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독보적인. -04
한순간에 허리가 절단 날 상황임에도 반호진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했다.
그게 녹림대군의 심기를 건드렸다.
겁을 먹지는 않더라도 긴장은 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게 말해 주는 건 하나였기에 녹림대군은 특유의 호랑이 같은 눈매를 꿈틀거리며 공력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툭.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체급만 봐도 비교가 안 되는 반호진이 녹림대군의 참마도를 막아 세웠다.
단순히 막아 내거나 흘려내는 게 아니라 무지막지한 힘과 진기가 서려 있는 참마도를 평범한 청강검으로 붙잡았다.
그 모습에 녹림대군이 눈을 부릅떴다.
“뭐, 나로서는 좋지만.”
그그극.
정확히 맥을 끊어 참마도를 막아 세운 반호진이 그대로 도신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도병까지 접근하자 녹림대군이 퍼뜩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자칫 잘못하면 손목이 날아갈 수도 있기에 일단은 거리를 벌린 것이었다.
그리고 물러나도 반호진의 검은 닿지 않지만 그의 참마도는 달랐다.
부웅!
청강검보다 족히 두 배 이상 큰 데다가 팔 길이까지 감안하면 충분히 반호진에게 닿고도 남았다.
녹림대군은 그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콰아앙!
물러남과 동시에 휘두른 일격이 반호진을 갈랐다.
아니, 가른 것처럼 보였다.
반호진의 잔상이 흩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흐읍!”
그러나 녹림대군은 잔상이 흩어지기 전에 알았다.
참마도에서 흔히 말하는 손맛이 전혀 없었기에 도강이 애먼 땅바닥을 찍기 무섭게 연거푸 참격을 뿌렸다.
공력을 가일층 끌어 올리고서 폭풍처럼 참마도를 휘둘렀던 것이다.
꽈아앙! 꽝! 쩌저저적!
녹림대군의 참마도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기세를 몰아 파상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그 결과 반호진의 주변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참마도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온 도강이 사방팔방을 휩쓸어서였다.
꿀꺽!
“혀, 형님께선 괜찮을까요?”
여전히 처음 있던 자리에서 반호진과 녹림대군의 대결을 지켜보던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선은 거대한 도강이 휘몰아치는 격전지에 두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건 옆에 있던 선우방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기세로 사방을 휩쓸어 버리는 녹림대군의 도강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까지 제대로 맞은 건 없어. 즉 치명타는 없다는 이야기지.”
“근데 형은 제대로 보여요? 저는 먼지구름 때문에 잘 안 보여요.”
“먼지구름이 없어도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힘들걸?”
“형은 보여요?”
“솔직히 말하면, 희미하게. 둘 다 나보다 높은 수준이니까.”
선우방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도 하고 있었고.
그러나 격차가 이렇게까지 날 줄은 몰랐기에 선우방은 정말 크게 놀랐다.
“이길 수 있을까요? 저쪽이 달려들면 저희도 뛰쳐나가야 할 것 같은데.”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없어. 심지어 충돌도 없고. 완벽하게 녹림대군의 파상공세를 회피해 내고 있다는 뜻이지. 오히려 이대로 가면 불리한 건 녹림대군이야. 아무래도 공격하는 쪽이 체력 소모가 더 클 수밖에 없으니까.”
“이대로 피하기만 하다 끝낼 형님이 아니긴 한데, 걱정이 되네요. 산적들만 있는 게 아니라서.”
서조운의 시선이 조용히 진영을 정비하는 금상룡 쪽으로 향했다.
반호진의 등장으로 전장은 소강상태에 빠졌고, 그 틈을 타 금상룡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조용하게 무사들을 복귀시키며 진영을 구축했던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기도 했고, 이제는 이쪽의 전력이 더 우세하니까요.”
“다 같이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부수겠다는 심보로요.”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결판이 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일 공자에게 있어 가장 좋은 상황은 우리와 녹림십팔채가 양패구상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형님이 확실하게 승리하길 기대해야겠네요.”
“저는 그럴 거라 믿고 있습니다.”
모두가 놀라고 잔뜩 굳어 있는 것과 달리 금호연은 담담했다.
처음부터 반호진이 녹림대군을 잡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서였다.
오히려 금호연은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녹림십팔채의 잔당보다 일 공자의 진영이 더 큰 문제다.’
금호연의 시선이 금상룡에게로 향했다.
녹림십팔채를 얕잡아 본 대가로 금상룡의 전력은 한순간에 반 토막이 난 상태였다.
그러나 영입한 이들을 비롯해서 핵심 전력이 거의 대부분 남아 있는 만큼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호연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녹림십팔채라면 모를까 우리 쪽을 섣불리 공격하지는 못할 테지.’
공동파와 하북팽가의 장로들은 거래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지 금가장의 후계 다툼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합류한 게 아니었다.
더욱이 금호연의 진영에는 선우세가와 서가장이 있었다.
같은 백도무림에 속해 있는 만큼 제아무리 하북팽가와 공동파라 하더라도 살수를 쓰는 건 불가능했다.
합당한 명분이 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심지어 반 대협은 소림사 방장인 담현 대사의 제자시지.’
거기에 반호진까지 있었다.
녹림대군을 상대하느라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지금처럼 본 게 있으니 선뜻 달려들지는 못할 터였다.
소림사라는 배경도 억제력을 상당히 발휘할 게 분명할 것이었고.
그렇다면 금가장의 병력으로만 싸워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금호연이 유리했다.
‘변수는 홍왕인가.’
금호연의 시선이 유독 눈에 띄는 홍의무복을 입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하북팽가와 공동파의 장로들과 달리 그녀는 낭인이었다.
즉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얼마든지 금가장의 후계 다툼에 참전할 수 있었기에 금호연은 미간을 좁혔다.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가장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반호진이 녹림대군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제아무리 홍왕이라 하더라도 별수 없을 터였다.
소림사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꽈아아앙!
그때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들렸던 것과는 배는 큰 폭발음에 금호연의 고개가 다시 격전지로 향했다.
***
‘이대로는 내가 먼저 지친다.’
끊임없이 참마도를 휘두르던 녹림대군이 이를 악물었다.
의동생을 가볍게 날려 버릴 때부터 반호진이 만만치 않은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첫 손속을 나누면서 다시 확인했고.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솔직히 몰랐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반호진은 가까스로 그의 일격을 피했다.
하지만 녹림대군은 알았다.
눈앞에 있는 이 건방진 녀석에게 여유가 있음을 말이다.
게다가 간결하게 움직이는 반호진과 달리 그는 중병기를 다루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동작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반호진보다 그의 체력 소모가 더 크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쉴 새 없이 도강을 뿌렸기에 내공 소모도 상당했다.
쌔애액!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녹림대군의 도세가 달라졌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에서 세밀하게 초식을 펼치는 것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강맹한 초식은 맞으면 확실하게 날려 버릴 수 있지만 반대로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녹림대군은 공격 방식을 바꿨다.
“슬슬 지친 모양이네.”
확연히 달라진 초식에 반호진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방법을 바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서였다.
오히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타고난 신력을 이용해서 싸우던 이가 생각을 바꾼다고 곧장 정교한 도세를 뿌리는 건 불가능했다.
투웅!
도리어 투박함만 더 드러낼 뿐이었다.
어중간한 상대라면 통할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반호진에게는 아니었다.
“어?”
더욱 빠르고 정교하게 반호진에게 도를 뿌리던 녹림대군이 두 눈을 껌뻑였다.
어느 순간 나타난 검극이 그의 참마도를 튕겨 내서였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의 반도 채 안 될 것 같은 체중을 가진 반호진이 너무나 쉽게 참마도를 밀어낸다는 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궤적을 비틀었는데 기이하게도 녹림대군은 그걸 흘려낼 수가 없었다.
퉁! 투웅!
“이익!”
더욱 거세게 참마도를 휘둘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초식을 다 펼치기도 전에 정확히 맥을 끊어 버리는 반호진의 검에 녹림대군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기술은 반호진이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웅웅웅!
아직 그에게는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반호진이 말도 안 되는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게 승부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반호진에게도 약점은 있었고 녹림대군은 그걸 집요하게 파고들 생각이었다.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가, 강환이다!”
도강을 줄기줄기 뿌려 대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반호진과의 대결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켜보던 모두가 놀랐다.
녹림대군의 참마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동시에 바짝 쪼그라들었던 녹림도들의 사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이겼다!”
“강환이면 제깟 놈도 별수 없지!”
“짓뭉개 버리세요!”
“우아아아!”
녹림대군의 강환에 산적들이 환호했다.
반호진이 예상치 못한 무위를 보여 주었다고 하나 그래 봤자 애송이였다.
후기지수가 쌓을 수 있는 공력은 한계가 있었기에 산적들은 확신했다.
이번 일격으로 반호진이 갈가리 찢길 것임을 말이다.
“죽어라!”
그리고 그 생각은 녹림대군도 마찬가지였다.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못한 난적이었으나 끝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승리하는 건 그였고, 이번 일로 금가장을 아주 탈탈 털 생각이었다.
후계 다툼을 벌이는 금상룡과 금호연을 모두 생포해서 말이다.
“그따위 어설픈 강환을 믿고 설치는 꼴이라니.”
“어?”
기세등등하게 반호진을 향해 도극에 서린 강환을 내지르던 녹림대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코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경하거나 말거나 반호진은 느릿하게 검을 마저 휘둘렀다.
그러자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강환이 반으로 갈라졌다.
꾸아아앙!
동시에 두 자루의 검과 도가 맞닿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불안정하던 강환이 갈라지자 그대로 터져 버린 것이었다.
“크윽!”
눈부신 빛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주변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녹림대군과 반호진을 단숨에 집어삼켰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사방팔방을 휩쓸었다.
저벅저벅.
강기의 편린들이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폭발에 녹림대군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호신강기를 일으켰음에도 폭발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그때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폭발이 가라앉지 않았는데도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발소리에 녹림대군이 고개를 돌린 순간 무언가가 번뜩였다.
“끄아아악!”
동시에 녹림대군이 비명을 질렀다.
화끈한 통증이 왼쪽 어깨에서 느껴진 순간 왼팔이 떨어져 나간 걸 알 수 있어서였다.
“형님!”
“뭐 해! 전부 달려들어!”
“일단 칼이든 도끼든 죄다 박아!”
녹림대군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것과 동시에 조양혁과 녹림십팔채의 채주들이 일제히 쇄도했다.
모두가 후폭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조양혁은 조용히 움직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아직 싸울 수 있는 채주들을 이끌고서 은밀히 반호진의 뒤를 노렸던 것이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