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장. 궁한 자가 움직여야지. -01
난희주의 입에서 깊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격을 말해 달라는 건 팔겠다는 의미가 저변에 깔려 있었기에 난희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동시에 반호진의 손을 자기도 모르게 잡았다.
“저기요?”
“아! 죄송해요!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그만……!”
난희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자존심도 상했다.
자신 정도 되는 미녀가 먼저 손을 잡았음에도 반호진이 정색해서였다.
‘처음부터 미인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상하네.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난희주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한데 문제는 그런 행동들이 반호진에게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이해합니다. 아마 모든 무림인들이 알고 있을 테고요.”
“……그런데도 판매하실 생각이세요?”
“예. 노력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불법적으로 구한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구매하는 것인데요. 판매를 강요한다면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요!”
난희주가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해지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결코 잘못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약자를 핍박하고 이용해 먹으려 하는 게 잘못이었다.
그리고 약자라고 해서 천년만년 약자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합당한 가격이 아니면 안 팔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가격을 후려치는 걸 매우 안 좋아합니다.”
“저도 반 공자님께 그럴 생각 없어요. 오늘만 보고 안 볼 사이도 아닌데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면 안 되죠.”
스윽.
난희주가 씨익 웃고는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그러더니 전표 한 장을 뒤집은 채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보시기 전에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전표를 올려놓은 후 난희주가 말을 이었다.
미리 준비한 게 있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반호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대군의 무공 비급은 한 권인가요, 여러 권인가요?”
“한 권에 세 개의 무공이 담겨 있습니다. 내공심법, 도법, 그리고 보법요. 아,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살펴봤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한두 푼이 오고 가는 게 아닌데 이 정도는 확인해 드려야겠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무공은 어떤 게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모두가 무공비급을 품에 가지고 다니지는 않더군요. 종류별로 다 합쳐서 총 스무 개 정도 됩니다. 하지만 그중에 녹림대군의 무공에 비견될 만한 건 없습니다.”
반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직접 살펴보았기에 말할 수 있었다.
나름 쓸 만하기는 해도 상승절학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그럼에도 난희주는 망설이지 않고 즉결했다.
“반 공자님께서 모두 판매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전부 다 살게요.”
“전부 다요?”
“예. 반 공자님께서 다 확인해 주신 무공비급이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해요. 다른 분도 아니고 반 공자님께서 인증해 주신 것이니까요.”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진본인지 사본인지 알 수 없는 것에 돈을 쓰느니 지금처럼 확실한 쪽에 쓰는 게 훨씬 나아요.”
“문제가 생긴다면 따지겠다는 말로 들리네요.”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난희주는 그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뭐, 문제가 없으면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확인해 보세요.”
난희주가 전낭에서 전표를 더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
처음 올려놓았던 것 위에다가 겹쳐 올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자신만만한 그녀의 미소에 반호진이 짐짓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겹쳐져 있는 전표를 하나씩 펼쳐 늘어뜨렸다.
그는 물론이고 난희주도 볼 수 있게 한 장씩 펼쳤던 것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제대로 꺼냈어요.”
“정말 이 가격에 사신다는 겁니까?”
“네. 사실 이건 제 권한 밖이라 사부님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에요.”
“흥정하라는 말은 안 하던가요?”
“전혀요. 상인과의 거래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반 공자님은 무인이시잖아요. 그것도 약관의 나이에 일가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경지를 쌓으신 분인데 그에 따른 예우를 해 드려야지요. 또 이런 거래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난희주가 씨익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담긴 미소에 반호진은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투자라는 겁니까.”
“그렇죠.”
“하오문에게서 기름칠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그래서 싫으신가요?”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너무 과하다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대신 덤으로 이걸 드리죠.”
툭.
반호진이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던 무공비급들이 일제히 떠오르더니 반호진의 앞으로 날아왔다.
한데 권수가 딱 봐도 스무 권은 훌쩍 넘어 보였다.
“권수가 좀 더 많은데요?”
“하오문에도 일류무공은 꽤 많겠지요. 하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얻은 만큼 궁합이 맞는 무공이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구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테고. 그러니 이 중에서 궁합이 잘 맞는 것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생각지도 못한 선의에 난희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상승무공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상성이었다.
맞지 않는 내공심법과 검법을 익히면 오히려 위력이 반감되었다.
그래서 하오문이 상승무공을 얻어도 성과가 지지부진한 것이었다.
“이만큼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공심법을 중심으로 맞는 무공을 모아서 줄로 묶어 주는 반호진을 향해 난희주가 감동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눈시울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편견 없이 대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자 난희주는 너무나 고마웠다.
동시에 호감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다 계산된 겁니다. 이 선의가 나중에 더 큰 선의로 돌아오길 바라면서요.”
“치잇! 그건 말씀 안 하셔도 다 알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사람은 말을 안 하면 잘 모르지 않습니까. 조금 민망하더라도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죠.”
“고마워요.”
“한 가지 부탁드리자면, 이 무공들이 나쁜 일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반호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비록 전 주인들은 산적이었지만 앞으로 익힐 이들은 다르길 바랐다.
더불어 동족상잔도 더 이상은 없었으면 했다.
“그럴게요. 참, 문주님께서 반 공자님을 한 번 뵙고 싶어 하셔요.”
“저를요?”
이번에는 반호진도 살짝 놀랐다.
난희주가 찾아온 것도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웬만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는 게 하오문주와 소문주인데, 단순히 서신을 주고받는 게 아닌 직접 만나자고 하자 반호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많이 놀라시네요?”
“그럴 수밖에요.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건 어쩔 수가 없어요. 워낙에 안 좋은 의도를 품고 만나려는 이들이 많아서요.”
“압니다. 그래서 의아하다는 겁니다.”
“반 공자님이라면 편견 없이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난희주가 씨익 웃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반호진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인용한 것이었다.
그걸 모를 수가 없었기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근데 당장은 힘들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기로 하죠.”
“튕기시는 건가요?”
“난 소저는 몰라도 문주님이 금가장에 들어오는 건 좀 힘들지 않습니까?”
자신이 아니라 하오문주를 배려한다는 듯이 반호진이 말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기도 했다.
금가장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하오문주가 몰래 방문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난희주에 대해서도 알고는 있을 게 분명했다.
“힘들지는 않지만, 좀 애매하기는 하죠. 사실 제가 와 있는 것도 알고 있을 거예요. 다만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요. 반 공자님의 손님으로 방문했기에 이유가 명확하기도 하고. 아마 목적이 확실하게 않았다면 들어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한 말입니다. 오래는 아니지만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계획이라서요.”
“알겠어요. 문주님 일정도 있으니 적당한 시기를 잡아 보도록 할게요.”
꼭 반호진의 일정에 맞춰 주지는 않겠다는 듯이 난희주가 살짝 튕겼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반호진은 여유롭게 웃었다.
“어디에 있든 잘 찾아오시는 건 아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연락을 먼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심장이 약해서 이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거든요.”
“그럴 리가요.”
반호진의 농담에 난희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로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어서였다.
“꼭 그렇게 해 달라는 건 아니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암요, 당연히 그렇게 알아들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원하는 걸 모두 얻은 난희주는 나이에 어울리는 상큼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지출이 과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난희주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하오문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기에 난희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히 가시길.”
“가 볼게요.”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주는 반호진을 향해 난희주는 마지막까지 싱긋 웃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상당히 가벼웠다.
***
예기치 못한 난희주의 방문이었으나 반호진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늘 그렇듯 수련에 매진했다.
다만 방향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 생의 무위를 거의 되찾은 반호진은 좌수검에 관심을 가졌다.
“왼손이라.”
자신의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반호진이 왼손을 내려다봤다.
금가장에서 가장 좋은 별채이니만큼 앞뒤로 마당이 있는 건 물론이고 개인별 연공실도 따로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 정도의 경지쯤 되면 굳이 연공실과 개인공간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서 수련을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했다.
“검을 펼칠 때 보조로 사용한 적은 있지만 왼손을 주로 사용한 적은 없지.”
근래 들어 반호진은 스스로의 무공에 한계를 느꼈다.
분명 그는 강했다.
또한 전생 때 이룩한 무경을 거의 회복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지난 생에서 이룬 무경을 회복해 봤자 동귀어진을 반복할 뿐이었다.
스르릉.
반호진의 고민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경지를 회복해 봤자 전생과 같은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지난 생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지만 그래 봤자 천하사패 중 한 곳을 쓸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생각을 달리했다.
후웅. 후우웅.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점을 채우겠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아예 다른 길로 가는 건 아니었다.
그저 살짝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것뿐이었다.
오른손잡이이기에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니 스스로가 보기에도 엄청나게 어설펐다.
“쌍검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숙달이 되어야 해.”
반호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북해빙궁주와 동귀어진하면서 반호진은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한계였다.
오른손잡이기에 반호진은 평생 동안 오른손으로만 검을 펼쳤다.
그래서 반호진의 모든 검술은 오른손으로 펼치는 검로에 맞춰져 있었다.
물론 그게 정상이지만 동시에 반호진은 한계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