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독보적인. -03
순식간에 부채주 두 명이 절명하자 금상룡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살기를 뿌려 대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반호진의 눈에는 오히려 잔뜩 겁먹은 모습으로 보였다.
고양이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털을 바짝 세운 모습 같다고나 할까.
금상룡과 호위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부채주들이 오직 반호진만 노려봤다.
“죽여!”
“저놈부터 처리하자고!”
그런 기색을 읽은 건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각 산채의 부채주들이 일제히 반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명이 죽었으나 이쪽은 아직 열다섯이 넘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무위를 가진 듯해 보였으나 외견이 약관 남짓했기에 다들 속으로 생각했다.
제깟 놈이 아무리 강해도 협공에는 별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건방진 새끼.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살아 있는 채로 포를 떠 주마!”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건 똑같네.”
빠각.
가장 먼저 반호진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던 털북숭이 거한의 머리가 꺾였다.
기형적인 각도로 비틀어지며 바닥에 고꾸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쿠웅! 쿵! 쿠쿵!
반호진은 달려드는 부채주들을 족족 꺾어 버렸다.
허리춤에 있는 검은 꺼내지도 않고 그냥 양손을 이용해서 잡아 비틀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초식을 펼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하게 손을 뻗어서 목을 잡고 순수하게 악력만으로 경추를 분질렀다.
“미, 미친!”
달려든 부채주 열 명이 순식간에 절명하는 모습에 뒤따르던 이들이 경악성을 토해 냈다.
그 정도로 지금의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리 마구잡이식으로 협공을 했다고 하나 녹림십팔채의 부채주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맹공을 펼쳤음에도 반호진의 몸에 닿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쩌억!
그리고 그 모습에 경악한 건 부채주들만이 아니었다.
운 좋게 목숨을 구함 받은 금상룡은 물론이고 뒤에서 지켜보던 선우방, 서조운도 놀랐다.
호위대와 금가장의 무사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이들은 금호연을 비롯해서 철왕 사무궁 때 반호진을 봤었던 호위대뿐이었다.
“가만히 있어 주면 나야 좋지.”
자기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는 부채주들을 향해 반호진은 느릿하게 다가갔다.
굳이 경신술을 펼칠 것도 없이 여유롭게 접근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피 튀기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반호진의 주위는 조용했다.
그때 아직 나서지 않았던 녹림십팔채의 채주 중 한 명이 노성을 터트리며 지면에 착지했다.
쿠웅!
“멍청한 것들! 고작 핏덩이에게 겁을 집어먹은 것이냐!”
“하, 하지만……!”
“변명 따위 필요 없다! 자고로 사내대장부라면……!”
전형적인 산적의 모습을 하고 있던 거구의 중년인이 말을 끊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말이다.
“산적 따위가 사내대장부 운운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산도적 나부랭이가 사내대장부라니. 네놈들은 그냥 버러지지.”
“우웁!”
분명 거리가 제법 남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 코앞에 다가와 있는 반호진의 모습에 중년인이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죽은 부채주들과 마찬가지로 반호진의 왼손이 그의 목을 붙잡고 있어서였다.
“해충은 보는 족족 죽여야지.”
꽈득!
진짜 벌레를 짓눌러 잡는 것처럼 반호진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너무나 쉽게 목뼈가 부러지며 중년인의 머리가 힘없이 등을 향해 축 늘어졌다.
뒤통수가 등에 닿았던 것이다.
“무, 무슨……!”
“헉!”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잡혀 죽은 중년인의 모습에 부채주들이 다시 한번 경악했다.
그저 그런 산적도 아니고 녹림십팔채의 채주 중 한 명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죽자 부채주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검을 뽑지 않은 상태로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우득! 뚝!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을 너무나 쉽게 치워 버리면서 말이다.
마치 무인지경처럼 반호진은 전장을 가로질렀다.
가는 길에 양옆으로 시체를 쌓으면서 말이다.
일개 산적이든 부채주든, 채주든 반호진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도대체 누구야?”
“저런 고수가 있었다고?”
전장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반호진의 앞을 막는 산적은 없었다.
녹림십팔채의 채주들조차 일초지적이 안 되는 마당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아서였다.
아니, 오히려 알아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누구지?”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그 덕에 금상룡이 데려온 세 사람도 여유가 생겼다.
그들을 공격하던 아홉 명의 채주들이 물러나서였다.
더불어 전장 역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저벅저벅.
조용히 전장을 멈춰 버린 반호진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로막는 이가 없자 아예 뒷짐을 지고서 녹림대군과 조양혁이 있는 절벽으로 걸어갔다.
“너와 같은 고수가 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누구냐.”
“네가 물으면 고분고분하게 대답해 줘야 하나?”
“허!”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듯해 보이는 반호진이 대뜸 반말하자 녹림대군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옆에 있던 참벽도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산적이라고 하나 그래도 강호의 도의라는 게 있었다.
그것도 그냥 산적이 아니라 총표파자인 의형에게 반말을 찍찍하자 조양혁은 참지 못하고 도를 뽑았다.
쌔애애액!
녹림십팔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답게 조양혁의 일격은 매서웠다.
참벽도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듯이 호쾌하고 강렬하게 반호진의 정수리를 노렸다.
스윽.
그야말로 벼락같은 일격이었으나 반호진은 여유롭게 피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어디를 노리는지 알 수 있는 일격에 맞아 줄 정도로 반호진이 쌓아 온 경험은 결코 얕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게 반호진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무인이 반호진이었기에 이어지는 조양혁의 참격을 철판교의 수법으로 피해 냈다.
“감히!”
연달아 두 번 연속 자신의 공격을 회피해 내자 조양혁의 두 눈에 노기가 서렸다.
한참이나 어린 반호진을 맞히지 못하는 게 그에게는 치욕으로 다가와서였다.
그러나 조양혁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따아앙!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는 반호진이 등과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락말락한 순간에 발을 들어 올렸다.
상반신을 스쳐 지나가는 조양혁의 도를 발끝으로 냅다 차 버렸던 것이다.
“큽!”
예상치 못한 반격에 조양혁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병에서 전해지는 충격도 충격이지만 순식간에 내부를 헤집는 공력에 조양혁이 일순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 틈을 반호진은 놓치지 않았다.
퍼억!
조양혁에게는 찰나일지 모르나 반호진에게는 아니었다.
도신을 발로 찬 것과 동시에 반호진은 몸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이어서 반대쪽 발을 휘둘렀다.
딱히 초식을 펼친 게 아니라 그냥 단순한 발차기였는데 조양혁은 조금도 반응하지 못하고서 그대로 일격을 맞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양혁아!”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구르는 조양혁의 모습에 녹림대군이 대노했다.
동시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동생이자 녹림십팔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인 조양혁이 허무하게 당하자 놀라웠던 것이다.
“내려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
“……어린놈의 새끼가 오만방자하구나.”
“우리가 예의를 차릴 사이는 아니잖아? 근데 왜 나이를 운운해? 어차피 우리 둘 중 하나는 뒈질 텐데.”
“하긴. 곧 뒈질 놈에게 예의를 운운할 필요는 없지. 근데 너는 모르겠는데 네 일행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전히 절벽의 동굴 속에 서 있는 녹림대군의 시선이 반호진을 지나 그 너머로 향했다.
금호연을 비롯해서 선우방과 서조운이 서 있는 곳을 일부러 쳐다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반호진은 미동도 없었다.
“죽으면 거기까지인 거지.”
“매정하군.”
“그게 강호니까. 결국 자신을 살릴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니까. 약하면 죽는 게 당연한 곳이기도 하고.”
“그럼 미련은 없겠군. 내 손에 죽는 것도.”
“언제까지 주둥이만 나불거릴 거야?”
쿠웅!
조양혁도 거구였지만 녹림대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보통 성인 장정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붙어 있는 듯한 키와 두꺼운 몸통은 거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다 녹림대군이 사용하는 무기는 마상에서나 쓸 법한 참마도였다.
웬만한 장정의 키만 한 참마도를 바닥에 찍으며 녹림대군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나서려고 했다. 네놈을 죽여야 정리가 될 것 같아서.”
“와.”
녹림대군이 피식 웃었다.
천하의 그를 오라 가라 하는 이가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호진의 배짱에 감탄했다.
웬만한 담력으로는 저러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대체 누구지? 저만 한 실력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을 텐데.’
참마도를 든 녹림대군이 느릿하게 이동하며 미간을 좁혔다.
반호진도 반호진이지만 사문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더욱이 그는 산적이었다.
명분이 있어도 따지지 않을 게 분명했기에 녹림대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눈알 굴리는 거 보니 내 사문이 궁금한가 봐? 어디 소속인지.”
“귀신같군.”
“척 보면 척이지. 근데 너무 앞서가는 거 아냐? 일단은 나를 쓰러뜨린 다음에 그걸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녹림대군도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단순히 힘만으로 총표파자가 된 건 아니라는 듯이 반호진을 도발했다.
젊은 나이이니만큼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건 네놈이 조금 이따 할 짓이고.”
“크하하하!”
녹림대군의 앙천광소가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산적들이 움찔거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반호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깟 장난질로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어서였다.
스르릉.
그래서 반호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참벽도까지는 대충 상대해도 되지만 녹림대군은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냥 무심한 얼굴로 검만 뽑았다.
“좋아, 그럼 실력 좀 볼까. 내 앞에서 건방을 떨 만한 실력인지 말이야.”
웅웅웅웅!
웃음을 뚝 그친 녹림대군이 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운을 머금은 도강이 태산조차 쪼개 버릴 기세로 반호진의 정수리를 노리고서 떨어져 내렸다.
흔하디흔한 태산압정의 초식이었으나 펼치는 이가 천하를 호령하는 녹림대군이었다.
거기다 강철조차 가볍게 베어 버리는 도강이 서려 있었기에 닿는 즉시 몸이 양분될 게 분명했다.
투웅.
한데 그 가공할 일격이 반호진의 일검에 밀려났다.
단순히 크기만 비교해도 몇 배나 더 큰 참마도가 반호진의 검극이 닿기 무섭게 궤적이 비틀어졌던 것이다.
콰아앙!
그로 인해 녹림대군의 참마도가 애꿎은 땅바닥을 강타했다.
하지만 녹림대군은 반호진이 너무나 쉽게 그의 참격을 흘려 냈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 보인다고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실력이 없었다면 채주들과 의동생이 당할 리 없었기에 녹림대군은 차분한 표정으로 참마도를 재차 휘둘렀다.
쌔애애액!
패도적인 기세를 흩뿌리며 참마도가 재차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허리부터 동강 낼 기세로 횡소천군의 초식이 펼쳐졌다.
“여전히 힘만 믿고 날뛰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