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독보적인. -01
혹시나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어 반호진이 다시 한번 쟁점을 짚었다.
그러나 그 말에도 서조운의 눈빛과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만약 제가 형님을 따라간다면 총표파자뿐만 아니라 녹림십팔채 전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요.”
“그런데도 가겠다고?”
“예. 이거 때문에 저를 살려 주신 거 아닌가요? 중원수호. 산적들은 무림은 물론이고 일반 양민들에게도 해악을 끼치는 존재니까요. 필요악이라는 단어가 있긴 하나, 이왕이면 없는 게 좋잖아요?”
서조운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이제 와서 자신을 왜 빼냐고 말이다.
칼을 갈았으면 써야 하는 법이었다.
“실전은 비무와 달라. 비무는 단순히 고하가 갈리지만 실전은 생사가 결정된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지.”
“대신에 그걸 밑거름으로 삼으면 전 엄청나게 빨리 성장하겠죠? 원래 부담이 클수록 얻는 것 역시 큰 법이니까요.”
“참나.”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서조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녹림대군이나 참벽도 같은 녹림십팔채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은 상대하기 벅차겠지만 그 밑은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실전을 겪으면서 급격히 강해져 녹림십팔채의 채주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형님이 죽을 자리에 가실 리가 없지.’
반호진은 설렁설렁 사는 듯하지만 지극히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었다.
그 예를 서조운은 북해에서 봤다.
분명 반호진의 경지라면 은밀하게 개판을 치는 것도 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타초경사를 우려한 거야. 지금보다 더 큰 판을 생각하신 거지.’
스무 살이지만 스무 살이라고 보기 힘든 심기와 판단력을 지닌 게 반호진이었다.
그 역시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반호진에게는 자신 없었다.
애초에 시야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그 시야와 통찰력이라는 건 단순히 지능과 재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형님은 자신 있으신 거잖아요. 녹림대군을 잡을 자신이.”
“똑똑하다니까.”
“그것도 있고, 형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있고요. 아마 이곳에서 저보다 형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요? 저는 북해도 같이 다녀온 사이잖아요.”
“뭐, 이번 경험이 특별하긴 하겠지. 네 성장에 있어서.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저희 둘이서만 싸워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금 공자도 사활을 걸고 있는 전력, 없는 전력 다 끌어모을 텐데. 그럼 답은 딱 나오죠. 저희는 녹림대군을 비롯해서 핵심 전력만 상대하면 된다는 뜻이죠.”
서조운이 척 하면 척이라는 듯이 당차게 말했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 모습에 콧방귀를 뀌었다.
“저희?”
“아, 정확하게는 형님이시죠. 저는 아직 갈 길이 머니까요. 그래도 어쭙잖은 절정고수까지는 상대할 수 있습니다. 경험은 일천하지만 저에게는 넘치는 극양지기가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체력도 이제는 방 형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고요.”
서조운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경험적인 부분만 빼면 자신 역시 상당한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힘만 넘치는 애송이지. 실전도 일대일과 다수와 싸우는 건 전혀 다르다.”
“어, 그런가요?”
“겪어 보면 알 거다.”
“그럼 저를 데려가신다는!”
서조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 말에서 허락이 떨어졌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나와 같이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네 목숨은 네 스스로 챙겨야 해.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네 자신만 신경 써. 그것만 해도 얻는 게 많을 거다.”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고. 그나저나 이걸 서가장주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반호진이 검지로 이마를 긁었다.
믿고 맡겼는데 대규모 전쟁에 데려간다고 하면 분명 노심초사할 터였다.
“일단 일 끝나고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유언장은 미리 남겨 놔야지. 그래야 한이 안 맺히지.”
“혀, 형님!”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조운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왠지 모르게 진담처럼 느껴져서였다.
“남겨서 나쁠 건 없지. 나도 쓸 거야.”
“형님도요?”
“응. 살아 돌아와서 태워 버리면 되잖아?”
“그건 그렇죠.”
서조운이 순간 혹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였다.
그런데 그때 서조운의 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흠흠! 조운이 혼자 있을 줄 알았는데 너도 와 있었네?”
“들어오세요!”
문 밖에서 선우방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서조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금 공자와 얘기가 끝났거든.”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내 손으로 금가장주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진짜 하게?”
선우방의 두 눈이 커졌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하겠다고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것도 금호연은 다른 고수들을 포섭한 상태가 아니었다.
선우방이 개인적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금호연은 오직 반호진만 만난 상태였다.
“왜? 무모할 것 같아?”
“현실적으로 봐도, 아니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왜 금 공자가 나를 찾아왔을까?”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조운이를 찾아온 거야. 조운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싶어서.”
총표파자와 녹림십팔채 전부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반호진은 긴장하기는커녕 너무나 여유로웠다.
마치 마실이라도 나갔다 오는 것처럼 말이다.
“저도 형님의 경지는 몰라요. 다만 형님이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믿을 뿐이죠. 깊게 파고들자면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이니 같이 죽어도 미련은 없고요.”
“애가 못 하는 말이 없다.”
“열일곱이면 다 컸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반호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제 딴에는 다 컸다고 생각하겠지만 반호진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나이만 살짝 찼을 뿐 집에서만 자라 왔기에 모든 게 어렸다.
“자신 있어?”
“결과를 보면 알겠지. 허세를 부리던 후기지수가 고꾸라질지, 아니면 녹림십팔채를 잡아먹을지.”
“나도 간다.”
“응?”
느닷없는 통보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서조운도 놀랐다.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어서였다.
그러나 선우방은 단호했다.
“친구가 사지로 가는 걸 아는데 보기만 할 수는 없지. 내가 함께한다면 그래도 우리 셋은 어찌어찌 빠져나올 수 있지 않겠어?”
“그것보다는 죽을 가능성이 더 클 텐데.”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어. 내 성격상. 그리고 내가 죽으면 소림사에서 좀 챙겨 주는 게 있지 않겠어?”
“끝까지 날 믿는다는 말은 하지 않네?”
“아직 못 봤으니까.”
선우방이 씨익 웃었다.
친구인 반호진이 강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조운의 말마따나 반호진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럼 이번에 보면 되겠네. 보이는 강호와 보이지 않는 강호가 어떻게 다른지를.”
***
무려 500명의 인원을 이끌고 있음에도 금호연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최대한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일 공자보다 늦게 출발해서였다.
게다가 숫자에서도 차이가 상당히 났다.
겨우겨우 500명 정도를 집결시킨 금호연과 달리 일 공자는 700명의 무인들을 동원했다.
“좀 더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상으로는 반 시진 정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서두른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금호연과 달리 선두에서 걸어가던 반호진은 느긋했다.
누가 보면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그 뒤를 따르는 호위대와 금가장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 공자가 이길 것 같습니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원도 저희보다 반 배는 더 많은 데다가 공동파와 하북팽가의 장로들을 데려왔지 않습니까. 거기다 낭왕 중 한 명인 홍왕(紅王)도 있고요.”
“그 셋이 녹림대군과 채주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요?”
“어, 반 대협께서는 힘들다고 보시는 겁니까?”
금호연이 눈을 깜빡거렸다.
동시에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주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서두르기는 하나 다급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게 금호연은 뒤늦게 떠올랐다.
“참벽도에 대해서는 몰라도 녹림대군과 공동파, 하북팽가의 장로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금 늦게 도착하는 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닐 겁니다.”
“으음!”
“중요한 건 녹림대군이지요. 사태가 여기까지 온 건 전부 그자 때문이니.”
“맞습니다. 녹림대군만 잡으면 사실상 싸움은 끝난다고 봐도 좋습니다. 저희나 일 공자나 절대고수가 부족한 거지 그 외의 전력은 녹림십팔채라 하더라도 꿀릴 게 없으니까요.”
금호연이 자신하듯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후미의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반 시진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일 공자가 녹림대군이 원하는 조건을 맞춰 준다면 모르겠지만 700명을 이끌고 간다는 건 거래가 아니라 싸우러 간다는 뜻이죠.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는 신나게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겁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죠. 거기다 양패구상까지 한다면.”
금호연이 눈을 반짝였다.
잘하면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까지는 안 될 겁니다.”
“예?”
“일단 가 보시죠.”
“너 너무 여유로운 거 아냐?”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선우방이 작게 물었다.
듣는 귀가 많기에 최대한 작게 말한 것이었다.
“가 보면 알아. 그러니 궁금한 건 좀 더 참아 줘.”
“조운이 너는 왜 이렇게 태평해?”
“형님이 여유로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저는 전적으로 형님만 믿고 있습니다.”
선우방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만 긴장한 것 같아서였다.
“야야, 이거 정말 괜찮은 거냐?”
“이대로 가서 우리 싹 몰살당하는 거 아냐? 일 공자는 공동파와 하북팽가의 장로들이 왔다던데. 거기다 낭왕까지. 근데 우리는 저 세 명이 전부잖아.”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그래도 우리는 그나마 후미잖아. 좀 지켜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빠지자고.”
“가능할까?”
금호연에게서 번진 불안감은 순식간에 전체로 퍼져 나갔다.
특히 뒤로 갈수록 두려움과 불안감의 크기는 점점 커져갔다.
일 공자가 데려온 세 명과 지금 금호연의 옆에서 걷고 있는 세 명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같은 급은커녕 무명으로 비벼 볼 수도 없는 셋을 금가장의 무사들이 회의적인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공자님은 무슨 생각으로……!”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정신 바짝 차리고 있다가 밀린다 싶으면 바로 내빼자. 일 공자 측이 싸우고 있을 테니까 후미의 몇 명이 빠져나가는 건 티도 안 날 거다.”
“일 공자 쪽이 승기를 잡으면? 솔직히 녹림대군 빼면 다 거기서 거기잖아? 숫자만 많지 산적 나부랭이들이니까. 차라리 일 공자 진영에 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멍청아, 받아 주겠냐? 이미 늦었지. 패잔병 신분이라면 모를까, 그냥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야.”
지시를 따르고는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확실하게 금호연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무너진 삼 공자 진영에서 회유한 이들이 그러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에서 불온한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진짜 후기지수 세 명만 데리고서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금가장의 일 공자 금상룡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나중에 합류할 가능성은?”
“반 시진 거리입니다. 그리고 목적지를 생각하면 합류를 했어도 진즉에 했어야 합니다.”
“그럼 정말 그 셋이 전부라는 건데. 고작 후기지수 셋만 대동하고서 녹림대군을 만나러 간다? 양패구상을 기대하는 건가?”