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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40화 (40/468)

제 16장. 투자는 확실하게. -01

무인의 자긍심은 내다 버렸는지 주도한 조양혁을 비롯해서 채주들 중 누구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반호진을 죽이겠다는 살심만 가득했다.

하지만 기습이나 마찬가지인 채주들의 합공에도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에는 그가 겪어 온 수라장이 너무 많았다.

쩌억!

한 줄기 검강이 허공을 갈랐다.

딱히 특별할 거 없는 평범한 검강이었는데 결과는 달랐다.

조양혁은 물론이고 모든 채주들이 강기를 일으키며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는데 누구 하나 그의 검강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기는커녕 받아 내지도 못했다.

“어어?”

“이게, 어떻게 된…….”

가볍게 그은 일검에 강기는 물론이고 채주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와 몸뚱이가 한꺼번에 절단되었다.

그냥 통째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투둑! 투두둑!

막고 피하고를 떠나서 그냥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누어진 채주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잘린 부위에서 피를 쏟아 내며 전부 다 절명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산적들이 언제 환호성을 내질렀냐는 듯이 침묵에 빠졌다.

“어, 어떻게……!”

그리고 놀란 건 왼팔이 잘린 녹림대군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녹림대군은 충격에서 빨리 빠져나왔다.

동시에 몸을 돌렸다.

모든 수법을 다 사용했는데도 죽이지 못했기에 녹림대군은 도주를 선택했다.

굴욕적이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참 신기해. 어쩜 그렇게 똑같은 선택을 하는지.”

“헙!”

의동생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 따위는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급히 도주하던 녹림대군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대경실색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반대쪽에 있던 반호진이 어느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을 하나 봐.”

“사, 살려 주게! 우리가 꼭 서로 죽여야만 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조건을, 조건을 말해 주게! 원하는 게 있다면 다 주겠네! 그러니 내 목숨만은…….”

“난 후환을 남겨 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푹.

금광신보로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반호진이 녹림대군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반호진은 녹림대군의 목도 베었다.

“우아아아!”

“녹림대군이 죽었다!”

“총표파자가 쓰러졌다!”

악명으로 천하를 진동시키던 이답지 않게 녹림대군의 마지막은 허무했다.

반항다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목이 잘린 녹림대군의 거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금호연이 지금껏 억눌러 두었던 숨을 터트렸다.

“모두 공격해라! 강탈당한 표물을 가져와라!”

“존명!”

반호진은 약속한 대로 녹림대군과 참벽도를 잡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채주들과 부채주들도 적지 않게 처리해 주었기에 금호연을 따르는 병력들은 거침없었다.

녹림대군의 죽음으로 잔뜩 웅크려 있는 산적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우리는 공자님을 지킨다!”

“충!”

호위대주를 비롯해 금호연의 수족이자 친위대라 할 수 있는 호위대는 전장에 참전하지 않았다.

아직 금상룡의 진영이 남아 있었기에 금호연을 중심에 두고서 촘촘히 방진을 구축했다.

혹시라도 금상룡이 공격해 올 수도 있었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호위대주는 금상룡 쪽을 예의 주시했다.

“고, 공격해라!”

“막아!”

한편 수뇌부가 박살 난 산적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살아남은 채주들이나 부채주들이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따르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산적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산적들은 간부들이 명령해도 각자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하아압!”

“차합!”

금호연이 데려온 병력은 정말 밀물처럼 산적들을 쓸어 갔다.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산적들을 밀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중 두드러지는 활약을 선보이는 이는 누가 뭐래도 서조운과 선우방이었다.

반호진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둘 다 기세가 상당했다.

화르르륵!

특히 서조운은 처음 겪는 대규모 전투임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극양지기의 장점을 여지없이 보여 주며 산적들을 도륙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선우방이 특유의 탄탄한 검세로 달려드는 이들을 싹 다 쓸어버렸다.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보완해 주며 다수를 상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장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커헉!”

“끅!”

이곳에 집결한 산적들은 녹림십팔채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금호연이 데려온 무사들의 피해도 상당했다.

녹림대군의 죽음으로 산적들의 기세가 꺾였다고 하나 그래도 가지고 있던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음에도 반호진의 시선은 선우방과 서조운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렇게 생각 없이 되는 대로 공력을 사용하면 얼마 안 가서 퍼진다.”

“옙!”

“그동안 해 온 기본기 수련은 어떻게 된 거야? 얼마나 싸웠다고 벌써 검 끝이 흔들려? 다리는 풀린 거야?”

“시정하겠습니다!”

무지막지한 극양지기를 이용해 불꽃처럼 일렁이는 검기를 살벌하게 휘두르고 있었지만 반호진에게는 그 모습조차도 어설퍼 보였다.

물론 첫 실전인 걸 감안하면 분명 엄청 잘하고 있는 건 맞았다.

그러나 반호진은 고작 저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서조운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생각하면 저 정도 활약은 기본이었다.

“흐읍!”

까가가강!

그러면서도 반호진은 선우방의 전투도 틈틈이 살펴보고 있었다.

워낙에 기본기가 탄탄한 선우방이었기에 반호진이 조언할 건 없었다.

그저 경험을 쌓게만 해 주면 되었다.

그러면 알아서 잘 클 게 분명했다.

“이쪽은 얼추 정리가 되어 가는 듯하고. 문제는 저쪽인가.”

뒷짐을 지고서 구경꾼처럼 서서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런 반호진을 향해 달려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녹림대군을 쓰러뜨린 반호진에게 덤빌 간 큰 자는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편하게 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반 대협.”

“조마조마하셨죠?”

“그럴 리가요. 전 반 대협을 믿고 있었습니다.”

금호연이 호위대를 이끌고 반호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새삼 신기한 눈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반호진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했고, 금호연은 거기에 판돈을 걸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녹림대군을 쓰러뜨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꿀꺽!

그래서인지 금호연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녹림대군의 시체를 쳐다봤다.

악명으로 천하를 진동시키던 총표파자가, 낭왕조차도 아래로 내려다보던 녹림대군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자 금호연은 보면서도 살짝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모든 이들이 얼마나 녹림십팔채를 만만하게 생각했는지도 깨달았다.

‘공동파와 하북팽가의 장로들조차 쉽게 상대하지 못할 정도라니.’

물론 정정당당한 대결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정정당당을 찾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다.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게 전쟁이었고,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였다.

승리한 자가 모든 걸 가지는 전쟁이기에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었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충분하지만, 더 확실하게 보여 줄 생각입니다.”

“여기서 싸우실 생각은 없으시군요.”

반호진이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이 아니라는 걸 이번 대답으로 다시 한번 알 수 있어서였다.

“예. 지금은 일 공자를 따르지만 저들 역시 금가장의 가솔들입니다. 제 살 파먹기를 할 수는 없지요.”

“공격한다면요?”

“그럼 싸워야겠지요, 제 목을 거저 줄 수는 없으니. 하지만 그렇게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보아하니 반 대협이나 서 공자는 몰라보는 듯하지만 선우 소협은 알아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반 대협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녹림대군을 때려잡는 걸 봤는데 먼저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염치가 있다면 그래선 안 되기도 하죠.”

“맞습니다.”

금호연이 맞장구를 쳤다.

경쟁하는 사이고 동료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죽을 뻔한 걸 반호진이 살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칼을 들이대는 건 정말 파렴치한 짓이었다.

“슬슬 정리가 되어 가네요. 우선 강탈당한 표물부터 찾아볼까요.”

“같이 움직여 주실 겁니까?”

“예.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끝났다고 안심할 때가 가장 뒤통수 맞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죠.”

둘이 똑같이 헉헉대는 서조운과 선우방을 향해 반호진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로 금호연과 호위대가 따랐다.

***

말 그대로 금의환향을 해서 그런지 금가장으로 돌아온 반호진은 출발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다.

금가장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별채를 통째로 배정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반호진은 그런 대우에도 딱히 기뻐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당연한 대접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전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아요.”

“너무 호화스러워서?”

“그것도 그런데 모두가 극진하게 대접해 주는 게 적응이 안 돼요.”

서조운이 여전히 감탄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그의 방은 반호진이 배정받은 방과 구조는 달랐으나 화려한 건 매한가지였다.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 도움을 준 만큼 받는 것뿐이니까. 상인이잖아. 이만한 대우를 받을 만하다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렸으니까 해 주는 것뿐이야.”

“형님은 되게 익숙해 보이세요. 사실상 가장 낯설어야 하는 게 형님이잖아요.”

“공수래공수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의외로 알맞은 말이기도 하네요.”

서조운이 눈을 껌뻑거렸다.

어차피 죽으면 다 똑같다.

여기서 죽으나 산속에서 비명횡사하나 흙으로 돌아가는 건 다 똑같았기에 서조운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나도 신기하기는 해. 어떻게 평정심을 그렇게 유지하는 거야?”

“그러니까 녹림대군도 잡았겠지?”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너 내 친구 맞냐?”

“맞지. 그러니까 네 눈앞에 있겠지.”

태호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지 선우방의 초점이 순간 흐려졌다.

그러나 이내 본래대로 돌아와서는 반호진을 쳐다봤다.

“허참, 스물의 나이에 녹림대군을 처치하다니.”

“진짜 천재는 따로 있는 거겠죠. 천외천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서조운이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자신도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반호진은 격이 달랐다.

천재에도 급이 있다는 걸 서조운은 이번 일로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런 서조운의 눈빛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 없다. 나는 좀 다른 경우고.”

“어떤 경우인데요?”

“거기까지는 말해 줄 수 없고. 그보다 둘 다 생각은 해 봤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몫으로는 너무 많은 거 같다. 사실 나는 전투의 승패에 있어 크게 관여한 게 없는데.”

“저도요. 승부의 향방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오히려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선우방에 이어 서조운이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건성으로 싸운 건 아니었다.

둘 다 목숨을 걸고 함께했고, 같이 싸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둘 다 각자의 가치를 너무 낮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너희들이 대충 싸운 것도 아니잖아? 목숨을 걸고 참전했는데 그에 상응하는 값은 받아야지.”

“그렇게 말하면 또 틀린 말은 아닌데.”

“비싸게 삯을 치르는 것도 투자야. 자기 좀 잘 봐달라는 거지. 앞으로의 관계 개선을 위한 투자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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