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장. 투자는 확실하게. -03
금상룡은 이를 갈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어이가 없어서였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멍청한 선택이라고 비웃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조롱했던 이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게 금상룡은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왜 그런 행운이 자신이 아닌 금호연에게 갔다는 게 너무나 짜증 났다.
‘그자를 내가 먼저 알았다면……!’
금상룡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새삼 깨달았다.
결국 마지막에 방점을 찍는 건 무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에게 반호진이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정반대였을 터였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들이 제 몫만 해 줬어도 요 모양 요 꼴은 나지 않았을 텐데.’
금상룡의 두 손이 부르르 떨었다.
굳이 반호진까지 갈 필요도 없이 거금을 들여 포섭한 공동파와 하북팽가의 장로들, 그리고 홍왕이 제 몫을 해 주었다면 이렇게 비참한 꼴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세 사람은 녹림십팔채를 상대로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했다.
쿠우웅!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잔금을 받지는 않았으나 금상룡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다.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금호연에게 따라잡혔다는 게 중요했다.
아니, 그와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왔다는 게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 이번 일을 해결하기는 했으나 아직 대공자님의 입지는 탄탄합니다. 이 공자가 성공한 것이지 대공님께서 실패한 것은 아니니까요.”
다시 한번 거칠게 책상을 내려찍는 금상룡의 행동에 석상처럼 나란히 서 있던 측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금호연의 입지가 급격하게 상승했다고 하나 그래 봤자 엇비슷해진 정도였다.
아직 금상룡이 지거나 뒤처진 건 절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성공이 아니면 실패한 것이다.”
“중립을 지키던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뿐이지 아직 대공자님의 기반은 탄탄합니다. 지금의 분위기에 일희일비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분위기가 확 쏠릴 수도 있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대책이다! 그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정작 핵심은 보지 못하고 낙관적인 말만 해 대는 모습에 금상룡이 노성을 터트렸다.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노기 가득한 고성에 측근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금상룡이 바라는 대책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타개책을 궁리하기는 했으나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털썩!
자리에 일어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던 금상룡이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실망감과 초조함 때문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 느낌에 금상룡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한데 그 순간 그의 뇌리로 한줄기 생각이 번뜩였다.
‘잠깐만.’
축 늘어져 있던 금상룡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금호연이 지금과 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반호진이 지원해 주었기에 여기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었다.
즉 반호진을 빼면 금호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호진을 빼앗으면 된다. 그럼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 있어.’
금상룡이 두 눈을 번뜩였다.
생각해 보니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묘책이었다.
특히 금호연의 것을 빼앗는다는 게 금상룡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벌떡!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금상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법을 찾았는데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대공자님?”
“지금 바로 반호진에게 갈 것이다. 준비하도록.”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금호연에게서 반호진을 빼앗는다면 지지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타격도 줄 수 있었다.
거기다 모든 관심을 자연스레 가져올 수도 있었기에 금상룡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금상룡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단순히 금전적인 걸 넘어 반호진이 혹할 만한 조건들을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미리 사람을 보내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예!”
반호진에게 간다는 말을 들은 순간 금상룡의 계획을 알아차린 측근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눈빛은 어느새 금상룡과 똑같아져 있었다.
‘얼마만큼을 받았든, 어떤 걸 받았든 무조건 배로 주면 돼. 두 배가 부족하다면 세 배, 네 배를 주면 된다.’
금상룡은 자신 있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기에 금액으로 싸운다면 절대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반호진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보다는 비싸더라도 차라리 확실한 게 나았다.
‘물건이랑 똑같은 거지.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다면 억만금도 소용없지. 하지만 구할 수 있다면 억만금을 쏟아부어서라도 손에 넣어야 해.’
이 사실을 금상룡은 이번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어중간한 물건을 구입해서였다.
만약 그가 반호진을 먼저 알았더라면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을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기 전까지는 정말 재수 없고 얄미웠었는데 내 손에 들어올 거라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군.’
빠르게 걸어가던 금상룡이 히죽 웃었다.
금호연에게서 반호진을 빼앗을 걸 생각하니 그렇게 흥분될 수가 없어서였다.
더구나 반호진은 신원 또한 확실했다.
소림사 방장의 제자이기에 배경도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마.’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기분을 금호연도 똑같이 겪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금상룡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반호진을 빼앗긴 금호연의 표정이 말이다.
***
늦은 오후에 뜻밖의 손님이 반호진을 찾았다.
금가장에서 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오랜만이죠?”
“그러네요.”
“그런 것치고는 크게 안 당황하시네요?”
“놀라고 있습니다. 난 소저를 이곳에서 볼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반호진이 정말 놀랐다는 듯이 과장되게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난희주가 피식 웃었다.
농담을 진담처럼 하지만 그녀는 이런 반호진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편한 기분이었다.
“절 놀리시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근데 신분을 밝히시고 들어오신 겁니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서가장은 밝히는 게 맞지만, 금가장은 꼭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호오.”
“반 공자님이라면 이유를 짐작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난희주가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마치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죠.”
“그보다 정말 놀랐어요. 반 공자님께서 녹림십팔채를 와해시킬 줄은요.”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모두와 같이했죠.”
“녹림대군을 잡으신 게 반 공자님이시잖아요.”
말하면서도 난희주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가 받은 충격은 컸다.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제일이고, 그 자리를 꽤 오랫동안 차지할 거라 예상했지만 반호진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마 대부분이 자신과 비슷했을 거라고 난희주는 생각했다.
“소식이 빠르네요.”
“하오문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중원 전역으로 퍼지고 있고요. 아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전부 충격에 빠졌을 걸요?”
“안 그런 이들도 꽤 많을 겁니다. 산적은 산적일 뿐이니까요.”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실을 듣고도 거짓이라 말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수두룩했다.
아니면 반대로 녹림대군의 실력을 폄하할 것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무위도 깎아내릴 수 있을 테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소수일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녹림대군은 과소평가된 무인이니까요. 그걸 하북팽가와 공동파의 장로들이 증명했고요. 낭왕이 어째서 무림십왕보다 아래인지도 이번에 확실하게 무림에 보여 주었죠.”
“상당히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본문이 알아내고자 해서 못 알아내는 건 없어요.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죠.”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의 난희주보다 하오문의 저력을 더 잘 알고 있는 게 그였다.
“그렇겠죠.”
“어? 인정하시는 거예요?”
“네. 근데 왜 놀라십니까?”
“저야 당연히 본문의 역량을 알고, 믿고 있지만 반 공자님은 아무래도 외부인이니까요. 본문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데 순순히 인정해 주시니 조금 의아하다고나 할까요.”
“순수하게 정보력에 한해서는 개방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무림에 한해서는 개방이 조금 더 낫겠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하오문이 더 뛰어나겠죠.”
난희주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소림사 방장의 제자가 하오문을 이토록 인정하는 발언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렇다고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때문에 난희주는 속으로 정말 크게 놀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지만 금가장의 정보력 역시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정해요. 상계에 한해서는 독보적인 곳이 금가장이니까요.”
난희주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인물이 아님을 이번에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반호진이 거대하게 보였다.
“상계를 제외하면 하오문이 더 낫다는 말로 들리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드러나지 않은, 어두운 쪽의 정보는 저희가 전문이기도 하고요. 일단 제가 하오문의 소문주이기도 하고.”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반 공자님께 청할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난희주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교분을 나누기로 한 사이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더욱이 지금의 위상은 지난번과 감히 비교할 수 없었기에 난희주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반호진을 응시했다.
“청이라. 감이 잡히질 않는군요.”
“이번에 태호채에서 있었던 전투로 반 공자님께서 얻은 무공비급이 적지 않다고 들었어요.”
“아.”
난희주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만약에 파실 의향이 있다면, 본문이 구입을 하고 싶어요.”
“역시라고 해야 하나요. 금가장에서 아직 구입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 모양이네요.”
“아직은 팔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경매를 해야 한다면 본문은 참여할 의사가 있어요.”
난희주가 다부진 얼굴로 대답했다.
비록 산적 나부랭이로 불렸다고 하나 녹림대군은 결코 만만한 무인이 아니었다.
녹림십팔채의 총채주, 총표파자가 되기 위해서는 웬만한 무공으로는 불가능했다.
거기다 녹림대군이 직접 익힘으로써 안정성 역시 증명했기에 난희주는 구입이 가능하다면 반드시 살 생각이었다.
“원하시는 건 녹림대군의 무공이겠죠?”
“네. 그게 힘들다면 다른 채주들의 무공이라도 구입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난희주가 간절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제발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눈빛이었다.
특히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난희주는 조마조마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름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는 게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반호진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생각하신 가격이 듣고 싶은데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