었다.
따라잡기 위해 악착같이 올라온 만큼 금상룡은 좀 더 분발해 주어야 했다.
그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중원상계의 거두답게 금가장의 장원은 거대하고 화려했다.
내원은 낡은 걸 보수한 느낌이 난다고 하지만 외원은 달랐다.
황색을 띄는 벽돌로 쌓아서 그런지 언뜻 보면 황금의 성처럼 보였다.
“언제 봐도 어마어마하군.”
중원상계를 휘어잡은 곳답게 금가장의 규모는 다시 봐도 어마어마했다.
단순히 보기만 해도 위축이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부랄 두 쪽 밖에 없는 오중건에게는 그냥 돈 많은 곳일 뿐이었다.
인원만 따지자면 개방도 금가장에 꿀릴 게 없었고.
“녹림대군을 잡았다라. 허어, 참.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군. 근데 모든 게 명명백백한 사실이니.”
금가장에는 총 네 개의 문이 있었다.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중 북문은 명사나 명숙 같은 신원이 확실한 자들만 이용이 가능했다.
혹은 금가장에서 지위가 높거나.
그리고 오중건은 거기에 충분히 포함이 되는 인물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핫. 감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사에게 직접 안내까지 받았다.
개방의 후개라는 신분은 금가장에서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기에 오중건은 편하게 목적지로 바로 갈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북문위사였던 무사가 정중히 포권한 후 물러났다.
그런데 뛰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엄청나게 빨랐다.
안내할 때도 빨랐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빠른 듯했다.
“킁킁! 냄새가 많이 나나?”
오중건이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어째서 무사가 도망치듯 떠났는지 이유를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생각을 털어 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냄새가 나기는 해도 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였다.
“엄청 좋네. 사부님과 함께 왔을 때도 이런 곳에는 머물지 못했던 거 같은데. 아니지, 내원에 들어왔었나?”
오중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주팔황이 좁다 하며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싸돌아다닌 게 그였다.
당연히 금가장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원에 들어온 건 처음인 듯했다.
“금가장주도 외원에서 봤던 거 같은데. 근데 반 공자는 내원에 머문단 말이지? 이렇게나 좋은 거처를 배정받고?”
다시 봐도 화려함의 극치인 별채였다.
비견되는 장소가 안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반호진이 금호연에게 해 준 걸 생각하면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들어오시죠.”
구경하며 발걸음을 옮겼을 때 문 너머에서 반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오중건이 당차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소림사에서 뵙고 처음이니 오랜만이기는 하네요.”
“반 공자의 소식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가요.”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작 녹림대군을 잡은 것 가지고 너무 추켜세우는 것 같아서였다.
“되게 담담하시네요?”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녹림대군이 만만한 녀석은 아니지 않습니까. 막말로 저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무인인데요.”
개방의 후개지만 녹림대군은 그보다 십 년은 먼저 강호에 출도했던 무인이었다.
더욱이 녹림십팔채의 당대 총표파자였고.
막말로 그뿐만 아니라 명문세가의 수장들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가 녹림대군이었다.
그런 녹림대군을 이제 강호에 출도한, 그것도 고작 약관에 불과한 반호진이 잡았기에 백도무림에 속해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충격에 빠졌다.
“의외네요. 녹림도에 대해 세간의 평판은 상당히 낮은 걸로 알고 있는데.”
“산적이라고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기는 했지요. 하지만 제 연배의 중견고수들은 알고 있습니다. 녹림대군이 만만하게 볼 정도의 무인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더욱이 녹림대군은 혼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도움을 좀 받았지요.”
“하지만 녹림대군을 잡은 건 반 공자님이시죠.”
오중건이 예리한 눈으로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보통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기는 했다.
천룡이라 불리며 후기지수들 중 최고라 불리던 남궁광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을 때도 놀랐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니까 제가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불가능했다면 저는 산짐승들 배 속에 있었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당사자에게 직접 말을 들었음에도 오중건은 믿기지가 않았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괜히 그가 금가장까지 직접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근데 그걸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반 공자님을 직접 만나 보고 싶기도 했고요. 아마 저보다 다른 이들이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안 믿는 이들도 있겠죠. 혹은 비겁한 수를 썼다고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었기에 더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제가 그랬으니까. 혹시 철왕을 죽인 것도 반 공자님이십니까?”
개방의 후개이기에 오중건은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시 다른 수법을 쓴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녹림대군과의 싸움을 지켜본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더욱이 금호연과 후계 다툼을 하는 금상룡도 있었기에 상황이 변질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예. 사무궁으로 인해 금 공자와 인연을 맺었지요.”
“역시 그렇군요. 사실 철왕이 죽었을 때도 놀란 이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낭인이기에 평가절하하기는 하나, 그래도 엄연히 낭왕이니까요. 무림십왕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그 아래에 위치하는 고수인데 너무 갑자기 죽었으니까요.”
“아직 크게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녹림대군의 죽음이 워낙에 크니까요. 총표파자쯤 되면 단순한 산적이 아니니.”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게나 별것 아닌 놈이지 다른 이들한테는 아니었다.
괜히 하북팽가와 공동파의 장로들이 고전한 게 아니었다.
스윽.
“안 그래도 오 대협을 한번 찾아가 보려 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품속에서 꺼내는 얇은 책자를 보며 오중건이 물었다.
제목도 없는 책자였기에 오중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경에서 수상한 이들을 마주쳤습니다. 이건 그들에게서 얻은 건데 저로서는 알 수가 없어 오 대협께 도움을 좀 청하고 싶습니다.”
“수상한 자들요? 어디 소속입니까?”
“저도 모릅니다. 우연히 마주쳤고, 심문을 하기도 전에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도 품속에 있는 걸 챙긴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호진의 말에 오중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일단 책자는 집어 들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답게 궁금했던 것이다.
“이건 암호문이군요.”
“예. 그래서 오 대협을 찾아가려고 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쪽에는 문외한인지라.”
“하오문에 부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